김연아는 26일(한국시간) 캐나다 밴쿠버 퍼시픽 콜리세움에서 치러진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150.06점을 얻어 쇼트프로그램 점수(78.50점)을 합쳐 총점 228.56점을 기록, 아사다 마오(일본.205.50점)를 23.06점 차로 제치고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피겨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김연아는 7살인 1996년부터 10년 만에 세계 정상급 피겨 스케이팅 선수로 성장해 국내는 물론 세계에 이목을 집중시켰다.
11살 때였던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전국 종합선수권대회를 5연패하며 일찌감치 국내 최고 선수로 이름을 알린 김연아는 2002년 4월 슬로베니아에서 열린 트리글라브트로피대회 노비스(13세 이하)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할 가능성을 보였다.
2003년 처음 국가대표로 선발된 김연아는 이후 2004-2005 시즌부터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주니어 그랑프리 대회에 출전, 본격적으로 국제무대에서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이후 일본의 아사다와 경쟁 구도를 형성하면서 김연아는 두 시즌 동안 주니어 그랑프리 시리즈와 세계선수권 등 8차례 굵직한 국제대회에 출전해 금메달 5개, 은메달 3개를 따내는 놀라운 활약을 펼쳤다.
특히 2006년 3월 주니어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발목 인대 부상을 이겨내고 한국 선수로는 처음 금메달을 따냈다.
2006년 11월 캐나다에서 열린 그랑프리 시리즈에서 김연아는 데뷔하자마자 쇼트프로그램 1위를 차지하더니, 이어 열린 그랑프리 시리즈 4차 대회에서는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김연아는 2007년 3월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쇼트프로그램에서 역대 최고점인 71.95점을 받았다. 비록 프리스케이팅에서 실수하는 바람에 종합 우승은 놓쳤지만, 이미 세계 정상급의 선수로 올라섰음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이 시즌 김연아는 처음 세계랭킹 1위로 올라섰다.
여전히 아사다와의 라이벌 구도는 이어졌지만, 이때부터 사실상 김연아는 '자신과의 싸움'을 벌이며 국제무대에서 찬란한 기록을 세워나갔다.
주니어 시절부터 이어진 크고 작은 부상과 세계 최고라는 고독과 부담감이 김연아의 가장 큰 적이었다.
발과 허리에 이어 2007-2008시즌부터는 고관절 통증이 김연아를 괴롭혔다.
여자 선수로는 사상 세 번째로 그랑프리 시리즈와 그랑프리 파이널을 모두 우승하고 그랑프리 파이널 2연패를 달성하며 미셸 콴과 타라 리핀스키(이상 미국), 이리나 슬루츠카야(러시아) 등 전설적인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지만, 부상 탓에 4대륙선수권대회에 출전하지 못했고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진통제 투혼 끝에 2년 연속 동메달에 그쳤다.
부상의 악령을 떨쳐낸 2008년 새 시즌에는 그랑프리 시리즈를 2회 연속 우승했지만 고양시에서 열린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홈 관객의 열광적인 응원에 따른 부담을 이겨내지 못해 아쉽게 3연패를 놓쳤다.
그러나 이 모든 시련을 겪으며 김연아는 한 단계 성숙했다. 부상도 떨쳐냈고 부담도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2월 4대륙선수권 우승으로 2009년을 열어젖힌 김연아는 3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신채점제(뉴저지시스템) 도입 이후 여자 싱글에서 '마(魔)의 점수'로 여겨지던 200점을 사상 처음 뛰어넘은 207.71점을 기록하며 첫 우승을 차지했다.
김연아는 새로 맞이한 2009-2010 시즌 첫 그랑프리 대회에서 210.03점을 획득, 여자 싱글 사상 처음으로 210점대의 벽을 깨뜨리며 스스로 한계를 넘어섰다.
이미 김연아의 기세를 막을 선수도, 장벽도 없었다.
김연아는 이어진 그랑프리 시리즈 5차 대회와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는 '실수하고도 우승하는' 압도적인 모습으로 실력과 담력을 동시에 증명했다.
전지훈련지인 토론토에서 맹훈련을 거듭하며 마지막까지 고삐를 늦추지 않은 김연아는 결국 '최강자는 동계올림픽에서 우승하지 못한다'는 속설을 비웃듯 역대 최고점으로 금메달을 차지하며 '피겨 전설'로 가는 길의 정점을 찍었다.
아주경제=이문걸 기자 leemoonger@ajnews.co.kr(아주경제=ajnews.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