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정대학교 교수
- (전) YTn 대표이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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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7년 11월 1일 일본에서는 4차 아베 내각이 출범했다. 통화공급 확대, 재정투입, 성장전략 추진이라는 아베노믹스의 3개 화살이 화두가 되던 시점이었다. 이때 아베 내각은 일본 경제가 안고 있던 핵심 문제 중 하나인 저출산·고령화 현상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 ‘생산성 혁명’과 ‘인재 만들기 혁명’ 두 가지를 들고 나왔다. 이를 계기로 일본 사회에서는 생산성 논란이 확산됐다. 당시 일본 경제의 상황을 보면 2013년에서 2016년까지 4년 동안의 잠재 성장률 수준이 1%에 불과했다. 이 기간에 자본의 성장 기여도는 0% 포인트에 그쳤고 노동은 1% 포인트, 총요소생산성은 0.8% 포인트에 머물렀다. 문제는 노동력 부족이 더 심화될 것으로 보여 일본으로서는 성장률 제고를 위한 처방이 생산성 향상이었다는 데 있다. 하지만 2016년 기준으로 일본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41.6달러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치인 47.0달러보다 11.5%나 낮았다. 생산성 수준을 끌어올리는 게 ‘발등의 불’로 떨어졌다. <부자 미국, 가난한 유럽>이라는 책이 나올 정도로 미국과 유럽은 ‘경제 성적표’의 차이가 크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우등생’인 반면 유럽은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되는 성장 부진 블록이다. 미국과 유로 지역은 1995년에만 해도 경제 규모가 비슷했지만 이후 30여 년간 차이가 점점 더 크게 벌어졌다. 미국 경제는 1995년의 두 배 정도 수준으로 커진 데 비해 유로 경제는 1.5배를 조금 넘는 정도에 그쳤다. 이 같은 격차는 어디에 기인한 것일까? 한국은행은 2010~2019년 중 미국과 유로 지역의 성장세 차별화는 생산성과 노동력 차이 등에 따른 것이라고 진단한다. 이 기간에 미국의 성장률이 유로 지역보다 연평균 0.9% 포인트가 높았는데 이 중 절반이 넘는 0.5% 포인트는 생산성, 그리고 0.4% 포인트는 노동 투입의 차이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결국 생산성이 미국과 유로 지역의 성장 격차를 가져온 주요인임을 알 수 있다. 생산성 측면에서 미국은 기술혁신과 고숙련 인재 유치 등으로 우위를 유지해왔다. 반면에 유로 지역은 첨단산업에 대한 정책적 육성 노력이 상대적으로 부진한 데다 연구개발 투자도 미흡하고 이민 인력이 저숙련자 위주여서 낮은 생산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얘기해온 일본의 사례, 그리고 미국과 유로 지역의 비교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바로 경제 성장의 열쇠를 쥐고 있는 변수가 총요소생산성이라는 사실이다. 총요소생산성은 노동생산성보다는 범위가 큰 개념이다. 경제 전반의 총체적 효율성을 뜻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총요소생산성은 어떤 상태에 있을까? 답은 상당히 부정적이다. 한국경제인협회의 전신인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지난해 초에 내놓은 ‘총요소생산성 현황과 경쟁력 비교’ 결과를 보면, 미국의 총요소생산성 수준을 1로 봤을 때 한국은 0.614로 큰 차이를 나타냈다. 미국을 포함해 독일, 프랑스, 영국, 일본의 평균치인 0.856에도 크게 뒤처져 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한국 산업 전반의 총요소생산성이 선진국 중위값 대비 약 67%로 부진하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낮은 수준의 생산성은 국가경쟁력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발표한 2023년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우리나라는 64개국 가운데 28위로 한해 전보다 1단계가 떨어졌다. 국가경쟁력이 약화된 것은 정부 효율성 순위가 2단계 내려간 탓이 크지만 기업효율성 부문에서 생산성의 순위가 하락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2021년에 31위까지 올라갔던 생산성 순위는 지난해에는 41위로 10계단이나 내려앉았다. 총요소생산성을 구성하는 노동생산성에도 ‘빨간 불’이 켜져 있다. 노동연구원의 분석을 보면 2022년 기준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43.1달러로 OECD 회원국 중 28위에 그쳤다. 독일(68.5달러)과 비교하면 62.9% 수준으로 격차가 37%가 넘는다. 한국경제의 총요소생산성에 문제가 생긴 데는 다양한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총요소생산성을 구성하는 요소별로 살펴보면, 경제자유도를 제외하고 사회적 자본, 규제환경, 혁신성, 인적자본 네 가지가 G5 국가 평균 수준을 크게 밑돌고 있다. 이 중 사회구성원에 대한 신뢰 등 사회적 연대를 촉진하는 유무형의 자본을 의미하는 사회적 자본은 가장 낙제점을 받고 있는 부문이다. 2023 레가툼 번영지수 발표 내용을 보면 한국의 사회적 자본 지수는 167개국 중 107위로 하위권을 기록했다. 사회적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신뢰 기반이 취약해진 데 따른 것이다. 실제로 한국 사회 내의 갈등은 위험 수위에 놓여 있다. 갈등 수준이 OECD 국가 중 셋째로 높다. 기업의 발목을 잡는 규제도 생산성을 좀먹고 있다. IMF는 총요소생산성이 저조한 것은 과도한 상품시장 규제 때문이라며 한국의 규제 수준은 OECD 회원국 중 여섯째로 강하다고 지적했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한국의 규제 총괄지수는 1.71로 OECD 평균치 1.40을 크게 웃돌고 있다. 특히 진입장벽이 매우 높은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와 함께 혁신 성과 지수와 인재 경쟁력 지수가 G5 국가를 하회하고 있는 것도 총요소생산성에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생산성에 비상이 걸린 이유를 거시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투자 부진, 주력산업의 성장세 미흡, 생산성이 낮은 서비스 부문으로의 고용 집중, 중소기업의 낮은 경쟁력, 지지부진한 기업구조조정, 인구 고령화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총요소생산성이 성장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한국 경제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특히 향후 한국 경제의 진로를 생산성이 좌우할 것이라는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한은은 ‘한국경제 80년(1970~2050) 및 미래성장전략’ 보고서에서 2010년대 이후의 총요소생산성의 기여도 축소가 성장률 하락의 주된 요인이라며 향후 30년의 경제 성장은 생산성 기여도에 의해 좌우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생산성이 높거나 중간 수준인 시나리오를 전제해도 성장률은 2020년대의 2%대에서 2040년대에는 0.1~0.2% 선으로 하강 곡선을 그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생산성이 낮은 시나리오 아래서는 2040년대 성장률이 마이너스 0.1%로 뒷걸음질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장기적으로 플러스 성장률을 유지할 것이냐의 여부가 생산성에 달려 있는 셈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도 한은의 이 같은 회색빛 전망에 보조를 같이 하고 있다. KDI는 총요소생산성 증가율이 2010년대의 0.7%에서 OECD 상위 25~50% 수준인 1.0%로 올라설 경우 2050년 성장률이 0.5% 내외로 전망되지만, 생산성이 개선되지 않으면 성장률이 0%로 하락해 한국 경제가 ‘제로 성장’의 늪에 빠질 것이라고 우려를 나타냈다. 이처럼 생산성은 한국 경제의 미래를 결정할 핵심 변수로 떠올라 있다. 그런데도 이를 중시하고 생산성 개선에 ‘올인’하는 정책적 노력과 사회적 공감대를 감지하기 어려운 게 솔직한 현실이다. 정부의 경제정책 청사진을 봐도 생산성에 관한 관심은 다른 현안에 밀려 있다. 기업과 가계 등 경제주체들에게도 생산성의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는 거의 형성되지 않은 모습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 한국 경제의 어려움을 풀어갈 과제가 생산성이라는 해답이 주어져 있는데도 이에 대한 ‘큰 그림’이 제시되지 않은 채 적절한 대책이 추진되지 않고 있는 현실은 마이너스 성장으로 가는 길을 재촉할 뿐이다. 물론 총요소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것은 복잡다단하다. 생산성 부진을 가져온 요인인 혁신성과 인적자본, 규제, 사회적 자본에 그 답이 있는데 여기에는 경제적 변수뿐만 아니라 신뢰라는 비경제적 요소도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경제가 ‘잃어버린 미래’에 직면하지 않기 위해서는 아무리 어려워도 제기된 숙제를 해결해나가야 한다. 총요소생산성을 개선하는 것은 사회와 경제 전반을 혁신하는 일이다. 그러기에 정부와 기업, 정치권, 그리고 개별 경제주체들이 각자의 몫을 다해야 한다. 먼저 정부는 생산성 향상을 위한 ‘그랜드 플랜’을 내놓고 신성장 동력 확보와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전환, 인적자본 확충, 규제개혁, 중소기업과 서비스 부문의 경쟁력 강화, 공정한 신뢰 사회 구축 등에 주력해야 한다. 한 마디로 거시경제 운용을 생산성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 기업도 산업현장에서 생산 효율을 올려 노동생산성을 개선하고 연구개발의 성과를 극대화해야 한다. 정치권도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상호 적대시하는 갈등 구조를 해소하고 협치의 ‘텃밭’을 일궈냄으로써 신뢰 등 사회적 자본을 구축하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 개별 경제주체들도 불신 대신 신뢰, 갈등 대신 화합의 씨앗을 뿌려 사회 문화를 일신(一新)해내야 한다. 신뢰가 형성되면 성장률이 높아지고 행복과 복지에 기여한다는 게 지배적인 분석이다. 지금까지 한국 경제는 자본과 노동의 양적 투입을 늘린 성장에 기대왔다. 더 이상 이런 성장은 가능하지 않다. 총요소생산성을 올리는 질적 성장이 시대적 과제로 주어졌다. 이는 경제는 물론 사회 전반을 환골탈태(換骨奪胎)시키는 구조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힘을 합해 잘 대응해낼 것인가의 여부에 따라 한국 경제의 미래 궤도가 정해질 것이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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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경영의 핵심 축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올해는 그 제도화가 더욱 가속화되는 시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2026년 시행’이 확정된 EU(유럽연합)의 탄소국경조정제도는 이미 ‘전환 기간’이 시작돼 기업들이 분기마다 탄소 배출량을 보고하는 절차가 가동되고 있다. ESG 공시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지난해 발표된 ISSB(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의 일반 요구사항 및 기후 공시 기준과 EU의 CSRD(지속가능성보고지침)는 사실상 시행에 들어갔다. 올 상반기 중에는 미국의 SEC(증권거래위원회)도 그동안 준비해온 기후 공시안을 확정해 발표할 예정이다. 또 지난해 발표된 생물다양성 공시기준인 TNFD를 채택하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유엔 플라스틱 협약 성안을 위한 제5차 정부 간 협상위원회가 오는 11월에 부산에서 열릴 예정이다. 또 친환경 경영이나 상품인 것처럼 꾸미는 그린워싱을 규제하기 위한 제도가 국내외에서 강화되고 있다. 이 같은 제도 마련에 따라 기업들은 글로벌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서는 ESG 경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그러다 보니 관련 제도들이 요구하는 사항에 대비하는 데 분주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문제는 제도 대응에 과몰입하다가 정작 ESG 경영을 왜 하려고 했는지 그 본질적인 뜻을 잊을 수 있다는 데 있다. ESG는 환경을 보존하고 사람(이해관계자)을 돌보는 투명하고 윤리적인 경영을 기업 전반에 내재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는 비즈니스 모델 자체를 본질적으로 전환하는 경영혁신을 통해 기업가치를 제고하는 과정이다. 자칫 제도만을 보다가 ‘ESG를 위한 ESG’를 하는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사업 자체를 ESG를 중심으로 환골탈태(換骨奪胎)시키는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이런 점에서 국내 기업들은 ESG 경영혁신을 모범적으로 이뤄낸 글로벌 초일류 기업들을 역할모델로 삼아볼 필요가 있다. 가보지 않은 길인 만큼 이를 성공적으로 실현한 기업들에서 배워야 한다. 필자는 ESG 등급평가 기관인 MSCI에서 최상위 등급(AAA 또는 AA)을 받은 7개 글로벌 초일류 기업을 그 대상으로 선정했다. 오스테드, 네스테, 마이크로소프트, 유니레버, 코카콜라, 베스트 바이, 소프트뱅크 그룹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이 중 덴마크의 에너지 기업인 오스테드는 당초 30년으로 잡았던 목표 기간을 20년이나 앞당겨 불과 10년 만에 이산화탄소를 대량 방출하는 화석연료 기업에서 연안 풍력 발전 위주의 친환경 재생에너지 기업으로 변신하는 성과를 거뒀다. 핀란드의 정유 기업인 네스테는 설립 이후 60년 동안 원유 사업에만 전념해오다가 이 사업이 지속 가능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제품 자체를 바이오 디젤 등 재생연료로 대전환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기후변화의 원인인 탄소 배출을 줄이는 데 ‘진심(眞心)’인 기업이다. 2030년까지 탄소를 배출한 양보다 더 흡수하는 ‘탄소 네거티브’를 달성하고 회사가 창립된 1975년 이후 내보낸 탄소량을 2050년까지 모두 없애겠다는 담대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웬만한 정부보다 더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고 있다. 또 세계 최대 소비재 기업 중 하나인 영국의 유니레버는 ‘유니레버 지속 가능 생활계획(USLP)’이라는 10년 청사진을 만든 다음 10억명 이상의 건강과 복지 개선, 환경에 대한 영향 절반 감축, 수백만 명의 삶 향상, 이 세 가지 목표를 내걸었다. 10년을 내다본 장기 전략의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경영 실적도 호전됐다. 글로벌 음료기업인 코가콜라의 경우 ESG 핵심 이슈는 물과 플라스틱이다. 이 기업은 2030년까지 물 사용량을 2015년에 대비해 20% 줄이고, ‘폐기물 없는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2025년까지 포장재 100%를 재활용하는 방안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 이와 함께 미국의 대형 유통업체인 베스트 바이는 S(사회) 경영에서 다양성과 포용성이 돋보이는 ‘다정한 기업’으로 꼽히고 있다. 성별, 인종 등을 기준으로 한 차별을 없애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인권 존중 원칙을 직원은 물론 협력업체, 소비자, 지역사회에 확대 적용하고 있다. 일본의 소프트뱅크 그룹은 이동통신과 투자가 주요 사업인 만큼 이를 중심으로 ESG 경영을 차별화하고 있다. 이동통신사인 소프트뱅크는 이미 2021년에 탄소중립을 달성했으며 소프트뱅크 그룹과 자회사인 Arm과 Z홀딩스는 그 시한을 상당히 이른 2030년으로 잡고 있다. IT 기업이라는 특성을 반영해 인공지능 윤리도 시행하고 있다. 이들 7개 글로벌 초일류 기업은 ESG 경영혁신 과정에서 몇 가지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점은 진정성에 바탕을 둔 비전과 혁신의 리더십이다. 오스테드와 네스테는 내·외부의 반발이나 경영 위기 등 어려움이 적지 않았지만 이를 리더십으로 돌파해냈다. 오스테드는 당시의 일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기술적 또는 재무적으로 보이는 문제도 본질적으로는 리더십에 대한 도전이었다. 우리는 보다 지속 가능한 비즈니스 모델로의 변화를 가속화하는 과제를 리더십으로 풀어왔다.” 네스테도 마찬가지이다. 주력 상품을 친환경 연료로 바꾸는 7개년 계획을 경영진이 앞장서 뚜벅뚜벅 밀어붙임으로써 명실상부하게 재생에너지 기업이라는 간판을 달 수 있게 됐다. 베스트 바이가 성별 간, 인종 간 균형을 이룬 선두권 기업으로 부상한 것도 CEO가 이 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꾸준히 관련 정책을 집행한 데 따른 것이다. 다음으로 ESG 경영 모범 기업들은 기후변화의 심각성에 공감하고 탄소 배출을 줄이는 데 매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들 중 대부분 기업의 탄소중립 시한이 많은 나라의 정부가 선택한 2050년보다 훨씬 빠르다. 소프트뱅크 그룹은 2030년, 유니레버는 2039년, 오스테드와 베스트 바이는 2040년을 각각 그 시점으로 잡았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마이크로소프트는 한발 더 나아가 2030년까지 아예 탄소 배출 총량을 줄인 ‘탄소 네거티브’를 이루겠다는 깃발을 올렸다. 네스테는 2040년까지 자사는 물론 협력업체까지 범위를 넓혀 탄소중립을 실현하겠다고 나섰다. 이러니 남들과 비슷한 2050년을 목표 시점으로 밝힌 코카콜라의 속도가 느려 보일 정도이다. 이해관계자를 존중하고 경영에 참여시키는 것도 이들 모범 기업이 보인 특징이다. 오스테드는 고객, 직원, 지역사회 등 이해관계자와 활발하게 소통해 회사의 지속 가능 과제를 발굴한 다음 이를 전략으로 채택해 경영 성과로 연결시키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사회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네스테와 코카콜라도 회사의 ESG 중대 이슈를 정하는 데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유니레버는 협력 농장과 대화를 통해 환경을 훼손하지 않는 방식으로 차를 재배하고 협력업체들과 ‘목적이 있는 유니레버 파트너(UPwP)’를 결성해 공급망 관리를 위한 지배구조를 구축해 놓고 있다. 이들 기업은 이해관계자를 경영의 중요한 파트너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들 기업은 또 협력업체의 변화 없이는 성공적인 ESG 경영혁신이 어렵다고 보고 이들의 동참을 강하게 유도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탄소 배출 감축에 대한 요구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협력업체들에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55% 줄이고 배출량을 공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베스트 바이도 2030년까지 가치사슬 전반의 배출량인 ‘스코프 3’를 20% 축소하기로 했으며, 오스테드는 1차 협력업체 등이 2025년까지 에너지 소비를 100% 재생에너지로 충당하도록 압박하고 있다. 2039년까지 넷 제로를 이루기로 한 유니레버도 이 목표에 가치사슬을 포함시켰다. 협력업체에 대한 요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있다. 인권을 비롯해 안전, 생물다양성 등 이슈도 이들이 준수하도록 하고 있다. 오스테드는 가치사슬에서 인권을 존중하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으며 협력업체에 대해 인권 실사를 실시하고 있다. 네스테는 공급망 실사 시 1차는 물론 2차 협력업체까지 대상을 확대하고 있다. 유니레버는 삼림을 파괴하지 않고 차, 콩 등 핵심 제품을 재배하는 공급망을 구축하려 하고 있다. 코카콜라도 12개 핵심 원료를 공급하는 업체들이 인권과 물 관리 등에 관한 기준을 정해 놓은 ‘지속 가능 영농 원칙’을 지키도록 하고 있다. 결국 이들 기업은 ESG 경영혁신의 완성을 위해 자사와 협력업체가 ‘한 몸’처럼 움직이는 체제를 만들려 하고 있다. 국내 기업으로서는 글로벌 초일류 기업의 ESG 경영 수준 자체가 부담스러울 수 있다. 아직은 적응 단계여서 ESG 성적표인 등급을 잘 받고 지속가능경영 보고서를 제대로 작성하며 탄소 배출 데이터를 집계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등 형식을 갖추는 일만 해도 벅찰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잊지 않아야 할 점은 ESG 경영을 하는 목적은 혁신을 통해 기업의 체질을 바꿔 가치를 제고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마이크로소프트의 지속가능 담담임원인 멜라니 니타가와는 “지구와 사람을 위한 지속가능 경영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성공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제 ESG를 외면한 기업의 성공은 불가능한 시대가 됐다. ESG 주도 혁신을 이뤄낸 모범 기업들의 흔들림 없는 철학과 실행에서 ‘한 수’ 배워야 한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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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설팅 기업인 맥킨지코리아는 최근 한국 경제의 향후 진로에 대해 심층 분석한 ‘한국의 다음 S커브(Korea’s next S-curve)’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펴냈다. 2013년에 한국 경제를 ‘서서히 가열되는 냄비 속 개구리’에 비유한 보고서를 발간한 이래 10년 만이다. 이번 보고서의 문제의식은 심각하다. 한국 경제가 지속적으로 하강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도약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다는 게 맥킨지의 경고이다. 한국 경제는 1960~1980년대에는 중화학공업 중심의 수출 주도형 경제구조로 제1의 성장 S커브를, 그리고 1980~2000년대에는 첨단 제조업을 선두에 내세워 제2의 성장 S커브를 그렸다. 지금은 다음 성장곡선을 펼칠 때이지만 낮은 생산성과 기둥 산업의 경쟁 심화, 그리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생산성 격차 등으로 경제에 먹구름이 끼어 있다는 진단이다. 맥킨지는 한국 경제가 제3의 성장 S커브에 올라타기 위해서는 개편, 전환, 구축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여기에서 개편은 산업구조와 비즈니스 모델 개편을, 전환은 고부가가치 포트폴리오로의 전환과 원천기술 기반의 신사업 창출 등을, 그리고 구축은 규제 점검을 통한 산업 혁신 기반 구축 등을 의미한다. 맥킨지의 처방은 한마디로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산업정책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산업구조를 바꾸고 신성장동력을 확보하고 규제 혁파를 해가는 등의 대응은 그 자체가 바로 산업정책의 틀 내에서 이뤄져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 글로벌 무대에서는 정부의 귀환과 이에 따른 산업정책의 부활이 중요한 화두로 부상해 있다. 2008년의 금융 위기로 시장의 힘에 기반을 둔 신자유주의가 퇴조한 상황에서 코로나 사태, 미·중 패권 경쟁, 공급망 위기, 기후변화 등 여러 변수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자 미국과 EU(유럽연합) 등은 공격적인 산업정책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김계환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공저 ‘2024 한국 경제 대전망’에서 글로벌 공급망 재편을 둘러싼 강대국 간 산업정책 경쟁은 세계 산업지도를 다시 그리는 산업 군비경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평가하고 있다. 글로벌 경제의 선두권으로 치고 나가기 위한 한판 승부를 각국 정부가 주도하고 있다는 얘기다. 가장 큰 변화는 미국에서 일어났다. 최근 수십 년 동안 미국에서는 산업정책이란 말은 기피 대상이었다. 워낙 시장의 역할을 중시하는 분위기로 인해 국방 외의 다른 산업에 개입하는 데 미 정부는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중국이 국가 주도의 경제 모델로 미국과의 격차를 좁혀오고 코로나 확산 등 위기 상황이 가시화되자 미 정부는 산업 육성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대표적인 사례가 2022년 중반에 발효한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반도체 과학법이다. IRA의 경우 모두 7730억 달러의 예산을 기후변화 대응, 친환경 에너지산업 육성, 청정연료를 사용하는 자동차산업 지원 등에 투입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 중 4330억 달러는 풍력터빈과 태양광 패널, 배터리 등 에너지 생산·저장 시설의 제조 지원과 신규 및 중고 친환경 차 판매의 진작 등에 쓰이고 있다. 또 반도체 과학법은 반도체를 비롯한 핵심 미래 기술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2800억 달러를 투자하는 것 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장군멍군식으로 산업정책의 깃발을 들기는 EU도 마찬가지. EU는 그린 딜 산업계획을 내세우고 나왔다. 이 계획은 규제 간소화, 자금 조달 촉진, 기술 역량 강화, 공급망 다변화 등을 통해 청정기술 산업을 육성하는 게 핵심 내용이다. 특히 탄소중립산업법을 제정해 친환경 산업에 대한 규제를 줄이고 기술 개발을 지원함으로써 EU 역내 생산을 확대하는 것을 겨냥하고 있다. 핵심 원자재법을 만들어 제3국에 대한 공급망 의존도를 줄이면서 원자재 공급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데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 EU는 이와 함께 반도체 부족을 해소하고 기술 리더십을 강화하기 위해 430억 유로 규모의 자금을 투자하는 내용의 EU 반도체법도 마련했다. 미국의 반도체 과학법에 대한 맞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과 EU가 이렇듯 산업정책 강화 쪽으로 급선회한 이유 중의 하나는 앞서 언급했듯이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앞세운 중국의 도전에 맞서기 위한 것이다. 사실 사회주의 체제인 중국은 산업의 육성 자체가 국가 주도로 이뤄진다. 대표적 정책이 제조 강국으로의 도약을 선언한 ‘중국 제조 2025’이다. 이 계획은 전 세계 제조업 강국 중 선두권 지위를 확보한다는 청사진 아래 차세대 IT 기술, 항공우주장비, 로봇, 바이오·의약 등 10대 분야에 중점을 두고 있다. 경제의 핵심 경쟁력을 좌우하는 제조업에서 선두로 치고 나가겠다는 중국의 공세는 미국과 EU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결국 세계 3대 경제권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중국, EU가 ‘산업정책 대전(大戰)’을 본격화했다. 그렇다면 ‘전가의 보도(寶刀)’처럼 떠오른 산업정책은 의도한 만큼의 효과를 가져올까? 실패한 적도 있지만 성공한 경우가 더 많다는 평가이다. 산업정책이 맥을 못 춘 대상은 중국 정부가 보잉과 에어버스의 과점에 도전하기 위해 자체 상업용 항공기 제작에 나선 프로젝트이다. 이 사업은 기술적 문제와 공급망 애로에 직면해 큰 차질이 빚어졌다. 하지만 코로나 백신이 이른 시간에 미국 정부 주도로 개발된 게 산업정책이 성공한 대표적 사례이다. 미 정부는 민간 제약사가 감당하기 힘든 재무적 리스크를 대신 떠안아줌으로써 백신 개발의 길을 열어주었다. 유럽의 항공기 제작 회사인 에어버스도 산업정책이 주효한 사례이다. 1960년대 후반 유럽은 보잉이 독점한 항공기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도전장을 내밀었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고 항공기 개발에 따른 자금 조달 등을 도와준 데 따른 것이었다. 에어버스는 현재 보잉과 함께 항공기 시장에서 쌍두마차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 경제는 산업정책이 다른 나라보다 더 친숙한 축에 들어간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경제성장 과정 자체가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 등을 통해 정부 주도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경제·인문사회연구원은 과거의 산업정책을 ‘1.0’과 ‘2.0’으로 구분하고 있다. 먼저 산업정책 1.0은 공업발전법의 틀 아래 개별 산업의 업종별 혁신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외환위기 이전까지 시행됐다. 이에 비해 산업정책 2.0은 외환위기 이후에 본격화했는데 특정 업종을 돕기보다는 산업발전법 체제에서 산업발전의 기초가 되는 기술, 투자, 인력, 금융 등을 지원하는 것을 골격으로 하고 있다. 현재 한국 산업정책의 현주소는 어디에 있을까? 그동안 정부는 이런저런 산업정책을 발표해왔다. 문재인 정부의 제조업 르네상스 비전 및 전략과 한국판 뉴딜 종합계획, 그리고 윤석열 정부의 신성장 4.0 전략과 국가첨단산업 육성 정책, 그리고 최근 발표된 ‘세계 최대·최고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조성 방안’ 등이 그 예이다. 하지만 이들 정책이 산업 구조조정의 부진과 신성장 동력 부재, 그리고 기업 경쟁력 약화 같은 구조적 문제를 풀어나갈 창의적인 산업정책 3.0의 마스터플랜을 제시하는 수준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현재 우리 경제는 저성장 기조의 고착화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주력 산업의 개편과 새로운 산업의 육성이 제대로 길을 찾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산업구조의 본질적인 전환을 가속화할 신산업정책이 긴요하다. 더구나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산업정책 경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때이다. 그런 만큼 큰 시각에서 발상의 대전환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방향성에 대해 재점검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추격형 사고에서 벗어나 가보지 않은 길을 개척해가는 선도자로서의 산업정책을 구사해야 한다. 이정동 서울대 교수 등이 공저한 ‘그랜드 퀘스트’에서 제시한 차세대 배터리, 초미세·초저전력 반도체 등 미래 산업의 승부처는 정부가 정보의 우위에 설 수 없는 만큼 민간이 이를 주도하게 하되 정부는 민관 공조 체제를 통해 옆에서 이를 측면 지원하는 ‘넛지 전략’을 써야 한다. 그러면서도 리스크가 큰 기술 개발은 정부가 초기 연구를 수행해 그 성과를 민간기업에 공유하는 기업가형 정부의 역할도 수행해야 한다. 인터넷 등 다수의 정보통신기술이 위험을 감수한 미국 정부의 과감한 투자가 가져온 결과라는 점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정책 거버넌스도 손질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국공학한림원은 ‘담대한 전환’에서 디지털 전환 시대의 산업정책을 이끌 새로운 법제가 필요하다며 산업발전법의 전면 개정을 주문하고 있다. 한림원은 특히 정부 조직의 불투명한 역할 분담 탓에 산업구조 개편이 추진력을 갖기 어려운 현실이라며 산업혁신의 관점에서 산업부와 중기부, 과기정통부의 통합을 제안하고 있다. 이 정도로 획기적인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경제·인문사회연구원 또한 산업별 담당 부서가 산재해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며 정부 내 산업혁신정책의 협업체계 구축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 백악관 내에 설치된 총괄 조정기구처럼 컨트롤타워를 두거나 영국처럼 정책 간 중복이 심하거나 융합이 필요한 분야에 대해서는 공동 장차관 임명과 고위 공무원단의 겸직 등 부처 간 칸막이를 낮추기 위한 융합적 인사제도가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 경제는 성장동력을 복원하고 혁신적인 ‘퍼스트 무버 산업’을 창출해내야 하는 절박한 과제를 안고 있다. 맥킨지가 얘기한 것처럼 끓는 냄비 밖으로 개구리를 꺼내기 위해서는 과감한 시도와 변화가 있어야 한다. 제3의 성장 커브를 펼칠 ‘산업정책 3.0’의 비전을 제시하는 정부의 치열한 고민과 혜안, 그리고 과감한 실행이 필요한 시점이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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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소 흐트러졌다. 일사천리로 기업 경영의 새로운 틀로 자리 잡는 듯하더니 역풍이 생겼다. 주로 미국 쪽에서다. 석유기업 등을 자금줄로 삼고 있는 공화당이 민주당 정부의 ESG 확산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있다. 공화당의 표적이 된 ESG 전도사 래리 핑크 블랙록 회장은 ESG란 용어가 너무 정치화됐다며 이 말을 그만 사용하겠다고 선언했다. ESG 주창자 중 한 명인 린 포로스테 드 로스차일드 로스차일드홀딩스 회장은 심지어 “ESG란 말을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고까지 얘기했다. ESG가 지나치게 정치화돼 새로운 용어로 대체해야 한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학계에서는 이런 주장도 나왔다. ‘ESG 파이코노믹스’ 저자인 알렉스 에드먼스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는 연초에 ‘ESG의 종언’이란 논문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에드먼스 교수는 “ESG는 매주 중요하지만 특별하게 다룰 필요는 없다”고 언급했다. ESG가 기업에 장기적 수익을 가져다주는 기업문화나 혁신 역량 같은 다른 무형 자산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ESG는 한때 유행에 불과한 것일까? 단도직입적으로 답을 얘기하면 ‘아니다’이다. ESG란 말을 쓰지 말자고 하는 주장은 정치 공방을 우회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라 할 수 있다. ‘총론의 언어’는 쓰지 않되 기후변화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등 ESG가 포괄하고 있는 이슈는 포기하지 않으려는 뜻이 담겨 있다. 학문적으로도 기업 경영에 있어서 ESG의 중요성은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EU(유럽연합)를 중심으로 글로벌 무대에서 ESG 기류는 여전히 건재하다. JTC가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투자자와 투자자문사, 펀드매니저 중 4분의 3이 투자 전략 수립 시 ESG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PwC 조사에서도 ESG는 투자자의 상위 5위 관심사에 포함돼 있다. 기업 경영진의 분위기도 비슷하다. 회계법인인 EY가 21개국 CFO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들은 ESG를 최우선 경영 사안으로 꼽았다. 대한상의가 국내 300개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대부분 기업은 ESG 경영이 지난해와 비슷하거나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응답했다. ESG에 대한 소비자와 근로자들의 지지도 높은 상태다. USC와 웨버 셴드윅은 소비자와 근로자 10명 중 7명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동의하고 있다고 했다. 세대별로 보면 젊은 층인 MZ세대가 제품 구매(74%)와 취업(80%) 시 기업의 ESG 등급을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음은 조금 있지만 새로운 경영의 틀로 뿌리를 내려가고 있는 ESG. 한국 기업의 현재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형식적인 면에서 모양새를 갖춰가고 있지만 본질적인 면에서는 갈 길이 먼 지점에 서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먼저 전체 성적표를 들여다보자.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18개국 52만여 기업을 대상으로 ESG 점수를 분석한 결과 한국 기업의 ESG 점수는 11.50점으로 글로벌 평균치인 20.66점을 크게 밑돌고 있다. 부문별로 보면 지배구조(G)가 전체 평균치 대비 44.5%(13.28점)에 불과해 가장 저조했고, 다음으로 환경(E)이 51.2%(6.47점), 사회(S)가 67.5%(13.28점)로 집계됐다. 세계 수준과 큰 격차가 있다. 실제로 한국 기업들의 ESG 등급은 부진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한국ESG기준원이 공표한 2023년 등급을 보면 가장 높은 S등급을 받은 기업은 하나도 없다. A+ 기업도 전체 중 2.4%인 19개에 그쳤다. ‘불합격’이라고 볼 수 있는 B·C·D등급은 전체 상장사 791개 중 459개로 60%에 달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자.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겠지만, 규모가 큰 기업일수록 ESG 경영의 형식을 갖춰가고 있는 반면 규모가 작은 기업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황이 드러난다. 통상 ESG 경영을 얘기할 때 우선적으로 점검해보는 것은 ESG위원회 설치와 지속가능경영보고서 발간 여부다. 먼저 ESG위원회는 유가증권시장 상장사 중 대기업집단은 63% 넘는 기업이 이를 두고 있는 반면 기업집단에 들어가지 않은 기업의 설치 비율은 6.95%에 불과하다. ESG보고서로 불리는 지속가능경영보고서도 상황은 같다. 자산 규모가 2조원 넘는 유가증권시장 상장사의 보고서 발간 비율은 66%인 데 비해 유가증권시장과 코스닥시장 상장사 전체 평균 비율은 9%에 머물고 있다. 자산 규모가 작을수록 보고서 발간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산이 5000억원에 못 미치는 상장사는 발간 비율이 1%에 불과하다. 기업 규모와 관계없이 전반적으로 성과가 좋지 않은 사안들도 있다. 대표적인 항목이 탄소중립 목표 수립. 전체 상장사 중 13.6%인 126개만 이 목표를 세운 상태다. 다양성과 포용성으로 불리는 남녀평등 이슈도 명함을 내밀기 어려운 수준이다. 자산 규모 2조원 이상인 상장사 중 여성 사외이사를 최소한 한 명이라도 둔 비율은 2018년 10.6%에서 2021년 3분기 현재 51.5%로 크게 올라 문제가 상당 부분 개선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는 좀 다르다. 전체 사외이사 중 여성 비율이 7.4%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시아 국가 중 최하위권이다. 최근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생물다양성에 대한 대응은 어떨까? 관심을 가지고 대응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접근 방식이 외국 기업과 큰 차이를 보인다는 데 있다. 해외 기업들은 생물다양성 손실을 복원하는 방안을 경영 전략 안에 포함해 추진하는 특징을 보인다. 자연이 훼손된 것보다 더 많이 회복시키겠다는 ‘네이처 포지티브’에 시동을 건 세일즈포스나 삼림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제품을 생산하겠다고 선언한 제지업체 인터내셔널 페이퍼가 대표적인 예다. 이에 비해 한국 기업들은 아직은 전략적 고려 없이 나무 심기나 천연기념물 보호 등 사회적 책임 활동 일환으로 생물다양성 이슈를 다루는 모습이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ESG 중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에 대해 엇갈리는 의견이다. 기업은 환경을 가장 중시하고 있다. 그러나 ESG 평가기관들은 지배구조에 가장 큰 가중치를 부여하고 있다. 평가기관이 상대적으로 더 객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면 기업으로서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사안인 지배구조 문제를 다루는 데 소극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렇다 보니 ESG를 규제로 보는 시각이 한국 기업에 지배적이다. 실제로 탄소 배출량 공표를 뜻하는 기후공시, 탄소 배출에 대해 관세 수준으로 재무적 부담을 지우는 탄소국경조정세, 공급망에 대한 환경·인권 실사 등 관련 규제가 잇따르고 있는 게 현실이다. ESG북 집계에 따르면 ESG에 대한 정책적 개입 건수는 2001~2010년 473개에서 2011년 이후에는 1255개로 크게 늘어났다. 중요한 점은 ESG를 규제로만 간주하고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으로 보면 ‘고개 숙여 땅만 바라보다가 별을 놓치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이 부분이 외국 기업과 한국 기업이 크게 차이를 보이는 대목이다. KPMG가 최근 펴낸 ‘2023 CEO 전망’을 보면 미국 경영진 중 74%는 ESG를 가치를 창출하는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다. 5년 안에 ESG 투자로 상당한 수익을 얻을 것으로 전망하는 CEO 비율은 82%에 달하고 있다. 이들 미국 CEO는 ESG가 재무적 성과는 물론 고객과의 관계, 브랜드, 평판, 인재 확보 등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응답했다. 딜리전트 연구소와 스페넛스튜어트가 글로벌 기업의 이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ESG를 기회로 본 기업 비율이 75%에 달했다. ESG는 경영과 가치사슬 전반에 걸쳐 환경을 보호하고 사람을 돌보는 투명하고 윤리적인 경영을 내재화해서 기업의 중장기 가치를 제고하는 데 본질적 목적이 있다. 기업가치를 키우는 게 ESG 경영을 해나가면서 바라보고 가야 할 ‘별’이라는 얘기다. 이런 점에서 많은 해외 기업들은 ESG 본연의 목표를 제대로 지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네스테와 유니레버가 대표적 ‘역할 모델’ 기업이다. 핀란드 기업인 네스테는 2009년 기존 정유사업으로는 생존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 비즈니스 모델을 정반대인 재생에너지 쪽으로 전환하기로 결단했다.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고 투자자와 직원, 소비자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지만 마침내 세계 최대 재생연료 생산기업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영국 생활용품 기업인 유니레버도 10억명 이상 건강과 복지 개선, 환경에 대한 부정적 영향 절반 감축 등 야심 찬 계획을 담은 ‘유니레버 지속가능생활계획(USLP)’을 10년 동안 추진해 목표도 달성하고 뛰어난 경영 성과를 올렸다. 두 기업 모두 ESG 경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기업가치를 크게 높인 사례다. 한국 기업들이 ESG를 주로 규제로 체감하는 것은 역사가 짧아 이런 성공 경험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수록 멀리 내다보며 ‘별’을 바라보는 시선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ESG가 당장은 입에 쓸지 모르지만 결국은 기업 체질을 질적으로 개선해 가치를 키우는 ‘양약(良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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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크 재팬’에 이어 ‘피크 차이나’가 자주 언급되고 있다. 이 말에는 일본과 중국 경제가 이미 정점에 이르렀고 내리막길만 남았다는 잿빛 전망이 담겨 있다. 문제는 ‘피크’란 반갑지 않은 단어가 ‘코리아’에도 붙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피크 코리아’. 한국 경제도 올라올 만큼 올라왔고 이젠 하강(下降)의 길로 들어서는 게 아니냐는 우려다. 무엇보다 한국 경제 성적표가 부진하다. 올해 우리 경제 성장률은 정부 전망치인 1.4% 달성도 힘겨울 전망이다. 내년이 관건인데 정부는 2.4%로 보고 있지만 골드만삭스 등 8개 외국계 투자은행의 전망치 평균(7월 말 기준)은 1.9%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중장기 한국 경제의 진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는 한국 경제가 2025년에 1%대 성장을 보인 데 이어 2030년에는 0% 성장, 그리고 2047년부터는 마이너스 성장의 늪에 빠질 수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KDI(한국개발연구원)도 생산성 개선이 없다면 2023~2027년에 2% 수준인 잠재성장률이 2050년에는 0%까지 꺾일 수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동안 성장의 엔진이었던 노동력 증가, 자본 축적 그리고 기술 수준 향상 모두에 빨간불이 켜진 게 주요인이다. 이런 상황이니 한국 경제의 글로벌 위상이 좋을 수가 없다. 국내총생산(GDP)을 기준으로 한 경제 규모가 지난해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10위에서 13위로 세 단계나 내려앉았다. 문제는 앞으로다. 골드만삭스가 2050년과 2075년 세계 경제 판도를 예측한 것을 보면 상위권에 한국 경제가 보이지 않는다. 이 투자은행은 경제 규모 15위까지 국가를 점쳤는데 한국은 아예 명함을 내밀지 못하고 있다. 미국, 중국, 일본, 독일, 프랑스, 인도 등 전통적 경제 강국은 랭킹 등락이 있지만 15위권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 등을 밀어내고 상위권으로 진입할 것으로 보이는 신흥 강국은 인도네시아, 나이지리아, 이집트 등이다. 이 같은 전망은 ‘피크 코리아’ 시나리오가 실제로 가시화할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성장률을 회복하느냐 아니면 초(超) 저성장 기조로 쇠락하느냐 하는 갈림길에 선 한국 경제. ‘피크 코리아’를 피하려면 어떤 노력을 해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깊은 고민과 함께 미래를 내다보는 실행이 긴요한 때다. 이와 관련해 다른 나라 경제 상황을 살펴보고 교훈을 얻는 것도 바람직한 실마리를 찾아내는 좋은 방법일 수 있다. 어떤 나라는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될 수도 있고, 다른 나라는 역할 모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 나라를 심층 분석한 도서와 글을 중심으로 두 가지 상반된 예를 짚어봄으로써 한국 경제가 나아갈 길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먼저 반면교사 사례는 중국과 일본. 중국 경제를 들여다보자. 중국은 코로나19 종료 이후 리오프닝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맥을 못 추고 있다. IMF(국제통화기금)는 경제성장률이 올해 5%에 이어 내년에는 4%로 하락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단순한 경기 부진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 때문에 중국 경제가 ‘피크 차이나’라는 한계에 직면했다는 진단이 잇따라 제기되고 있다. 캐피털 이코노믹스는 아예 중국이 세계 1위 자리에는 오르지 못할 것이며 2035년에 미국 경제 대비 90% 선에서 정점을 찍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중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걸림돌은 인구 감소와 생산성 하락, 그리고 부채와 부동산 시장 냉각 등이다. 중국 인구는 지난해 최대치에 달했는데 금세기 중반에는 생산가능인구가 25% 이상 줄어들 것으로 유엔은 내다보고 있다. 생산성 하락도 심각하다. 2008년부터 2019년 사이에 총 요소생산성이 연평균 1.3%씩 하락했다. 더 이코노미스트지는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수익률이 둔화하고 지정학적 긴장으로 외국 기업들이 탈중국 러시를 이루며 미국이 핵심 기술을 규제하고 있는 게 주 원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또 마이클 베클리 터프츠대학 교수 등은 저서 ‘중국은 어떻게 실패하는가’에서 “초세계화 시대가 끝나가면서 중국이 과거에 누렸던 해외시장, 기술, 자본 등에 접근할 기회를 잃어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일본은 어떤가. 최근 경제가 일부 호전되고 있지만 아직 ‘잃어버린 30년’의 수렁에서 빠져나왔다고 속단할 수는 없다. 일본 경제가 그동안 고전했던 이유는 부동산 버블 붕괴와 정책적 오류, 그리고 이에 따른 디플레이션 때문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병인(病因)은 다른 데 있다는 지적도 있다. 노구치 유키오 히토쓰바시대 교수는 ‘일본이 선진국에서 탈락하는 날’에서 정보산업 같은 ‘고도의 성장 견인형’ 서비스산업이 발전하지 못한 것을 주요인으로 언급하고 있다. 새로운 산업구조 전환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낮은 생산성도 일본이 장기 침체를 겪어온 원인 중 하나다. 1997~2007년 연평균 총 요소생산성 증가율은 0.5%에 불과해 선진국 평균치인 2%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반면교사의 나라인 중국과 일본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두 나라가 공통으로 던져주고 있는 이슈는 생산성의 중요성이다. 우리 경제도 생산성은 ‘낙제’ 수준이다. 한국경제인협회가 각국을 비교한 결과를 보면 한국의 총요소 생산성은 미국 대비 61.4% 수준에 머물고 독일, 프랑스, 영국 등을 크게 밑돌고 있다. 실제로 생산성의 성장 기여도는 -4%로 그만큼 경제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 결국 규제 개혁과 교육 및 기술 훈련 강화, 자본과 기술 축적, 진입과 퇴출장벽 완화 등을 통해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게 긴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중국의 경험을 통해 인구 감소의 심각성도 절감하게 된다. 우리는 중국보다 상황이 더 나쁘다. 지난 2분기 합계출산율은 사상 최저 수준인 0.7명을 기록했다. 장기적으로 경제는 물론 국가 소멸 여부를 걱정할 지경이 됐다. 그렇기에 인구 문제 해결은 정책의 최우선순위를 두고 전방위로 노력을 기울일 사안이 됐다. 인구가 줄어들면 나라도 경제도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일본 사례에서 한 가지 더 주시해봐야 할 것은 산업구조를 빠르게 전환할 필요성이다. 한국 경제는 반도체와 동행할 신성장산업을 발굴하고 기술 ‘퍼스트 무버’로서 입지를 다지는 민관의 공동노력이 적극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또 생산성이 뒤처지는 서비스산업을 고부가가치화하는 방안이 병행돼야 한다. 다음은 역할 모델로 삼을 수 있는 미국 경제를 살펴보자. 미국 경제는 지난 30년 동안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순항을 해왔다.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은 유럽보다 30%, 일본보다 54% 많다. 강한 미국 경제의 힘은 어디에서 오고 있을까. 더 이코노미스트지는 미국 경제에 대한 심층 분석 기사에서 노동력 증가와 생산성 향상을 들고 있다. 실제로 생산가능인구는 1990년 1억2700만명에서 지난해에는 1억7500만명으로 38%나 늘어났다. 그런대로 괜찮은 출산율과 이민자 증가 덕분이다. 노동생산성도 같은 기간 62%나 개선돼 유럽(55%)과 일본(51%)을 앞질렀다. 정보통신산업의 혁신과 근로자들의 높은 숙련도, 대규모 연구개발 투자 등이 생산성 증가를 주도했다. 경제의 역동성, 세계 최고 수준의 금융시장, 활발한 창업과 낮은 실패 비용, 수준 높은 기업 경영도 빼놓을 수 없는 장점으로 지적된다. ‘미국 경제에서 배우자!’ 한국 경제가 현재의 어려움을 헤쳐나가기 위해 유념해야 할 대목이다. 특히 선진국 중에서 가장 ‘젊은 국민’을 가능하게 해주는 이민 문호의 개방성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도 인구 감소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해외 인력 유입에 전향적 자세를 가져야 한다. 외국 생산인력은 물론 고급인력 확보를 위해 생각의 틀을 깨는 제도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 한국 경제의 재도약을 위해서는 지금까지 얘기해온 경제적 변수 외에 ‘정신’도 중요하다. 싱가포르의 경제 개발 과정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싱가포르는 1965년 말레이시아에서 분리 독립했으며 1986년에는 주둔 영국군 철수라는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초대 총리 리콴유는 자서전 ‘일류 국가의 길’에서 강대한 민족주의 국가들 틈에 끼어 생존하는 것조차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절박한 상황에서 싱가포르가 택한 것은 ‘가보지 않은 길’을 선택하는 과감성이었다. 리콴유는 말한다. “세계 다른 어느 곳에서도 유례가 없는 새로운 계획과 방법을 찾아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됐다. 싱가포르는 절대로 평범해서는 안 됐다.” 대표적인 예가 허허벌판에서 금융 중심지로 발돋움한 것이다. 독립 당시 예상조차 불가능했던 일을 ‘명확하게 금지되지 않은 것은 허용한다’는 발상의 전환으로 마침내 실현했다. ‘피크 코리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전례 없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 경제는 이를 돌파해내겠다는 과단성과 절박함이 있는가. 싱가포르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추격형 성장의 단계를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개척해가야 하는 한국 경제, 답을 찾아가야 하는 만큼 다른 나라가 보여주는 ‘타산지석’과 ‘역할 모델’에서 배워야 한다. 리콴유가 말한 것처럼 평범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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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경제의 뜨거운 이슈 중 하나인 공급망. 제품의 생산과정이 ‘컨베이어 벨트‘처럼 지역적으로 연결돼있는 가치사슬의 핵심축이다. 안정적으로 굴러가는 듯하던 공급망은 최근 들어 그 안에 구조적인 불안 요인을 내포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팬데믹 기간에는 록다운으로 멈춰섰고, 한두 가지 부품의 생산 차질로 전체가 마비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또 무역분쟁의 와중에서 핵심 부품은 상대국을 향한 무기로 변질되기도 했다. 더 큰 틀에서는 미·중 패권경쟁의 국면 속에서 공급망을 ’내 편’과 ’네 편‘을 가려 재편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공급망의 ’스트레스 수위‘를 높이는 또 하나의 변수가 부상하고 있다. 바로 EU(유럽연합)가 주도하고 있는 공급망에 대한 실사 지침(CSDDD)이다. 이 지침은 지난 6월 1일 유럽의회의 표결 문턱을 넘어섰다. 앞으로 EU집행위원회와 의회, 그리고 이사회 간에 3자 협의가 개시될 예정인데 2025년 이후 입법이 마무리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 지침이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일정 규모 이상의 EU 기업과 EU내 외국 기업의 공급망에 대해 환경과 인권을 중심으로 포괄적인 ESG 실사를 하도록 의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내용을 들여다보면, 기업 자체 활동뿐만 아니라 자회사와 협력사의 인권 및 환경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식별하고 이를 예방·완화·제거하는 등 적절한 조치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인권의 경우 근로조건, 아동노동, 강제노동, 뇌물과 부패방지, 결사의 자유, 단결권, 단체교섭권 보장 등이, 또 환경은 기후변화, 생물다양성, 대기·토양·수질 오염, 천연자원 과소비, 폐기물 관리 등이 실사 대상이다. 특히 기후변화와 관련해서는 지구 기온상승 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1.5℃ 이내로 억제하기로 한 파리기후협약에 부합하는 전략을 수립하고, 2030년과 2050년까지의 온실가스 배출 감축 목표를 설정하며, 공급망 내 기업의 탈 탄소 수준을 포함시키도록 하고 있다. 유념해서 봐야 할 대목은 실사 의무 위반에 대한 제재 수준이다. 행정적으로 벌금이 부과되는 것은 물론 공공조달 입찰과 유통, 그리고 수출이 금지될 수 있다. 고객사와의 거래가 중단될 수 있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위반 기업을 대상으로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EU 차원의 움직임과 별도로 개별 국가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 노르웨이는 유사한 법률을 이미 시행하고 있으며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 벨기에 등 국가의 의회에는 관련 법안이 제출돼 있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해 ’위구르 강제노동 금지법‘이 발효됐으며 캘리포니아주에서는 공급망 투명성법이 제정돼있는 상태이다. 이렇듯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공급망 실사의 법제화 추세로 당장 EU지역에 수출하는 국내 기업에 비상이 걸렸다. EU에 법인이나 지사를 설치한 기업은 물론 공급망에 포함된 기업까지 지침 적용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난 5월에 내놓은 ’공급망 실사 대응을 위한 기업 지원 방안‘에서 “실사 의무는 EU 역내뿐 아니라 역외기업에도 적용되고 공급망 전반에도 의무화해 수출기업에 상당한 영향이 우려된다”고 진단했다. 특히 대(對)EU 수출이 많은 자동차와 부품업종 등을 중심으로 중소·중견 기업을 포함한 상당수 국내기업에 부정적 여파가 미치고 공급망 안에 있는 협력업체도 간접 영향권에 들어갈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현재 EU에 수출을 하는 국내 기업은 1만8000여 개에 이르고 있다. 대기업이 527개, 중견기업이 1181개, 그리고 중소기업이 1만6206개 사다. 문제는 국내 기업의 대응 태세가 매우 취약하다는 데 있다. 대한상의가 내놓은 ‘2023년 ESG 주요 현안과 정책과제’ 조사 결과(기업 300곳 대상)를 보면 공급망 실사를 가장 큰 ESG 현안으로 본 응답 비율이 40.3%로 가장 높았다. 하지만 대비 수준은 낮았다. 단기적 대응 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해 원청기업의 48.2%, 협력업체의 47.0%가 별다른 조치가 없다고 답했다. 신경은 크게 쓰고 있지만 아직은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공급망에 대한 부담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은 자체적인 공급망 실사에 들어감은 물론 탄소 감축 등에 도움이 되지 않는 협력업체들에 대해 엄격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영국계 은행인 스탠다드차타드가 조사한 결과를 보면 다국적 대기업의 탄소 배출량 중 공급체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무려 73%에 이르고 있다. 이 때문에 이들 기업은 협력업체의 탄소 배출을 줄이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특히 78%의 대기업은 2025년까지 탄소 감축에 진전이 없는 협력업체와의 거래를 끊겠다는 입장인데 35%의 기업이 공급망에서 배제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BMW가 3년 평균 150여 개사를, 그리고 GE가 2020년 기준으로 71개사를 공급망에서 빼낸 것도 같은 맥락에서 진행된 일이다. 공급망 관리를 강화하고 있는 것은 국내 대기업도 마찬가지다. 전경련이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펴낸 30대 그룹 소속 75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58.7%인 44개사가 ‘협력사 행동규범’을 만들어 협력회사가 이를 준수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규범에는 근로시간 준수, 강제근로 금지 등 인권과 온실가스 관리 등 환경, 안전보건, 기업윤리, 경영시스템 항목이 들어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은 글로벌 공급망이 환경과 인권 등 ESG의 가치를 내재화하는 쪽으로 탈바꿈될 것임을 예고해주고 있다. 관련 기준이 낮은 기업 또는 국가에서 높은 기업과 국가로 공급망이 이동하는 대수술 작업이 이뤄질 것이라는 얘기다. 정부와 기업이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감안했으면 하는 몇 가지 점을 지적해본다. 먼저 정부는 국제 통상협상 무대에서 공급망 규제의 복잡성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현재 공급망 실사 논의는 EU뿐만 아니라 개별 국가 차원에서도 이뤄지고 있어 기업 입장에서는 규제 적응을 위한 부담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다. 통상협상을 통해 불합리한 제도에 대해서는 문제 제기를 하고 더 나아가 기후공시나 지속가능공시처럼 국제 표준안을 만들어가는 방안도 검토됐으면 한다. 다음으로 공급망 실사에 대한 정부 관련 부처의 공동 대응이 이뤄져야 한다. EU 지침안을 보면 내용이 상당히 포괄적이다. 환경 부문에서는 국내 기업이 가장 취약한 영역인 생물다양성이 들어있고, 기후변화와 관련해서는 공급망에서의 탄소배출인 스코프3의 감축을 시사하는 항목이 포함돼있다. 또 공시와 관련해 EU가 마련한 지속가능보고지침(CSRD)과 연계하도록 하는 내용도 있다. 이렇듯 다양한 사안이 담겨 있고 기업에 주는 영향이 클 것으로 보이는 만큼 공급망 실사 대응은 이를 주관하는 산업통상자원부뿐만 아니라 기획재정부, 환경부, 중소벤처기업부 등이 한 몸을 이뤄서 해나가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아울러 대기업이 ESG 역량이 부족한 협력업체를 실효성 있게 지원할 수 있도록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안이 마련됐으면 한다. 현재 공급망 실사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걱정스러운 점이 나타나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최근 페널티를 주는 방식의 공급망 실사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중기중앙회는 “ESG 평가 결과가 나쁜 협력사를 공급망에서 탈락시키는 생존 게임 방식의 공급망 실사는 산업기반을 약화시킬 뿐”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물론 대기업 입장에서 ESG 경영이 지나치게 부진한 협력사를 안고 갈 수 없다는 판단을 불가피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ESG 경영의 초기 단계에 있는 국내 현실을 감안했을 때 협력사를 적극적으로 돕는 방식으로 ‘상생협력’이 진행되는 게 바람직하다. 정부도 정책적으로 이런 방향으로 유도를 하고 있지만, 현실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자금 지출이 수반되는 대기업의 협력사 지원에 대해서는 세제 혜택 부여 등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은 어떨까 싶다. 기업의 경우 모든 업종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접근보다는 업종별 대응이 더 적합해 보인다. 예컨대 의류 산업과 정유 산업은 실사 지침에서 주시하고 있는 ‘부정적 영향’이 나타나는 분야와 방식이 크게 다르다. 업종별 특이성을 고려해 동종 업종끼리 함께 대응하는 게 적합한 이유이다. 이미 산업별 이니셔티브가 존재하는 자동차와 전자 등 업종은 이를 중심으로, 그렇지 않은 산업은 산업별 협의체 등이 중심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비슷한 문제에 직면한 기업끼리 정보를 공유하고 함께 이를 해결해나갈 수 있도록 실시간 협의 및 대응을 위한 플랫폼을 구축하는 것도 논의됐으면 한다. 그동안 ESG 논의가 진전되면서 ESG 경영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영역은 결국 공급망이라는 점에 공감이 형성되고 있다. 중요한 점은 공급망에 초점을 맞춘 ‘ESG 렌즈’가 1차 협력사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아직까지 공급망의 심도(深度)를 어디까지로 할지 논의는 활발하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2차, 3차 등으로 범위가 확장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외부에서 몰려오는 파고(波高)에 수동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이번 기회에 공급망 자체의 체질을 ESG를 중심으로 개선하기 위한 종합대책 수립 등 능동적인 자세가 긴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 경제는 수출 의존도가 높은 만큼 ‘풀뿌리 공급망’의 ESG 혁신은 이제 피해갈 수 없는 과제가 됐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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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들이 대만에 전쟁이 날까 봐 우려하고 있는지요?” 2021년 7월 15일 마크 류 TSMC 회장은 한 금융분석가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류 회장은 주저하지 않고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답변을 했다. “전 세계가 대만의 반도체 공급망에 의존하고 있고 아무도 그걸 교란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는 부연 설명을 했다.(<칩워> 크리스 밀러 저) 이 같은 류 회장 발언 뒤에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의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는 대만을 중국이 무력 침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이른바 실리콘 실드(Silicon Shield), 반도체 방패론이다. 실제로 대만 반도체 산업의 세계적 위상은 반도체 방패론의 근거가 되고 있다. 대만 섬 서쪽에 위치한 TSMC는 세계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이 2022년 4분기 기준으로 58.5%에 이르고 있다. TSMC는 물론 또 다른 파운드리 강자인 UMC를 보유하고 있는 대만은 세계 메모리 칩의 11%를 생산하고 있다. 특히 컴퓨터, 전화, 데이터센터, 전자 장비 대부분을 작동하게 하는 로직 칩의 37%를 대만 기업이 제조하고 있다. 산업의 ‘힘’에 바탕을 둔 반도체 방패론. 중요한 점은 이 말이 미디어나 학계가 만들어 낸 용어가 아니라 대만 정부가 대외적으로 전파하고 있는 ‘소신’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차이잉원 대만 총통은 2021년 말 외교 전문지인 포린 어페어에 기고한 글에서 “대만의 반도체 산업은 권위주의적 정권의 공격적 행동에 대해 대만을 방어할 수 있게 하는 반도체 방패”라고 역설했다. 이 글에서 차이잉원 총통은 대만은 반도체뿐만 아니라 바이오 기술과 재생에너지 같은 분야에서 안정적인 글로벌 공급망을 창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며 첨단 제품의 생산 허브로서 자국(自國)의 역할을 강조했다. 대만 총통이 앞장서 얘기하고 있는 반도체 방패론은 따지고 보면 대만의 반도체 산업이 가지고 있는 전략적 중요성을 고려할 때 미국이 중국의 대만 침공을 방관하지 않고 적극적인 방어에 나설 것이라는 얘기나 다름없다. 미국은 이 문제에 관한 한 전략적 모호성의 태도를 취해왔다. 하지만 2022년 9월에 이례적인 일이 일어났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중국의 공격이 있을 경우 미군은 대만을 방어할 것이라며 이 원칙을 깨뜨리는 듯한 발언을 했다. 백악관 관리들이 즉시 미국의 대만 정책에는 변화가 없다며 무마에 나섰지만 미국 정부가 ‘치고 빠지기식’ 입장을 보인 것은 그만큼 깊은 고심의 흔적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반도체는 대만의 국가방위를 지키는 방패가 될 것인가?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크리스 밀러는 반도체 방패론에 대해 “현 상황을 대단히 낙관적으로 보는 견해”라고 단언한다. 중국이 전면적 침공 없이 부분적인 항공 및 해양 봉쇄 등 다양한 선택지를 가지고 있고 이게 대만의 항전 의지도 꺾고 미국의 개입도 어렵게 하는 상황이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물론 반대쪽 견해도 만만치 않게 존재한다. 유명 저자인 이안 부루마는 프로젝트 신디케이트에 실린 기고문에서 대만은 미국이 지킬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부루마는 두 가지 근거를 든다. 하나는 첨단 반도체의 90% 이상을 생산하는 대만이 중국의 수중에 들어가면 미·중 패권 경쟁이 중국에 유리하게 기울 것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중국이 대만을 점령하면 한국과 일본이 미국의 방위 약속에 대한 신뢰를 잃어 핵무장에 나서려고 할 것이라는 점이다. 반도체 전문가인 권석준 성균관대 교수도 ‘방패론자’다. 그는 저서 <반도체 삼국지>에서 “중국 정부가 만에 하나 미친 짓을 한다면 그것은 대만에 대한 강제 무력 합병과 이후 TSMC에 대한 국유기업화가 될 것”이라며 미국이 이를 좌시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이 중 어떤 주장이 맞을지는 지금으로선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만큼 사안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다만 반도체 방패론이 말해주는 중요한 가치는 한 산업이 국가안보의 핵심 변수로 부상했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논의의 무대를 한반도로 옮겨와 보자. 주지하다시피 북한은 핵 위협의 수위를 계속 높이고 있다. 미사일의 비행 거리를 늘려 미국 본토를 사정권에 넣으려 하고 있다. 미국에 샌프란시스코나 로스앤젤레스 같은 도시가 공격받을 수 있다는 압박을 가해 유사시 한국을 지원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분석된다. 안보 불안이 고조되자 미국 전술핵 재배치 주장이나 자체 핵무장론이 나올 정도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4월 말에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한·미 핵협의그룹(NCG) 창설을 통해 한국이 북한의 핵 공격에 대비한 전략 수립에 참여하는 것 등을 골자로 한 워싱턴 선언을 채택했다. 미국의 확장 억제 약속에 대한 신뢰를 제고하려는 조치였다. 북한의 핵 공세에 대해서는 ‘강대강’의 대응 조치가 필요하다. 하지만 여기에서 대만처럼 우리나라에서도 반도체 방패론이 유효할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미리 얘기하면 ‘그렇다’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합하면 메모리반도체 시장 점유율이 70%를 넘는 데다 전체 반도체 시장의 25%를 한국 기업들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선폭 7㎚ 이하 첨단공정의 양산이 가능한 두 개 기업 중 하나가 삼성전자(다른 하나는 TSMC)다. 메모리 제조의 글로벌 허브인 한국의 안보는 세계 경제의 안보와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임형규 전 삼성전자 사장은 저서 <히든 히어로스>에서 “한국의 지배력이 압도적인 메모리반도체 역시 먹거리 문제를 뛰어넘어 국가의 안보적 가치를 지닌 산업”이라며 “‘대체 불가능한 필수재’인 한국의 메모리반도체 없이는 전 세계 4차 산업혁명도 진전되기 힘들다”고 강조한다. 좀 더 직설적으로 얘기하면 최상위 반도체 기업 두 개를 보유한 한국은 미국의 세계 전략상 반드시 방어해야 하는 자유세계의 소중한 자산인 것이다. 중요한 점은 한국이 갖는 전략적 가치가 반도체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가치는 바로 세계 경제에서 갖는 한국의 중차대한 위상에 있다. 경제 규모(국내총생산 GDP) 면에서 우리나라는 세계 13위에 랭크돼 있다. 무역 규모는 세계 8위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내놓은 국제경쟁력 평가에서도 13위로 상위권에 올라 있다. 또 유에스 앤드 월드리포트가 올해 초에 발표한 ‘2022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에서 우리나라는 미국, 중국, 러시아, 독일, 영국에 이어 6위를 기록했다. 프랑스, 일본, 캐나다 등 다른 선진국보다도 높은 순위다. 이뿐만이 아니다. 첨단산업도 글로벌 주요 공급자 위치를 단단하게 확보해 놓은 상태다. 예컨대 세계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시장 점유율이 2022년을 기준으로 대형 97%, 중소형 71%로 부동의 1위다. 아직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리지는 않았지만 수소차 시장에서도 1위를 달리고 있다. 이와 함께 전기차용 배터리(점유율 23.7%)와 이미지센서(29%)도 세계 2위를 유지하고 있다. ‘G8 가입론’의 근거가 되는 국력의 좌표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이 같은 사실은 북한의 핵위협으로 흔들릴 수 없는 자유 진영 내 한국의 강고한 위치를 말해주고 있다. 미국 백악관은 2022년 10월 발표한 ‘국가안보 전략’에서 향후 10년을 미국 리더십의 결정적 시기로 진단했다. 이 문건에서 미국은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의 대치 국면에서 동맹은 가장 중요한 전략 자산이라며 국익을 위해 군사력 사용을 주저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지정학적 위치뿐만 아니라 경제와 산업에서도 전략적 중요도가 큰 동맹국인 한국은 미국이 방어해야 할 대표적인 국가 중 하나임은 부인할 수 없다. 1950년 1월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딘 애치슨은 한국이 미국의 방어선 밖에 있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이로부터 다섯 달이 지난 6월 북한은 남침했고, 미국은 마침내 애치슨 라인 바깥의 국가를 방어하기 위해 전쟁에 개입했다. 공산주의 저지에 실패하면 다른 지역에서 미국이 쌓아온 신뢰가 무너져 내릴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훗날 애치슨은 “한국이 우리를 구했다”고 회고했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공산권에 대응해 선제적 군사 투자를 할 수 있었다. 이로부터 70여 년이 흐른 지금 한반도의 남쪽은 미국의 ‘신(新)애치슨 라인’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한국은 미국 입장에서 걸려 있는 포괄적 이해가 너무 큰 지역이다. 물론 북한의 위협에 대응해 미국의 핵 확장 억제를 확고하게 다지면서 자체 군사력을 키우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한국은 반도체는 물론 경제 자체가 방패인 나라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국방과 경제, 그리고 산업이 서로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함께 맞물려 있는 ‘3각 방패’를 우리는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풀어나가야 할 과제는 계속 경제도 잘하고 산업도 고도화해 한국의 전략적 이익, 즉 ‘몸값’을 키워나가는 일일 것이다. 이게 안보의 핵심적 ‘맥점’이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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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지난 3월에 국가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에는 2030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2018년 대비 40%)를 달성하기 위한 부문별 목표의 조정 내용이 포함됐다. 전환 부분의 감축 목표치를 종전의 44.4%에서 45.9%로 소폭 상향한 반면 산업은 14.5%에서 11.4%로 3.1%포인트 내린 게 특징이다. 정부는 “산업 부문은 원료 수급, 기술 전망 등 현실적인 국내 여건을 고려하여 감축목표를 완화했다”고 설명했다. 화석연료를 많이 사용하는 제조업의 비중이 높은 산업구조를 고려할 때 탄소를 획기적으로 줄이기 어려운 현실을 반영한 정책의 선회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국내외 여건이 이런 시나리오가 먹혀들 수 있는 쪽으로 움직인다면야 만사 ‘OK’다. 제조업은 상대적으로 천천히 탄소배출을 줄여나가도 돼 소프트랜딩의 길이 열리게 된다. 하지만 상황이 그리 만만하지 않다. 유럽연합(EU)이 탄소 배출을 많이 하는 외국 기업에 불이익을 주는 제도를 확정한데다 글로벌 차원에서 기업의 탄소 배출 공시를 의무화하는 제도가 본격적인 시동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EU로 가보자.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와 기후변화 대응을 선도하고 있는 EU는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1990년에 대비해 55% 줄이기로 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입법안 패키지 ‘핏포 55(Fit for 55)’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이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이다. 이 제도는 환경규제가 약한 외국에서 생산된 수입 제품에 대해 EU 제품보다 탄소배출 비용을 적게 지불한 만큼 관세 형태의 탄소 가격을 물리겠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 차이만큼 수입 제품에 대해 CBAM 인증서를 구매하도록 의무화해 금전적 부담을 지우겠다는 것이다. 이 제도는 EU 기업이 탄소 규제가 약한 다른 나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자신들은 저탄소 구조로 전환하느라 원가가 높아졌는데 다른 나라의 고탄소 제품이 아무런 규제도 받지 않고 수입되는 불공정 무역 문제를 해소하겠다는 의도도 담겨 있다. CBAM과 관련해 지난해 말부터 의미 있는 진전이 이뤄져 왔다. 그동안 EU 집행위원회와 이사회, 유럽의회는 각자의 안을 내놓았는데 지난해 말 최종 입법안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고 최근 유럽의회와 이사회가 이를 공식 승인했다. 핵심 내용을 보면, 올해 10월부터 2025년까지의 전환 기간을 거쳐 2026년 1월부터 탄소국경조정제도를 본격 시행하는 것으로 일정이 확정됐다. 전환 기간에 대상 업체들은 탄소 배출량을 보고하면 된다. CBAM 인증서 구매는 2026년부터 의무화된다. 대상 품목은 당초 집행위와 이사회는 5개, 유럽의회는 9개를 주장했으나 결국 철강·알루미늄·시멘트·비료·전력·수소 6개 제품으로 결정됐다. 다만, 과도 기간에 플라스틱과 유기화학품 등을 추가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이 제도가 적용되는 탄소 배출량에는 생산공정에서의 직접 배출량과 외부에서 사들인 열과 전기 사용으로 인한 간접 배출량이 포함됐다. CBAM은 국내 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비상이 걸린 곳은 철강업종이다. 우리나라는 대(對)EU 5위 철강 수출국으로 그 규모가 43억 달러(2021년)에 이르고 있다. 철강업은 탄소를 많이 내뿜는 업종인 만큼 CBAM 구매 부담이 생기면 수출 경쟁력이 약화될 것으로 우려된다. 전환 기간 중 수소환원제철과 CCUS(탄소포집·이용·저장) 기술 등을 활용해 탄소 배출을 크게 줄여야 하는 일이 발등의 불로 떨어졌다. 알루미늄의 경우 연간 수출량이 5억 달러로 철강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투입재인 잉곳의 생산공정이 탄소를 많이 배출해 부정적 영향이 예상된다. 나머지 비료, 시멘트, 전력, 수소 4개 품목은 수출이 적거나 없는 상태이다. 하지만 CBAM의 여파는 여기에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EU가 앞으로 플라스틱이나 유기화학품 등을 대상에 추가하면 부정적 영향이 우려된다. EU 수출물량이 플라스틱은 철강보다 많은 연간 50억 달러, 유기화학물은 18억 달러에 이르기 때문이다. CBAM은 탄소 배출이 무역장벽화하고 있는 사례이다. 탄소 배출 감축 부담을 가져오는 대내외 여건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기업들은 필요한 전력의 100%를 태양광이나 풍력 같은 재생에너지로 사용하겠다는 RE100에 가입하고 있다. 현재 157개 국내 기업이 참여를 선언한 상태다. 목표 시점은 2025년부터 2050년까지 다양하다. 기업은 자발적으로 RE100에 가입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글로벌 무대해서 사업을 하려면 ‘꼭 입어야 하는 드레스코드’ 같은 ‘사적 규제’가 작동하고 있는 탓이 크다. 앞으로 RE100에 대한 압박은 더욱 커질 것이다. 이는 기업들이 탄소를 배출하는 화석연료의 활용을 크게 줄여나가야 함을 시사한다. 여기에다 기업 공시의 큰 판을 바꾸는 제도적 변화가 임박한 상태다. 기후공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탄소배출 공시안이 이미 시행에 들어갔거나 확정을 눈앞에 두고 있다. 기업은 크게 스코프 1, 스코프 2, 스코프 3 등 세 가지 통로를 통해 탄소를 배출하고 있다. 스코프 1은 기업이 소유·통제하고 있는 공장 등 시설에서 발생하는 직접적 배출이다. 스코프 2는 기업이 구매하는 전기와 동력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탄소를 말한다. 스코프 3는 협력업체는 물론 물류, 제품의 사용과 폐기 등 기업 외부에서의 간접적 배출량이다. 스코프 3는 측정과 관리가 어려워 기업들이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전체 탄소배출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스코프 3를 빼고 기후공시를 하자는 것은 ‘알맹이’를 없애자는 얘기와 다름이 없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현재 지속가능 및 기후공시 제도에서 가장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곳은 역시 EU다. EU는 지난 1월부터 이미 지속가능성공시지침(CSRD)을 시행하고 있다. 5000개 EU 역내외 기업에 적용되는 CSRD는 스코프 1, 2, 3 모두의 탄소 배출 공시를 의무화하고 있다. 특히 기후변화가 기업에 미치는 영향은 물론 기업이 기후에 주는 영향도 알리도록 하고 있다. 이른바 이중중대성 원칙이다. CSRD는 2024년부터 2029년 사이에 단계적으로 적용 대상이 확대된다. 글로벌 무대에서의 기후공시안도 확정을 앞두고 있다. 이 작업을 맡고 있는 기관은 ISSB(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인데 6월 말에 최종안을 공표한 다음 이를 내년 1월부터 발효하겠다는 일정을 잡아놓고 있다. ISSB안 또한 스코프 1, 2, 3 전체의 탄소 배출량을 공시하도록 하고 있다. 다만, 협력업체들의 자료를 수집하는 데 어려움이 적지 않은 점을 감안해 스코프 3는 시행 시기를 1년 늦추기로 했다. ISSB안은 최종안이 나오면 비교적 빠른 속도로 각국이 도입할 것으로 보인다. G7과 G20, 국제증권관리위원회와 40개국 이상의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이 이를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미국 SEC(증권거래위원회). SEC는 지난해 3월 상장사의 기후공시를 의무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대상은 EU와 ISSB의 방안과 동일하게 스코프 1, 2, 3를 포괄하고 있다. 다만, 스코프 3는 상장사에 ‘중요한’ 경우, 그리고 상장사가 스코프 3를 포함한 탄소감축 목표를 설정한 경우로 제한하고 있다. 현재 이 안을 놓고 찬반 논란이 한창인데 공화당과 일부 기업이 반발하고 있어 스코프 3 공시안이 완화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SEC안도 올해 안에 확정되고 2024년부터 시행에 들어갈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기후공시는 이제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됐다. 오는 2025년에 자산규모 2조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부터 ESG 공시를 의무화하겠다는 계획인 정부도 글로벌 제도화의 흐름을 고려해 기후공시부터 관련 기준을 마련한다는 방침이다. 이에 앞서 내년부터 ISSB안이 시행되면 우리나라도 도입 압박을 받게 될 전망이다. EU의 CSRD와 미국 SEC안은 현지에 진출한 일정 규모 이상의 국내 기업은 적용 대상이 된다. 또 미국과 EU 기업의 공급망에 들어있는 기업도 이를 우회할 수 없다. 문제는 스코프 3 탄소 배출이다. 대다수 기업이 이를 공시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특히 중소기업의 준비가 부진한 상황이다. 하지만 지구온난화를 억제하기 위해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해야 하는 일이 글로벌 대명제가 된 상태에서 기업 전 영역에서의 탄소 배출을 공시하는 것은 세계적인 공감대가 모아진 실행 과제이다. 전면적 기후 공시가 기업 경영환경의 ‘뉴노멀’이 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특히 기후공시는 개별 기업의 탄소 배출 ‘성적표’가 드러나는 것과 함께 매년 탄소 배출을 얼마나 줄이고 있는지에 대해 시장의 감시체제가 가동될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결국 탄소 배출 감축은 향후 기업의 경쟁력을 좌우할 수 있는 요인이 될 전망이다. 기업들은 힘겨운 과제라고 하소연하고 있지만 저탄소 산업구조로의 전환은 되돌릴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 됐다. 국가의 탄소감축 목표와 관련한 기업의 부담이 줄어들었다고 방심하면 수출시장에서 그리고 공시제도가 가동되는 금융 및 자본시장에서 국내 기업은 적지 않은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다. 다행히 탄소중립을 위기가 아닌 기회로 인식하는 기업이 많이 늘어나고 있어 기업가정신이 주도하는 ‘탄소 혁신’에 기대를 걸어본다. 아울러 정부가 화학, 철강, 시멘트,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등 4대 탄소 다배출 업종의 탄소중립 기술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만큼 민관의 공조가 ‘저탄소 코리아’로 가는 길을 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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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시절. 처음에 재계는 나름대로 큰 기대를 가졌다. 친기업 성향인 보수 정부인 데다 대통령이 기업을 잘 아는 CEO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가가 크게 오르면서 생활 밀접 52개 품목에 대한 이른바 ‘MB 물가’ 관리에 들어가자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더구나 당시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은 자신이 공인회계사임을 앞세우고 기름값 원가와 유통구조를 샅샅이 뜯어보겠다며 유가 인하를 압박하기도 했다. “아는 사람이 더한다”는 볼멘소리가 재계에서 터져나왔다. 늘 그렇듯 고개를 드는 물가는 ‘큰 정부’를 소환한다. 윤석열 정부도 마찬가지다. 자유와 규제 완화의 깃발을 들었지만 민생 전반을 옥죄는 물가 앞에선 국민의 ‘주머니 사정’을 배려하는 쪽으로 정책을 선회했다. 국민의 지갑은 얇아져 가는데 올라가는 금리에 무임 승차해 쉽게 이익을 늘린 은행의 ‘눈치 없는’ 성과급 잔치. 여기에 ‘은행은 공공재적 시스템!’이라며 경고 카드를 들고나온 정부의 공세. 이 상황은 사실 따지고 보면 은행이 자초한 일이며 정부로서도 팔짱 끼고 방치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물가의 고삐를 잡으려는 행정 조치의 과녁에는 통신사, 주류업체, 정유업계 등이 포함됐다. 시장경제에 대한 이 같은 정부의 개입을 어떻게 봐야 할까? 자유를 얘기해 놓고 정부가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 논리다. 시장은 불가침(?)의 성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한번 따져보자. ‘시장’ 하면 우리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떠올린다. 이 책을 읽어보지 않았어도 많이 알려진 상식. 모두가 이기적으로 행동해도 시장은 알아서 경제에 가장 바람직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마술 상자’ 같은 순기능을 한다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시장에 정부가 끼어들 틈은 없다. 국부론에서 애덤 스미스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자신이 진실로 사회의 이익을 증진하려고 의도하는 것보다 효과적으로 이익을 증진한다”며 경제주체가 의도하지 않았던 목적을 달성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의 역할을 강조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언급이 이 책에 단 한 번 나올 뿐인데 시장경제의 근간을 떠받드는 핵심적인 논리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역시 강력한 메시지는 길이와 무관하다. 어찌 됐건 국부론에만 머물면 ‘시장은 만능’이라는 생각에 갇히게 된다. 논의의 지평이 바뀌는 실마리는 스미스의 다른 저작에서 발견된다. 1776년에 나온 국부론보다 17년 전인 1759년에 쓰인 ‘도덕감정론’이 그 주인공이다. 이 책에서 스미스는 이기심보다는 연민, 자애, 동정심을 강조한다. “자기 자신을 위하는 사심을 억제하고 남을 위한 자애심은 방임(放任)하는 것이 인간의 천성을 완미(完美)하게 만드는 길이다.” 그러면서 그는 “미덕의 완미함은 우리 자신의 번영이 전체의 번영과 일치하거나 혹은 전체의 번영에 기여하는 범위 내에서만 우리 자신의 번영을 추구하는 것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개인보다 전체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이기심의 자제가 필요하며 이런 맥락에서 국가는 사회의 행복과 불행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사회단체라는 게 스미스의 또 다른 주장이다. 결국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의 긴장은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는 시선이 중요함을 말해준다. 시장이 절대적 명제는 아니며 사회의 행복을 증진하는 국가의 역할이 같이 가야 사회와 경제에 무게중심이 생긴다는 것이다. 문제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조의 편향성이 엎치락뒤치락하며 국가나 시장의 과잉이 가시화할 때가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대표적 인물은 시장주의의 본산인 시카고학파의 대부인 밀턴 프리드먼이다. 그의 논지는 그저 시장 절대주의와 기업 자유로의 직진이다. 한마디로 시장이 알아서 잘하니 정부는 최대한 뒤로 빠져 있으라는 얘기다. 그는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정부는 게임의 규칙을 정하고 이를 해석하는 심판으로 역할을 줄일 것을 요구한다. 정부 재정에 대해서는 “경기 변동을 일으키는 다른 힘들을 상쇄하는 균형 바퀴가 되기는커녕 그 자체로서 경기 교란과 불안정의 주된 원천이 되었다”고 비판한다. 이런 시각이다 보니 기업 경영에 대해서도 ‘자유’를 주장한다. 1970년에 나온 ‘프리드먼 독트린’에서 그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이익을 늘리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런 목적을 가진 기업에 고용 창출, 오염 방지 등 활동을 하라고 하는 것은 사회주의라며 ‘색깔론’을 덧입히기도 한다. 요즘 시선으로 보면 너무 나간 것이다. 프리드먼 독트린은 이후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에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를 거치면서 시장 절대우위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로 이어진다. 정부의 영역은 크게 좁혀지고 규제 완화, 민영화, 무역 개방 등이 확산된다. 신자유주의는 국제 무역의 확대와 개도국의 경제 개발 등 적지 않은 열매를 맺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양극화 심화와 환경 훼손 등 큰 부작용을 초래했고, 2008년 금융위기 와중에 이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지면서 사실상 좌초했다. 신자유주의의 퇴조는 동전의 양면이었던 프리드먼 독트린의 쇠락을 뜻한다. 실제로 이를 반영해 프리드먼 후예들은 노선을 일부 수정했다. 시카고대학의 스티글러 센터는 2020년 프리드먼 독트린이 나온 지 50주년을 기념하는 취지로 발간한 논문집에서 프리드먼이 부정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인정했다. 이 논문집에서 루이스 진갈레스 교수는 프리드먼의 견해는 완전경쟁시장에서만 유효하다며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독과점 기업이 존재하는 시장에서는 이 독트린이 적용되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그는 거대 기업들은 이익이 아니라 사회 후생(厚生)을 극대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기업의 자유를 제한하는 외적 요구를 인정한 셈이다. 발상의 커다란 전환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역사의 종말’에서 자유주의의 승리를 선언했던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학교 교수는 최근 저서 ‘자유주의와 그 불만’에서 경제적 자유주의가 신자유주의로 변질해 기괴한 불평등의 모습을 낳았다고 비판한다. 특히 “정부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과도한 적대감은 명백히 비합리적”이라며 “국가는 공공재를 공급하는 데 필요하다”고 말한다. 국가를 경제성장과 개인적 자유의 ‘적’으로 악마화했던 시대와 결별해야 한다는 것이 후쿠야마의 제언이다. 정부는 특히 경제에 걸림돌이 아니라 촉매제 역할도 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리스크가 너무 커 민간기업이 뛰어들지 못하는 초기 기술 투자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해 이를 성공시킨 다음 이 기술을 민간으로 넘겨주는 ‘기업가형 정부’의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아이폰의 탄생을 가져온 인터넷, GPS, 터치스크린 디스플레이 등 핵심 기술이 미국 정부의 지원으로 개발된 게 대표적 사례다. 마리아나 마추카토는 “정부는 흔히 여겨지는 것보다 가치 창조에 훨씬 더 많은 기여를 하고 있지만 정부의 가치 창조 역량은 매우 심하게 저평가받고 있다”고 지적한다.(‘가치의 모든 것’) 지금까지의 논의는 최근 이뤄진 정부의 시장 개입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 중요한 사실은 과잉 개입도 문제지만 시장을 교정하는 정책 자체를 시장의 자유를 훼손하는 ‘악’으로 보는 사고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어른거리는 사고 구조이다. 정책이 국민 다수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공동선(善)을 지향하거나 경제에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면 합목적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경제위기 국면에서 서민 가계의 안정을 위해 물가를 억제하고 시장의 도덕적 해이를 견제하고 나선 정책은 적절성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다만 개입이 과도한지를 살피는 사회적 감시는 물론 정부의 절제와 지혜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정부의 역할에 대해 곱씹어볼 만한 의견을 들려준다. 밀은 먼저 정부가 개입해서 안 되는 두 가지 경우를 언급한다. 정부보다 개인이 그 일을 더 잘할 수 있을 때와 이미 비대해진 정부 권력을 더 강화하려고 할 때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행위에 대해서는 사회가 간섭할 수 있다고 말한다. 목적이 정부의 권력 확대인지, 부정적 영향의 차단인지에 따라 시장 개입이 정당한지가 판가름 난다는 것이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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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하면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시선을 더 크게 넓혀보면 자연의 역할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기온 상승을 억제하는가 하면, 수질을 조절하고 물이 잘 순환하게 한다. 또 식량을 공급하고 건축자재, 의약 재료 등 다양한 산업 원료를 제공하고 있다. 자연이 주는 ‘생태적 서비스’의 대표적 사례들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생물다양성(biodiversity)이란 용어가 자주 언급되고 있다. 생물다양성은 미생물을 포함한 동물과 식물 등 생명체와 생명체가 존재하는 환경, 즉 생태계의 다양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 말이 중요해진 이유는 생물다양성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 인류의 삶과 경제에 위기 신호가 깜빡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생물다양성 손실 이슈다. 세계경제포럼(WEF)에 따르면 그동안 인류의 활동은 토지의 75%와 해양 환경의 66%를 심각하게 변화시켰다. 수백만 종이 멸종 위기에 직면하는 등 식물과 동물 종 25%가량이 생존에 위협을 받고 있다. 특히 1970년 이래 포유류, 조류, 파충류, 양서류 그리고 어류가 평균 68%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인류가 환경에 압박을 가함으로써 생물다양성이 상실되는 속도가 자연적인 소멸 속도보다 100배나 빠른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기후변화가 이를 가속화하고 있다. 동물 20종 중 한 종은 지구온난화, 이 한 가지 요인 때문에 멸종될 상황에 놓여 있으며, 해상 어류 가운데 4분의 1이 머무는 터인 산호초의 99% 이상이 훼손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그 결과 생물다양성 손실은 향후 10년간 인류에게 가장 큰 리스크 중 하나가 될 것으로 꼽히고 있다. 생물다양성 손실은 그 자체로도 심각한 문제다. 더 주목해야 할 점은 사회와 경제활동이 본질적으로 여기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WEF의 연구 결과를 보면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 중 절반이 넘는 44조 달러의 경제적 가치 창출이 자연과 생태적 서비스에 크게 기대고 있다. 의존도가 높은 3대 산업은 건설(4조 달러), 농업(2조5000억 달러), 식음료(1.4조 달러)다. 이들 3개 산업의 규모는 독일 경제의 2배 가까운 수준이다. 게다가 화학, 항공, 여행, 부동산 등 6개 산업의 공급체인이 창출하는 총부가가치의 절반 이상이 자연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창출되고 있다. 이렇듯 자연의 기여도가 큰 만큼 생물다양성이 흔들리고 있는 현상은 그대로 경제 및 경영 리스크로 이어지고 있다. 자연 파괴가 가져오는 기업 리스크는 크게 3가지로 구분되고 있다. 먼저, 기업이 자연에 의존하는 데서 오는 리스크다. 커피가 좋은 예다. 기후변화와 병충해, 삼림파괴 때문에 커피 품종의 60%가 사라질 위험에 놓여 있다. 이런 우려가 현실화하면 글로벌 커피 시장은 심각한 불안정 상태에 빠질 것으로 보인다. 또 기후변화로 인해 대규모의 산호초 손실이 일어나면 관광산업에 대한 부정적 여파가 클 것으로 예상된다. 두 번째 리스크는 기업이 자연에 주는 부정적 영향과 관련이 깊다. 현재 각국 정부는 이를 억제하기 위해 다양한 규제를 도입하고 있다. 프랑스는 기업이 공급체인에 대한 환경 평가를 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을 제정했으며, 인도네시아는 새로운 농업 허가를 제한함으로써 습지 개발 모라토리움(중단)을 선언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투자자와 신용평가사도 기업을 평가할 때 환경에 대한 영향을 들여다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리스크는 자연 손실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서 생기고 있다. 보건이 적절한 예다. 실제로 우리는 글로벌 경제의 발목을 잡아 온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을 통해 자연 훼손이 가져오는 파괴적 결과를 지난 3년여 동안 목도해 왔다. 에볼라나 지카바이러스도 삼림 파괴가 발생시킨 감염병이다. 결국 생물다양성 손실은 이를 방치하면 경제에 큰 충격을 줄 것으로 우려된다. 세계은행은 자연이 제공하는 생태적 서비스가 붕괴하면 2030년까지 매년 글로벌 GDP가 2.7조 달러씩 줄어들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충격적인 연구 결과도 있다. 매사추세츠 등 대학 연구진의 분석 결과를 보면 꽃가루받이를 하는 곤충이 크게 줄면서 과일, 채소, 그리고 견과류 생산이 3~5% 감소하고 이로 인한 식량 부족과 질병 발생으로 세계적으로 사망자가 42만7000명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생물다양성 손실에 빨간불이 켜지면서 경제에 악영향이 우려됨에 따라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국제적 논의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먼저 국가 간 협의 테이블. 이와 관련해 중요한 분기점은 지난해 12월 20일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제15차 생물다양성협약 당사국총회(COP15)다. 196개국이 참가한 이 회의에서는 전 지구적 생물다양성 전략 계획인 쿤밍-몬트리올 글로벌 생물다양성 프레임워크(GBF)가 채택됐다. GBF의 핵심은 2050년까지 ‘자연과 조화로운 삶’이라는 비전을 달성하고, 이에 앞서 2030년까지 ‘30×30’ 목표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30×30’은 육상과 해상의 각각 30%를 보전·관리한다는 내용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2030년까지 생물다양성 손실을 중단시키고 회복시켜 ‘네이처 포지티브(nature-positive)’를 이루겠다는 로드맵이다. 이와 별도로 생물다양성에 미치는 기업의 부정적 영향을 줄여나가기 위한 민간의 보폭도 커지고 있다. 이 대열에는 기후변화와 ESG(환경·사회·지배구조)처럼 투자자들이 선제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투자자들은 생물다양성을 기후변화와 같은 기업의 리스크로 보고 있다. 상황이 나빠지면 피투자 기업의 재무 상태가 악화해 자산 가치가 급락할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는 얘기다. 지난해 12월 기관투자자들이 연합체인 ʻ네이처 액션 100ʼ을 출범시킨 이유다. 이들은 앞으로 100개 핵심 기업을 선정한 다음 해당 기업이 자연을 보호하고 회복시킬 방안을 내놓도록 압박해간다는 계획이다. 투자자들의 움직임과 관련해 눈여겨볼 것은 ʻ자연자본ʼ이라는 개념이다. 자연도 공장이나 기계같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만큼 자본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숲, 해양, 물 등 자연 자원뿐만 아니라 생태계를 지탱하는 생물다양성도 자연자본에 포함돼 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은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이 자연자본에 중대하게 의존하고 있는 만큼 이를 기업이 지속 가능한 중장기 재무 이익을 창출하는 요소로 보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투자자들이 특히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은 자연과 관련된 공시제도의 도입으로 현재 TNFD(자연 관련 재무 공시 태스크포스)가 운영되고 있다. TNFD는 블랙록, 뱅크오브아메리카 등 금융기관과 기업 등이 참여하고 있는데 기후 관련 공시 프레임워크인 TCFD와 유사한 틀로 만들어지고 있다. 큰 틀에서 보면 자연 관련 지배구조, 전략, 위험관리, 측정 지표와 목표치를 공시하도록 하는 게 핵심 내용이다. 현재 일정대로라면 올 상반기 중에는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가 탄소 배출 등 지속 가능 공시 표준 확정안을 공표하고 오는 9월에는 TNFD도 최종안을 발표한다는 계획이다. 특히 ISSB는 TNFD와 협의해 기후 공시와 자연 생태계, 생물다양성 등 이슈를 연계하는 안에 대해서도 검토에 들어갔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생물다양성과 자연자본 얘기는 더 이상 기업 경영과 멀리 떨어져 있는 ʻ한가한 이슈ʼ가 아니다. 지구온난화를 억제하기 위해 각국이 파리기후협약에 서명했던 것처럼 생물다양성의 ʻ파리기후협약 버전ʼ을 만들려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다 돈 냄새에 민감한 투자자들이 생물다양성을 기업 가치에 리스크를 가져올 요인으로 보고 공시제도 도입과 함께 경영 관여 등을 통해 기업이 이를 관리해나가도록 제도화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ESG, 기후변화, 그리고 생물다양성에 대해 별도 또는 통합의 공시 표준안이 올해 안에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기업 ESG 경영에 있어 ʻ기후변화 다음은 생물다양성ʼ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 이유다. 생물다양성은 기업에 부담을 주는 것만은 아니다. 자연 친화적인 경영이 이뤄지면 2030년까지 매년 10조 달러의 새로운 기업 가치가 만들어질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젠 ʻ네이처 포지티브ʼ라는 새 물결에 탑승하지 않으면 기업이 생존하고 성장하기 어려운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전향적으로 움직여 새 길을 개척할지 아니면 기존 비즈니스 모델에 집착하다가 위기에 직면할지, 선택은 기업 몫이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