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살을 도려내듯 애통과 한(限)으로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품을 떠났던 반도체사업이 10년 만에 그에게 되돌아올 수 없느냐고 노크하고 있다.
문제는 떠날 때는 한 없이 매력적인 노다지사업이었지만, 이젠 만신창이가 돼버렸다는 점이다.
구본무 회장에게 1999년 1월 6일은 평생의 ‘악몽’이었다. 김대중 정부의 빅딜 정책에 의해 자식처럼 애지중지하던 LG반도체를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반도체)에 넘겨야 했던 것이다.
당시 구본무 회장은 청와대에서 LG에 반도체 사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했지만 정부의 재벌 개혁정책에 맞서는 위험을 감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LG반도체를 포기하기로 결정한 그날 저녁. 청와대를 나선 구회장은 측근들과 함께한 위로 술자리를 끝낸 후 집으로 가는 길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반도체 빅딜을 중재했던 전경련과는 '인연을 끊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이후 전경련의 숱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공식 행사에 참석하지 않고 있다. 당시 그의 충격이 얼마나 컸던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1974년 삼성전자가 한국반도체를 사들여 관련 사업에 착수하자 LG그룹은 금성사(현 LG전자)를 축으로 1979년 대한전선의 대한반도체를 인수, 치열한 경쟁을 벌여왔었으나, 친자식을 가슴에 묻듯 애지중지하던 반도체 사업을 중도에 넘겨줘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구 회장의 심경은 어떨까?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여겨졌던 반도체 사업은 전세계 경쟁 업체들의 '치킨 게임'(상대가 쓰러질 때까지 출혈경쟁을 벌이는 것)으로 인해 1기가비트 D램 거래가격이 1달러 밑으로 떨어지는 등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
자금난을 겪고 있는 하이닉스는 최근 채권단이 8000억원 규모의 지원을 검토하고 있어 급한 불은 끌 수 있게 됐지만, 반도체 경기는 향후 더욱 악화될 전망이어서 자력 회생 여부가 불투명한 상태다.
하이닉스는 올 들어서만 1조원이 넘는 영업적자를 기록했고 부채는 7조원에 달하는 등 애물단지 ‘공룡’ 매물로 전락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회사 측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LG의 하이닉스 인수설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지 않고 있다.
LG 계열사의 한 임원은 "집 나가 망가진 며느리를 다시 받아들이라는 것이냐"며 인수 가능성을 일축했다.
하지만 증권가의 애널리스트들은 "채권단 등에서 그나마 자금 여력이 있는 LG가 하이닉스를 인수해주기를 종용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전하고 있다. LG가 과거에 계속된 부인에도 불구 결국 LG애드를 되찾아왔다는 사실도 인수 가능성을 배제할 수만은 없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자산가치가 15조원에 달하는 하이닉스 인수에 부담을 느낀 LG가 시간을 끌면서 인수 가격을 낮추려는 것 아니냐는 해석까지 내놓고 있다.
그러나 태양광 사업 등 신성장 동력에 그룹의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는 LG가 실익이 없는 하이닉스를 인수할 가능성은 낮아보인다.
시장의 예상을 깨고 그룹을 연매출 100조원, 영업이익 8조원대의 우량기업으로 성장시킨 구 회장이 하이닉스를 인수한다면 극적인 카드로 회생시킬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세계 기업사를 보면 악조건 속에서 탁월한 경영 감각으로 기업을 성장시킨 사례는 드물지 않다.
구 회장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을지는 예단키 어렵다. 다만 애지중지 아끼던 기업을 내보냈지만, 오히려 결과적으로 그룹에겐 득(得)이 됐고, 이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되찾을 '꽃놀이패' 상황이 됐다는 것은 ‘현대판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경진 기자 shiwall@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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