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방문은 일본 경제인들의 초청으로 이뤄진 경제시찰 성격이었다. 당시는 개인 여행이 불가능한 시절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철저한 반일주의자였기 때문에 일본과의 어떤 협력도 거부했다. 그러나 국내 경제를 발전시키려면 일본과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점도 생각하고 있었기에 일본 쪽에서 초청이 오자 마지 못해 승인했던 것이었다.
한편으로 제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만신창이가 됐던 일본은 경제를 부활시키기 위한 디딤돌이 절실했다. 주요 공장들이 모두 파괴됐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선진국으로 제품을 수출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일본 기업인들은 가장 가까운 한국과의 협력을 통해 손쉽게 공장을 재가동시킬 수 있는 일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호암이 와세다 대학에 유학했다가 귀국한 이후 처음 밟아보는 일본 땅은 을씨년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패전 후 5년이 지났지만 그 상처는 도시와 근교 모두에 깊숙이 패여 있었다. 하네다 공항에서 도쿄 중심부에 이르는 연도에는 판잣집만 즐비했다. 예전에도 간간이 눈에 띄었던 큰 건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우리 경제시찰단은 3개월 동안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호암은 물론 함께 시찰단으로 왔던 전택보, 설경동 등 기업인들도 ‘이렇게 철저하게 초토화됐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며 혀를 내둘렀다. 일본의 각종 무기를 생산하던 가와사키중공업도 폭격을 맞아 건물의 골격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마치 독수리떼가 살점을 파먹은 뒤 내동댕이쳐진 코끼리 뼈 무덤을 보는 듯 했다.
어쨌든 당시로서는 장님이 절름발이와 협조해 먼 길을 떠나듯 일본이나, 한국이나 서로 협력 방안을 모색해 무엇이든 창출해 내야 할 입장이었다.
시찰이 끝날 즈음, 호암은 시간을 때우려 무심코 도쿄의 아카사카 뒷 길을 걸었다. 아카사카는 도쿄의 대표적인 유흥가로 불야성을 이루는 곳이다. 하지만 호암이 찾았을 때는 시골 도시의 뒷골목처럼 썰렁하기만 했다.
길을 걷던 호암의 시야에 이발소가 들어왔다. 가게 입구에는 ‘모리타(森田)이용점’이라는 문패가 붙어 있었다. 마침 머리를 자를 때가 됐다고 생각하던 터라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게 주인은 40세 전후로 보였다. 손님을 편안히 앉히고 가위질 하는 솜씨가 상당히 유연하다고 느껴졌다.
가위질 소리를 들으며 눈을 지그시 감고 머리를 맡기고 있던 호암은 가볍게 말을 건넸다.
"이 일을 언제부터 하셨습니까?"
"이 이용점은 1878년 문을 열었습니다. 제가 3대 째입니다. 가업으로 잇고 있으니 70년쯤 되는 것 같습니다. 자식 놈도 이 일을 이어갔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깊은 생각 없이 툭 던진 질문이었지만, 주인의 답변은 정신을 깨우는 힘이 있었다.
패전으로 깊은 좌절 속에 헤맬 법한 일본 그리고 일본인. 그러나 이 이발사는 담담하게 대를 이어 외길을 걷고 있었고, 또한 앞으로 자식도 그러한 삶을 이어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호암은 그 이발사의 직업정신에 큰 감동을 받았다. 비록 머리나 깎는 하찮은 일이었지만, 그 일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어하는 장인정신에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패전으로 일본은 폐허가 됐지만, 호암은 일본이 다시 일어설 것이라고 직감했다.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 각 분야마다 장인정신으로 무장된 일본은 패전의 아픔을 딛고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의 경제대국으로 부활했다.
호암은 첫 방문 후에도 일본을 찾을 때마다 이 모리타 이용점에 들러 머리도 깎고, 얼굴 면도도 했다.
돈을 펑펑 쓰지는 않았지만 정해진 이발 요금보다 몇천엔씩 더 얹어주는 등 인색하지는 않았다.
그 주인은 2005년 작고했다. 그의 바람대로 아들 모리타 야스히로 씨(62)가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야스히로씨 역시 젊었을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일했기 때문에 호암을 몇 차례 만난 적이 있다. 아버지가 자리를 비웠을 때 두어 차례 본인이 직접 이발해 준 적도 있다.
“이발소에 오시면 꽤 오래 머물다 자리를 뜨곤 하셨습니다. 일 얘기는 하지 않고 즐거운 얘기만 하다 가셨지요. 유창한 일본어로 ‘아내가 잘 있고, 손자 손녀들이 잘 논다’ 등 가족 얘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대기업가여서 정신이 없을텐데 가족 얘기를 많이 하는 걸 보고 참으로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이발소에 자주 들러 격려해주신 점을 생각하면 고마울 따름입니다.”
야스히로씨는 “부친이 호암보다 4살 아래셨는데 그 분이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듣고 무척 슬퍼하셨습니다. 이 회장님이 살아계셨을 때 한번은 면도기를 직접 들고 오셔서 ‘마이 나이프(my knife)니까 내 면도는 이걸로 하라’고 하신 적이 있었어요. 돌아가신 후에도 오래 보관해왔는데 언젠가 사라져 지금도 죄송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호암은 도쿄에서 유학했지만, 당시는 공부를 위해 학교만 다녔을 뿐 일본의 직인(職人)정신 즉, 장인정신을 체험한 적은 없었다.
실제로 일본에는 수백년을 이어가며 가업을 잇는 장인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오사카의 건축회사 ‘금강조’는587년 창업, 지금까지 1400년간 40대를 이어오고 있다.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인이 창업주인 것으로 알려진 금강조는 절을 전문으로 짓는 회사로, 어떤 대지진에도 견딜 수 있는 최고의 목조사원 건축회사로 명성을 구가하고 있다.
나라의 신당옥 여관은 1500년에 개업해 500여년을 이어오고 있으며, 나가사키의 카스테라가게 문명당(文明堂)은 카스텔라 한 종목으로 100년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도쿄의 긴자(銀座)에는 긴자 백점회(銀座 百店會)가 있다. 100년 이상 된 점포 100곳이 만든 모임이다.
일본 구석구석의 떡집, 생선횟집, 간장공장, 여관, 빵집 할 것 없이 모두 장인정신으로 똘똘 뭉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일본은 전쟁의 폐허에서 다시 일어나 철강, 가전, 반도체, 조선 분야에서 세계 최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병철은 삼성이 ‘100년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일본의 장인정신을 삼성의 정신으로 삼아야 한다고 가슴 깊이 새겼다.
일본의 장인정신을 뼈저리게 느낀 그는 삼성의 목표를 ‘품질 제일주의’로 삼았다. 자연히 좋은 품질의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최고의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는 실행 플랜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아주경제= 특별취재팀 skyjk@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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