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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타 요시히로 박사
오가타 요시히로 박사 ogatayoshihiro@gmail.com
  • - 후쿠오카대학 인문학부 동아시아지역언어학과 준교수
    - 前 주한 일본대사관 전문조사원
  • 지난 7월 7일 치러진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현 지사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가 291만8015표(도쿄도 유권자 1129만229명)를 획득하며 3선에 성공했다. 2위를 차지한 이시마루 신지(石丸伸二, 165만8363표)와 3위의 렌호(蓮舫, 128만3262표)가 그 뒤를 이었다. 이번 도지사 선거는 56명의 후보가 난립한 선거였는데, 그만큼 현 지사에 대한 불만이 컸다는 뜻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렇다 할 대안이 없었다는 것을 선거 결과가 보여주는 듯하다. 도지사 선거 과정은 불명예스럽게도 한국에서 화제가 됐다. 후보자에게 주어지는 공식 선거활동으로 일본 공영방송 NHK가 방영하는 정견방송이 있는데, 여기서 한 여성 후보자가 이유도 없이 상의를 벗고 속옷 차림이 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던 것이다. 이 밖에도 어떤 정당이 기부를 조건으로 자신들의 선거 벽보용 게시판을 일반인이 이용할 수 있게 했고, 그것을 활용해 일반인들이 음란하거나 선거와 무관한 내용의 벽보를 붙이는 등 코미디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선거전 가운데 각 후보의 정책이나 공약은 크게 검증되지 못했고, 활발한 정책논쟁 또한 시도되지 않은 채, 딱히 이룬 것도 없지만 큰 실책도 없었던 현 지사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3선이 결정된 것이다. 나는 도쿄 도민이 아니기 때문에 투표권은 없지만, 과거사를 제대로 다루지 않고, 식민지 시기에 일어난 관동대지진 학살 피해 조선인들을 추모하는 것을 굳이 피하고 있는 고이케(2023년 9월 8일자 칼럼 “간토대지진 100년 …조선인 학살의 비극은 인권 문제” https://www.ajunews.com/view/20230907130407732 참조)의 낙선을 기대했었다. 역대 도쿄도지사가 그동안 보내던 추모문을 굳이 보내지 않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도쿄도가 조선인 학살의 사실을 경시 혹은 부정한다는 잘못된 메시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의연한 태도로 규범을 제시하는 것이 도쿄도지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최종적으로 3위에 그쳐 낙선한 야당 입헌민주당의 렌호는 대만인 2세 정치인이다. 현 지사인 고이케와 마찬가지로 원래는 연예 활동을 하며 널리 알려졌다가 국회의원으로 변신한 인물로, 외국에 뿌리를 둔 것이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적인 시선을 받아온 정치인이기도 하다. 그는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해 도쿄도가 추모문을 보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었다. 외국에 뿌리를 둔 그가 도쿄도지사가 됐더라면 다양성과 과거사 직시 측면에서 긍정적인 메시지를 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현 지사의 3선이라는 결과는 매우 유감스럽다. 그런 가운데, 낙선했지만 2위를 차지한 이시마루가 지금 주목받고 있다. 그는 지방의 작은 자치단체인 아키다카타(安芸高田)시의 시장 출신이다. 41세의 젊은 나이에 전국적으로는 무명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인이었던 그가 당초 현 지사 고이케의 3선을 막을 것으로 기대를 받던 야당 유력 후보 렌호를 제치고 2위를 차지한 것이다. 애초부터 주요 언론들도 그를 크게 거론하지는 않았다. 선거전 마지막까지 현 지사인 고이케냐 야당 후보 렌호냐 하는 구도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고이케 3선은 예측했다고 해도, 대항마로 여겨졌던 렌호가 3위로 가라앉고 무명에 가까웠던 이시마루가 2위를 차지한 것이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시마루가 도지사 선거에서 2위가 된 요인은 아키다카타시장 시절의 ‘활약’에 있었다. 그가 아키다카타 시의회에서 고참 의원, 즉 기득권층으로 보이는 의원들을 상대로 “부끄러운 줄 알아라!” 등 질책하는 모습이 담긴 짧은 동영상들이 SNS를 타고 퍼진 것이다. 도지사 선거 활동 중에도 그가 정책을 꼼꼼히 설명하는 모습보다는 구태의연한 정치인이나 정치 상황을 비판하는 당당한 모습을 담은 짧은 동영상이 확산됐다. 유튜브나 SNS를 활용해 자신의 임팩트 있는 이미지를 확산시키는 전략이 효과를 본 것이다. 비록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이시마루가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결과를 보여줄 수 있었던 이유는 기존 정치에 실망하고 혐오마저 느끼고 있던 중도파를 흡수할 수 있었다는 점과 애초부터 정치에 관심이 없던 젊은층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현재 개표 후 이시마루가 보인 일부 언론매체에 대한 대응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한 지상파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고압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어조로 대응하고, 질문에도 성실하게 대답하지 않으며 마치 가르치는 듯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SNS에서 짧은 동영상을 통해 퍼져나간 그의 모습은 매우 참신하고 통쾌했지만, 이른바 올드미디어를 통해서 전해진 그의 모습은 거만하고 상대를 우습게 여기는 듯한 독선적인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역시 금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적어도 도지사 선거에서 유권자에게 충분히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런 밈을 활용한 홍보는 요즘 대중의 인기를 얻고자 한다면 유용하고 당연한 선택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본래 정책에 따라 유권자의 대변인이 되어 정치를 하는 것이 대의제 민주주의의 정치인임을 감안한다면 역시 그의 언행은 마땅한가 하는 의문을 떨칠 수 없다. 한편, 그러한 기존의 정치나 정치인에 질린 유권자에게 참신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이다’ 정치인에 대한 기대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일본에서는 최근 몇 년 사이 ‘논파(論破)’라는 말이 유행하며, ‘논파왕’이라고 불리는 인물이 인터넷 세계나 지상파 방송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는 온라인 커뮤니티 ‘니찬네루(2ch)’를 만든 인물로 이름이 알려졌고, 솔직한 발언과 강경한 태도로 대응하며 상대를 ‘논파’하는 것으로 절대적인 인기를 자랑하는 ‘히로유키(본명 니시무라 히로유키)’다. ‘논파’란 결코 성실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대답하기 곤란한 상황으로 상대를 어떻게든 몰아가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 ‘논파’에 사이다 같은 시원함을 느낀다. 히로유키는 세간의 권위나 직함과 같은 것을 절대 눈치 보지 않고, 어디까지나 논리를 가지고 상대를 몰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반 대중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일부에서는 그러한 ‘논파’를 멋있게 여기고 높이 평가하는 풍조를 ‘히로유키 현상’으로 부르며, 이제는 일본 사회에서 신드롬 수준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로 뿌리내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이시마루가 얻은 인기 또한 그러한 ‘논파’ 문화가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시장 시절에 보여준 구태의연하면서도 권위적인 시의원들에게 주눅 들지 않고 질책을 퍼붓는 기개 있는 자세야 말로 ‘논파’하는 새 정치인의 모습이었다. 단순한 비교는 어렵지만, 한국에서 이준석 의원이 정치권에 처음 등장했을 때와 같은 임팩트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사실 이런 정치인의 등장은 일본에서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이제는 국정에서 어느 정도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일본유신회’라는 정당이 있다. 방송에 자주 출연해 파격적인 스타일로 논의를 주도하는 것으로 인기를 얻은 변호사 출신의 정치인 하시모토 도루(橋下徹)가 만든 정당이다. 하시모토가 지금은 정치인 은퇴 선언을 했지만, 그의 거침없는 발언은 여전히 인기가 높아 평론가로서 지상파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며 사회적 발언을 계속하고 있다. 하시모토는 과거에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전쟁 당시 군대에는 필요했다”, 오키나와 해병대 사령관에게 “(병사를 위해) 유흥업소를 잘 활용해주었으면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적이 있는 인물이다. 사람들에게 그는 금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아무도 말할 수 없는 것을 대변해주는 사이다 논객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사회학자 구라하시 고헤이(倉橋耕平)는 ‘논파’ 문화가 1990~2000년대에 걸쳐 일본 사회에서 대두한 역사수정주의와 맥락을 같이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원래 역사란 사료를 바탕으로 전문가가 논해온 역사적 사실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논파’ 문화에서는 전문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가짜 뉴스와 같은 언설이라도 그것이 사실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 사실처럼 격상됨으로써 오랜 세월 축적되어온 연구성과조차 부정될 수 있는 것이다. ‘논파’ 문화는 사실이나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상대방에게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몰아가는 것이 ‘승리’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즉, ‘논파’ 문화에서 토론이란 새로운 뭔가를 낳기 위한 논의가 아니라, 단순히 승패를 결정하기 위한 게임과 같은 것이 되어버린다. 구라하시는 이렇게도 지적한다. “토론 자리에서 복잡한 현실이나 모를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꼼꼼하게 논하게 되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는 사람’으로 보이고 만다. 그래도 역사의 탐구에서는,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의 한계나 이항대립적인 논의가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수정주의자가 논의를 단순화시키는 것은 역사 탐구가 주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에게 불편한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목적을 위해 논하기 때문에 단 하나의 시각에서 모든 것을 논하는 단순화가 가능한 것이다. 유감스럽지만 논파를 목적으로 하는 상대와는 성실한 논의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모습은 역사인식 문제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논파’ 문화는 티비나 SNS와 같이 제한된 시간이나 글자 수 안에서 이기는 것처럼 보이는 기법으로 시대에 부합했다고 볼 수 있다. 인터넷상에서 짧게 “잘려져” 확산되는 이른바 짤들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고, 요즘 시대에는 성실하게 임한다고 해도 결국 흑백이 분명하지 않은 논의 방법에는 아무도 귀를 기울여주지 않는다. 그러한 가운데 “잘려진” 짤에 적합한, 승패가 확실히 갈라지는 논의가 대중 사이에서 선호되는 것이다. 최근 약 20년 사이에 정착한 일본어 중 ‘가치구미(勝ち組, 승자들의 팀)’과 ‘마케구미(負け組, 패배자들의 팀)’이라는 표현이 있다. 일본 경제 침체가 계속되는 가운데 일본 사회는 사람들을 ‘가치구미’와 ‘마케구미’로 나누어 보게 됐다. 어떻게 자신을 ‘가치구미’로 만들어 성공한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 ‘마케구미’가 되지 않기 위해 어떻게 요령 있게 잘 살아갈 것인가 하는 생각이 사람들의 가치관에 뿌리내리게 되었다. 그러한 이분법적인 사고는 무관용이라는 폐해를 낳았고, 일본 사회를 숨막히게 만들고 있는 요인 중 하나이다. 고(故) 아베 신조(安倍晋三)는 과거 가두연설 때 자신에게 야유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런 이들에게 질 수는 없다”라고 외쳤다. 한 국가의 수상(총리)이 자신을 비판했다고 해서 일반 시민을 “이런 이들”이라고 부르며, 적대적인 태도를 드러낸 것이다. 이번 도쿄도지사 선거에서도 응원연설에 나선 자민당의 고노 다로(河野太郞) 디지털 담당 대신(장관) 또한 야유를 퍼부은 청중에게 “이런 패거리를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발언해 물의를 빚었다. 고노 역시 금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직언하는 스타일로 인기를 얻고 있는 인물인데, 차기 총리 후보로 자주 거론되는 정치인이다. 그런데 이러한 발언을 한다는 것은 국민주권의 민주주의를 경시한다고 비판을 받아도 어쩔 수 없는 행동이다. 자신의 편이 아니면 ‘적’으로 간주해 논의나 대화의 여지를 포기할 뿐만 아니라 거부까지 하는 이분법적 사고는 감정에 호소할 뿐이다. ‘반지성주의’라고도 볼 수 있는 이러한 ‘논파’ 문화는 후퇴하는 일본 사회가 자신감을 잃고 내향적 성향을 지니면서 안게 된 새로운 사회적 병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베 정권 무렵에 자주 듣게 된 이상한 일본어로 자국민을 향해 말하는 ‘반일’이라는 단어가 있다. 아베 정권을 비판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일본인이더라도 ‘반일’이라고 조롱을 받고 매도당했다. 과거 한국이나 중국이 일본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일 때 일본 사회가 폄하했던 표현이 ‘반일’이라는 말이었는데, 그 ‘반일’이라는 말이 자국민을 향해 쓰이게 된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논리도 제대로 된 토론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순히 ‘적’을 깎아내리기 위한 목적만 있을 뿐이다. 한·일 간에는 역사인식을 둘러싸고 다양한 문제가 존재하고, 특히 ‘위안부’와 강제노동을 둘러싼 문제는 인권문제로 주목받고 있다. 피해자가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접근하기 쉬운 주제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분법적 사고방식과 접근법으로 다가가면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날 위험성이 높고, 역사수정주의의 주장을 조장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려는 자세는 ‘반일’이 아니다. 반대로, 감정에 호소해 내셔널리즘을 부추기는 방법으로만 역사를 바라보는 것 역시 본질에 도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필요없는 ‘적’을 만들어 무관용을 부르게 되고, 이는 문제 해결을 늦추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일본의 ‘논파’ 문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동시에, 인터넷을 통한 정보 확산이 큰 영향력을 가지는 요즘 시대이기에 ‘반지성주의’의 위험성은 일본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그 간극을 이용하는 정치인도 등장한다. 자신과 대립하는 정치세력을 깎아내리는 것 자체가 목표인 것처럼 보이는 주장이나, 그에 실망해 정치 불신에 빠지는 많은 시민들은 ‘논파’ 문화에 농락당하고 있다. ‘반지성주의’를 환영하고 그것을 활용해 이득을 보는 사람은 누구인지 냉철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필자 주요이력 △후쿠오카대학 인문학부 동아시아지역언어학과 준교수 △연세대 정치학박사 △전 홍익대 조교수 △전 주한 일본대사관 전문조사원

  • 요즘 일본 뉴스에서 자주 거론되는 이슈 중 하나가 ‘퇴직 대행’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싶은데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대행업체가 돈을 받고 대신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퇴직 처리를 도와주는 일이다. 대인관계 문제 등 정신적인 이유로 회사를 그만두려고 해도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 단순히 ‘말하기 어렵다’는 이유 하나로 퇴직 대행을 의뢰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 놀랍다. 특히 신입사원이 자신이 기대했던 업무가 아니라거나 원하지 않는 부서에 배정되었다는 이유 등으로 입사 후 며칠 또는 몇 주 만에 퇴직 대행을 이용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뉴스가 일본에서 크게 다루어지는 것은 직장생활, 특히 대학생의 취직이 가지는 의미나 일본의 취업 문화가 한국과는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우선, 4월에 학기가 시작되는 일본은 3월에 대학교를 졸업한 전국의 젊은이들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취직해 대부분 4월 1일에 처음 출근한다. 대기업들은 첫날, 대학교 입학식처럼 큰 강당에 신입사원을 모아 놓고 ‘입사식’이라는 행사를 진행하고, 사장님 훈시와 입사 발령이 이어진다. 병역의무가 없는 일본에서는 대학생들이 일반적으로 휴학을 하지 않고 입학부터 졸업, 그리고 취업까지 모두가 같은 스케줄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입사가 일제히 이뤄지다 보니 대학생들의 취업 활동도 일제히 이뤄진다. 이때 조금이라도 경쟁사보다 빨리 움직여 좋은 인재를 확보하려는 기업들이 생기는데, 대학생이 학업에 전념할 수 없다는 우려로 게이단렌(일본경제단체연합회)이 채용홍보 활동은 3월 1일부터, 채용전형은 6월 1일부터, 그리고 채용내정은 10월 1일부터 가능하도록 회원사에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룰이고, 실제로는 채용내정이 풀리는 10월에는 내정식이 행해진다. 따라서 채용전형이 풀리는 6월에는 이미 내정자가 나와 최종적인 전형이 마무리된다. 따라서 채용을 위한 공식 홍보활동은 3월이지만 이전에 ‘설명회’나 ‘인턴십’ 등 명목으로 이미 많은 기업에서 채용활동을 시작한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일본 대학생들은 3학년 여름이 오기 전에 여름방학 중 가능한 인턴십을 찾으면서 취업활동을 시작하고, 가을에는 기업설명회 등을 다니면서 지원할 회사를 좁혀간다. 4학년 초봄에는 정식은 아니지만 암묵적인 내정이 서서히 이루어지고, 여름 전에 한 군데 정도는 입사 내정이 정해지지 않으면 상당히 불안한 상황이 된다. 빠른 학생은 3학년 때 입사할 곳이 이미 정해진 경우도 있다. 미리 입사가 결정된 학생은 무사히 졸업만 하면 되기 때문에 졸업 논문 외에는 신경 쓸 일이 없다. 그래서 학생 시절 마지막 시간을 만끽하기 위해 다음 해 4월 입사까지 동아리 활동에 복귀해 스포츠 등 취미활동에 힘쓰거나, 여행을 가거나, 영어 공부를 하거나, 간혹 졸업하지 못해 내정이 취소되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학점을 챙기려고 하거나, 각자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일본의 취업 사정은 대학 성적에서도 한국과 크게 다르다. 한국에서는 학점이 매우 중요한 반면 일본에서는 학점은 크게 영향이 없다. 앞서 말했듯이 취업활동은 3학년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학점을 확인하려고 해도 2학년까지밖에 제시할 수 없다. 물론 기업마다 선발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일본에서 학점은 어디까지나 판단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그래서 취업을 위해 학점에 목숨을 거는 학생은 일본에서 보기 드물다. 대학 성적뿐만이 아니다. 일본에서 취업할 때는 서류상 ‘스펙’이나 출신 대학이 한국만큼 중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일본 기업은 어떤 기준으로 채용을 할까? 예전에 내가 한국 대학에 있을 때 일본 기업에 취직하려는 학생을 지도한 적이 있어 기업의 채용 담당자들에게 상담과 조언을 받은 적이 있는데, 자주 들은 채용 기준은 ‘느낌 또는 직감’이었다. 어느 기업이나 면접을 중요시하고 있어 실제로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받은 ‘느낌’이 합격 여부 판단에 큰 근거가 된다고 한다. 학생을 지도하는 내 입장에서는 그런 무책임한 기준이 어디 있나 싶었지만 사실 기업이 보기에는 합리적인 기준이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어쩌면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동료를 채용하는 것인데 좋은 관계를 맺기 힘들 것 같은 인물이라면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일에 지장이 생길 수밖에 없다. 나도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졸업할 무렵 취업활동을 경험했는데 지원한 기업마다 모두 면접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적은 곳은 세 번, 많은 곳은 다섯 번 면접을 봤다. 일선에서 일하는 실무자 면접, 그룹 면접, 각 부문 관리직급 면접, 인사부 면접, 임원 면접, 이런 식이다. 어떤 곳은 입사 내정을 받은 후에 대학 성적증명서를 제출하라고 할 정도로 학점은 졸업 여건이 잘 갖춰져 있는지 확인하는 의미 정도였다. 나는 대학 성적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나름 괜찮은 곳에 취업했고, 떨어진 기업에서도 학점에 대해서 문제시하거나 그것 때문에 불리했던 적은 없다. 한국 대학은 성적이 취업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상대평가가 기본인 반면 일본 대학은 대부분 과목에서 교원이 설정한 목표에 도달했는지 여부만으로 성적을 평가하는 절대평가가 기본이다. 대학의 입장에서는 의무교육도 아닌 고등교육기관에서 한정적인 수의 학생들 중 우열을 가리는 공부가 얼마나 의미 있느냐는 것이고, 기업 등 인재를 필요로 하는 입장에서는 대학에서 배울 수 있는 전문성이란 회사에서 쓸 수 있는 능력과는 별개로 생각해 입사 후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지 가능성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학 성적이 한국처럼 까다롭게 여겨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에서는 일반 기업에 지원할 때 대학원 출신의 고학력자는 반대로 취업에 불리한 경우도 적지 않다. 어중간하게 전문성을 가진 인재보다 흡수력을 갖춘 잠재능력이 뛰어난 학부 졸업자가 선호되는 것이다. 일본에서 ‘고학력 푸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신입사원을 뽑을 때 개인의 능력보다 잠재능력을 중요시하는 만큼 일본 기업들은 입사 후 교육에 공을 들인다. 대기업의 경우 경력에 맞는 교육 프로그램을 준비해 신입사원의 경우 처음 3년 정도는 연수기간처럼 생각하고, 그럴 여력이 없는 기업이라도 입사 후 3년 정도는 OJT(On the Job Training)를 통해 제 몫을 하는 인재로 키우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한 회사에서 최소 3년은 근무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실전에 바로 투입할 수 있는 고스펙의 능력자인지를 판별하려는 한국 기업과 채용 후 장기적인 교육을 전제로 잠재능력을 판별하려는 일본 기업의 문화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일본 기업 문화의 근저에는 바로 ‘일본식 경영’이 자리하고 있다. 일본식 경영이란 연공서열임금제와 종신고용제 등 일본 기업의 특징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일본 기업은 장기적인 안목으로 채용한 인재에게 큰 투자를 하고 키워나가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초봉은 다소 낮게 책정되어 있어도 그만큼 교육이라는 형태로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 인재가 성장해 장기적으로 기업에 이익을 가져다주므로 연령에 따라 급여가 올라가고, 연령이 낮으면 아직 공헌도는 낮다고 여겨져 급여가 억제된다. 그러나 그것도 초기 투자를 한 만큼 회수가 가능하다는 전제가 있어야 성립되기에 직원들은 정년까지 한 기업에 근무하는 것을 전제로 조직에 충성을 맹세하고, 기업도 직원을 가족처럼 맞이한다. 폐해도 있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급여가 오르니 승진이나 근로 의욕이 떨어진다거나, 큰 일은 맡지 않으면서 높은 급여를 받으며 정년까지 눌러앉는 직원이 생긴다. 이들을 ‘창가족’이라고 하는데, 햇볕이 잘 드는 창가 구석 자리만 차지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높은 급여만 받는 사람들을 말한다. 의욕이 있는 젊은 직원이 봤을 때 중요한 일은 모두 자신이 하고 있는데 창가족이 높은 급여를 받는다면 정말 불합리하게 느낄 것이다. 그래서 연공서열에 막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일본식 경영과는 다르게 일한 만큼 평가받는 외국계 기업에서 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편 한국에서 ‘저녁이 있는 삶’이 주목받고 있는 것처럼 일본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무한 경쟁을 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일본식 경영이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내가 홍익대학교에 있을 때, 2015년쯤부터 2022년까지 일본 기업에 취직하고 싶어하는 학생들을 지도한 적이 있다. 지금도 나와 연락을 이어오고 있는 졸업생 10여 명은 취업에 성공해 도쿄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중에는 이직을 해서 일본 기업 몇 군데를 경험한 졸업생도 있고, 일본에 있는 외국계 기업에 근무하며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를 상대로 활약하는 졸업생도 있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일본 기업부터 이름이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건실한 기업에 이르기까지 다들 다양한 기업에서 일하며 만족스러운 일본 생활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한국에서 취업하려면 스펙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한국 대학생들은 스펙을 쌓기 위해 대학 시절을 불태우지만, 노력만으로는 바꾸기 힘든 스펙 중 하나가 학벌이다. 예를 들어 대학 입시에 실패한 학생이 대학 4년간 열심히 노력해서 온갖 스펙을 쌓아도 대학 간판이나 출신 학부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인턴십이나 취업 면접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면 이것보다 더 억울한 일은 없을 것이다. 혹은 경제적인 이유로 유학이나 외국 경험 등 스펙을 쌓지 못해 좌절감을 느끼는 학생도 적지 않다. 이런 가운데 다양한 형태로 도전해볼 수 있는 일본 취업은 한국 학생들에게 하나의 대안이 되고 있다. 자칫 낡고 시대에 뒤떨어진 문화로 느껴지는 일본식 경영과 같은 기업 문화가 오히려 한국 학생들에게는 일본 기업에 취업하는 장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대기업 지향이 강한 한국에서 중소기업에 취직한다는 것은 실패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일본에 취직하게 된다면 중소기업이어도 외국계 기업이다. 누구나 아는, 남들에게 내세울 만한 회사가 아닌 자신만의 기준으로 기업을 고를 수 있다. 게다가 일본에는 대기업만큼의 대우를 받는 유명 중소기업도 많다. 교육을 중요시하는 일본 기업에서 3년 이상 일하면 그만큼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 있고,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으로서 매너와 경험, 그리고 나름의 일하는 스킬이 충분히 몸에 밸 수 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인데, 한국 기업은 과감하게 일을 진행하는 순발력이 있지만 개인의 능력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반면 일본 기업은 조직으로 일하기 때문에 누가 담당자가 되더라도 일이 제대로 돌아가도록 체계적으로 일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개인의 능력을 갖춘 한국의 인재가 일본 기업에서 일을 배움으로써 양쪽의 좋은 점을 익히고 발전시킨다면 활약할 수 있는 가능성과 무대는 더 커질 것이다. 물론 일본 사회나 기업, 경제가 ‘잃어버린 30년’이라고 불리며 많이 침체되어 있다는 염려도 존재한다. 일본은 오랫동안 평균임금이 오르지 않아 경제 발전에 있어 한국에 추월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과거 많은 일본 사람들이 “싸니까”라며 한국 관광을 선택했다면 이제는 “싸니까”라며 일본 여행을 오는 한국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제 일본 기업도 일본식 경영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일본 기업에서 일하는 졸업생들에게 “한국으로 돌아갈 거야”라고 물으면 “아직은 일본에서 해보고 싶다”고 말한다. 일본에 취직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한국의 친구나 가족, 음식이 그리운가”라고 말하며 금방이라도 돌아갈 것 같던 졸업생은 어느새 7년이나 일본에서 일하고 있다. 거기에는 분명 일본 기업이 가진 장점 등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모든 일에 ‘동조’를 요구하는 한국이나 일본 사회에서 외국인으로 사는 편안함도 분명 있을 것이고, ‘헬조선’이라는 탄식까지 들었던 한국으로 돌아가려면 큰 각오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필자 주요이력 △후쿠오카대학 인문학부 동아시아지역언어학과 준교수 △연세대 정치학박사 △전 홍익대 조교수 △전 주한 일본대사관 전문조사원

  • 한국의 출생률이 0.72까지 떨어졌다는 소식은 일본에서도 크게 보도됐다. 그런데 저출산 문제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을 포함한 세계 선진국들의 공통적인 문제다. 일본의 출생률은 1.26으로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인구를 유지할 수 있는 최저 수준이라는 2.1에 턱없이 못 미치는 상황이고 개선될 기미 또한 보이지 않는다. 그런 일본에서는 최근 ‘소멸 가능성’이 있는 지자체가 일본 전국 지자체 1729곳 중 744곳으로 전체의 40% 이상에 이른다는 이야기가 화제다. 민간단체인 ‘인구전략회의’가 2020년부터 2050년까지 30년간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중심 연령대인 20~39세 여성들이 절반 이하로 줄어드는 지자체를 ‘소멸 가능성’이 있는 지자체로 분류한 통계 분석결과다. 10년 전인 2014년에도 동일한 분석을 실시했는데, 그때 ‘소멸 가능성’ 지자체가 896곳이었기 때문에 다소 개선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소멸’이라는 강렬한 용어가 주는 충격과 함께 역시 실감되는 위기감 때문인지 일본의 저출산 문제 대책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한때 저출산 문제를 여성만의 문제인 것처럼 인식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경제적으로 정체되는 일본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내건 슬로건의 하나로 '모든 여성이 빛나는 사회 만들기'라는 것이 있는데, 여성이 집안일이나 육아에 얽매이지 않고 사회 진출에 나설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자는 것이다. 얼핏 여성의 지위 향상을 지향하는 듯한 슬로건으로 보이지만 '여성이 빛난다'는 말에 위화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았다. 일본 사회가 정체되어 있는 것은 여성이 빛나지 않았기 때문인가, 만약 그렇다고 해도 여성이 빛나지 못하게 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애초에 여성이 빛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때 일본에서 유행한 말로 ‘이쿠맨(イクメン)’이라는 것도 있다. ‘이쿠지(육아)를 하는 남자(men)’라는 뜻이다. TV 등에서 어린 자녀를 둔 남자 연예인을 ‘이쿠맨’이라고 소개하는 등 육아에 활발하게 참여하는 남성을 칭찬할 때 자주 쓰였다. 나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 주위 사람들에게 자주 '육아를 잘 도와줘라'는 격려(?)의 말을 들었다. '도와준다'는 말에 나는 강한 위화감을 느꼈는데, 돌이켜보니 그때 그런 말을 자주 들었던 것은 당시 ‘이쿠맨’이 인기를 끌었던 일본 사회의 분위기가 잘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 참고로 한국에도 ‘육아빠’라는 말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 말을 실제로 쓰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또한 일본에서 자주 쓰이는 말로 ‘원 오페(ワンオペ)’라는 게 있다. ‘원맨 오퍼레이션(혼자 하는 작업)’이라는 뜻이다. 원래는 혼자서는 도저히 하지 못할 일들을 짊어져야 하는 가혹한 상황을 말하는 것인데 ‘원 오페 육아’라는 식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전업주부의 육아도 ‘원 오페’의 연속이지만 일하는 엄마가 되면 그 가혹함이 가중된다. 그런데 ‘원 오페 육아’ 문제는 여성에게만 일어나는 일처럼 여겨져서 남성에게는 이 말이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다만, 여성의 사회 진출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일본이나 한국이나 도토리 키재기며, 어느 쪽이 더 나은지를 겨루어봤자 의미가 없다. 남성의 육아휴직 취득률 등을 봐도 일본이나 한국이나 너무 낮아서 아직 갈 길이 멀고,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좌우하는 정책 결정 과정에 여성의 목소리가 충분히 반영되기 어려운 상황은 일본과 한국이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로 2023년 세계 젠더갭 지수 순위를 살펴보면 한국(105위)보다 일본 순위(125위)가 낮다. 아직 일부지만 한국에서 도입된 국회의원 선거의 여성 후보 쿼터제는 일본에 아직 도입되지 않았고, 여성 국회의원 비율도 일본(10.3%, 세계 164위)보다 한국(19.1%, 세계 120위)이 높다(2023년 1월 기준). 그러나 젠더를 둘러싼 문제가 한·일 모두에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고, 그것이 저출산 문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저출산 문제는 물론 여성만의 문제도 아니고 젠더를 둘러싼 문제만도 아니다.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저출산의 근본적인 원인은 젊은이들 삶의 고단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알다시피 한국 사회의 이런 상황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88만원 세대, ‘헬조선’ ‘수저계급론’ ‘N포 세대’와 같은 말들은 개인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제적 격차 문제나 젊은이들의 취업·생계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그 절망감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한국 대학에서 12년간 학생을 가르치며 가까이에서 지켜본 나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사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너무나 치열한 경쟁에 내몰려 있는 그들을 보고 있으면 안쓰러운 마음이 컸다. 학교 성적이 취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학생들은 성적에 매우 민감했다. 집에서 그냥 푹 자고 쉬면 나을 것 같은 몸살이나 감기 정도에도 굳이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갖고 오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러지 않으면 다른 학생과 성적 차이가 날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여학생이 생리통 진단서를 제출했을 때는 사실 놀랐다. 학생들은 그런 것을 하나하나 증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나는 출결이나 몇 분 지각만으로 성적이 결정되는 수업이 과연 대학의 수업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출결만으로 점수 차이가 날 것 같은 성적평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학생들은 출결 하나에도 필사적이었다. 나는 무엇을 위한 대학 공부일까 하는 회의감을 느낀 적이 적지 않다. 본래 공부하기 위해서 다니는 학교를 ‘공부하기 위해’ 휴학한다는 학생들도 있었다. 취업을 위해서는 대학 성적에 더해 ‘스펙’이 있어야 하니 대학 공부는 제쳐두고 학원을 다니며 우선 스펙을 쌓겠다는 것이다. 대학이 취업에 관련된 공부를 제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저 ‘대졸’이라는 자격증을 발급하는 기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취업을 위해 좋은 성적을 받으려면 일분일초의 지각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지만 한편 만족스러운 취업이 결정되면 당당하게 '취업이 결정돼 출근해야 하기 때문에 수업에 출석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말이다. 취업이 결정됐으니 당연히 졸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회 분위기가 학생들을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좋은 곳에 취업하기 위해서는 좋은 대학에 가야 하고,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좋은 고등학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격해지는 입시경쟁 완화를 위해 도입된 고교 평준화 정책은 결과적으로 경제 격차와 교육 격차를 발생시켜 외고나 자율고와 같은 특목고, 심지어 일부 대안학교까지 단순한 엘리트 고등학교로 만들어버린 것 같다. 수능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가혹한 입시제도에 다양성을 가져오려고 한 수시전형과 같은 선택지 또한 경제 격차에 따른 불공평감을 낳고 있다. 젊은이들을 둘러싼 환경은 점점 더 치열한 경쟁 속으로 그들을 등 떠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2년 전 19년간의 한국 생활을 접고 일본에 돌아왔다. 일본에 살면서 감동을 느낀 일상의 풍경이 있다. 다름 아닌 동네 공원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이다.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는 아이들이 평일 오후에 공원에서 축구나 캐치볼을 하면서 뛰어노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교복을 입은 아이들도 집에 가는 길에 공원 벤치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학원에 쫓기지 않는 아이들의 일상이 여기에는 아직 존재하는 것이다. 일본 사회에서도 ‘입시전쟁’이라고 불리는 가열된 대학교 입시가 논쟁거리가 됐던 때가 있었다. 최근에는 도쿄를 중심으로 중·고등학교 입시가 과열되고 있다는 보도를 자주 접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한국과 비교할 만한 정도는 아니다. 일본에서는 아직 그 경쟁을 못 본 체하겠다는 선택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입시경쟁의 가열은 어디까지나 일부며, 적어도 거기에 휘말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자유가 남아 있다. 일본 학교에는 ‘부카쓰(부활동)’라는 일종의 동아리 활동 문화가 있다. 방과 후나 휴일을 이용해서 자발적으로 교내에서 활동한다.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자신이 좋아하는 ‘부’에 들어가 활동하는 것이 지극히 전형적인 중·고등학생의 모습이다. 정규 교육과정이 아니어서 학교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가 있고, 부에 소속되지 않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부활동을 하지 않고 집에 가는 이들을 ‘귀가부’라고 따로 부르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어느 한 부에 소속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분위기다. 나도 중·고등학생 시절 축구부에 속해 연말연시나 여름방학 중 며칠을 제외하고는 매일 부활동을 하며 지냈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에 있는 마지막 대회가 끝나면서 ‘은퇴’할 때까지 거의 매일 아침에 등교하면 먼저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아침 훈련을 하고, 오후 수업이 끝나면 바로 운동장으로 나가 역시 부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이 내 중·고등학교 시절 일상이었다. 나를 비롯한 축구부 학생들 누구도 프로 축구선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프로를 목표로 하고 있지 않았지만 이러한 부활동은 학창 시절의 일상이었다. 학교에 따라 다르지만 부활동에는 여러 종목이 있다. 축구, 야구, 육상 같은 메이저 스포츠는 대부분의 학교에 있고, 지도할 수 있는 교사만 있으면 유도나 검도, 가라테 같은 무도(武道)도 있다. 취주악부나 미술부, 연극부, 사진부, 화도부 등 문화계 부활동도 있다. 학생이 하고 싶은 활동이 있으면 학생 몇 명을 모아 고문이 되어줄 교사에게 부탁해 부를 만들 수도 있다. 문부과학성(교육부)이 정하는 학습지도요령에는 '학생의 자주적·자발적인 참가에 의해 이루어지는 부활동에 대해서는 스포츠나 문화, 과학 등에 친숙하게 하고, 학습 의욕의 향상이나 책임감, 연대감의 함양 등 학교 교육이 목표로 하는 자질·능력의 육성에 이바지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어 일반적으로도 부활동은 교육적인 의미가 있고, 학생들의 성장에 있어 중요한 활동으로 인식되고 있다. 물론 동질성이 높은 부라는 집단 속에서 일어나는 집단 괴롭힘이나 왜곡된 가치관 형성과 같은 폐해의 가능성도 존재한다. 또한 일본의 중·고등학교 교사들에게는 그러한 부활동의 고문을 맡으면 과도한 시간 외 노동이 강요된다는 큰 문제도 있기 때문에 일본의 ‘부활동’ 문화가 무조건 좋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직 미래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중·고등학생 시절부터 극소수의 예외를 두고 일률적으로 공부에만 몰두하게 만드는 한국의 교육 환경이 건전하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한편 ‘잃어버린 30년’이라고 하는 일본 경제 정체를 경험해 온 일본의 ‘사토리(さとり) 세대’는 한국의 ‘N포 세대’와 자주 비교된다. ‘사토리 세대’는 사회의 모든 일에 대해 달관(사토리)하고 물욕도 출세욕도 없으며, 직장 생활이나 무엇보다 자신만의 생활이 중요해 연애나 결혼, 출산에도 관심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사토리 세대’를 낳은 일본의 경제 침체를 반면교사로 삼아 한국 사회가 꾸준한 경제 발전만 추구한다면 결국 혹독한 경쟁에 내몰리는 것은 젊은 세대일 것이다. 한국 정부는 그동안 상당한 예산을 들여 저출산 대책에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저출산 1위 국가라는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구 감소와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젊은 세대가 자신의 삶에서 포기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거나 꿈을 가지기보다 ‘현실적으로’ 살아야 하겠다는 식으로 달관하지 않아도 될 사회가 마련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아이가 아이답게,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이 필요하다. 필자 주요이력 △후쿠오카대학 인문학부 동아시아지역언어학과 준교수 △연세대 정치학박사 △전 홍익대 조교수 △전 주한 일본대사관 전문조사원

  • 한국은 총선을 앞두고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유권자들의 대표를 뽑는 선거다. 한국과 일본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이웃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의 선거를 둘러싼 상황은 참으로 다르다. 한국에서는 국정선거의 투표일이 수요일로 정해져 있어 공휴일이 되지만 일본의 국정선거는 관례적으로 일요일을 투표일로 하고 있다. 한국에 유학하고 그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나는 투표를 위해 학교나 직장이 쉰다는 것, 바로 투표하는 행위가 거국적인 이벤트라는 사실에 놀라웠다. 투표일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 알 수 있었다. 물론 굳이 공휴일로 만들어도 사전투표를 마치고 투표 당일은 단순한 휴일로만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 내 주변에는 모처럼의 일요일에 투표소에 간다는 게 생각하기도 싫다고 말하는 친구도 있고, 원래 투표일인 것을 깨닫지 못한 채 보통의 일요일처럼 하루를 보내 버리는 이들도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보면 투표일을 특별한 날로 인식시킨다는 면에서 한국처럼 평일의 투표일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것은 나쁘지 않은 제도로 생각된다. 투표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 일본 선거에서는 투표를 할 때 지지하는 입후보자 이름이나 정당명을 자필로 투표용지에 써야 한다. 한국에서는 도장만 찍는 것과 큰 차이다. 과거 일본에서는 자필 투표 때문에 생긴 해프닝도 있었다. 2021년 국회 중의원 선거에서 한 선거구에 동명이인이 입후보했는데, 입헌민주당에서 출마한 가메이 아키코(亀井亜希子)와 무소속인 가메이 아키코(亀井彰子)다. 한자 표기는 다르지만 히라가나(발음)로는 표기가 동일하기 때문에 어느 쪽 득표인지 판단이 어려운 투표용지가 속출할 우려가 발생했다. 이때 양자의 기타 득표율에 따라 모호한 투표를 분배하기로 되어 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명확하게 누구에게 투표한 것인지 알 수만 있다면 후보자에 대해 한자 표기든 히라가나 표기든 혹은 성씨만 표기하든 상관없다. 단, 해석이 불가한 표기나 불필요한 말이 적힌 투표용지는 어느 후보자의 득표도 되지 않아 무효표가 된다. 자필 투표라는 제도는 결과적으로 투표소에 갈 수 없는 사람은 물론 신체상 이유로 글자를 쓰지 못하거나 쓰기 어려운 이들에게 권리행사의 문턱을 높이고 만다. 한국처럼 투표했다는 표시로 도장을 보여주는 ‘인증샷’도 불가능하다. 원래 한·일의 정치제도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한국은 대통령제인 반면 일본은 의원내각제다. 그런 것쯤은 상식으로 누구나 알고 있다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막상 한국의 여론을 보면 일본 총리가 교체되면 일본의 방향성이 크게 바뀔 것이라고 지나치게 기대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물론 지난 아베 정권과 같은 장기집권 후의 총리 교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고, 사실 아베 정권 이전과 아베 정권 이후의 일본 정치가 크게 다르다는 분석도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한국에서 대통령이 교체되는 것과 같은 극적인 변화가 일본의 총리 교체에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구조다. 의원내각제에서 총리(내각총리대신)는 국민이 직접 뽑는 것이 아니다. 이름 그대로 내각을 대표하는 대신(장관)에 불과한 것으로, 국회의 지명에 의해 그 자리를 맡는다. 그리고 총리에 의해 조직되는 내각은 국회에 대해서 책임을 지게 되어 있다. 물론 국회를 구성하는 국회의원은 국민의 직접 투표로 선출되는 '국권 최고기관'이므로 그 국회가 뽑은 총리가 국민을 대표한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다만, 역시 유권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권리행사로 대통령을 직접 뽑는 한국과 그렇지 않은 일본의 차이는 클 수밖에 없다. 한편 한국 대통령은 비교적 여론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국정 운영에 임할 수 있다. 현행 제도상 대통령의 탄핵과 같은 일이 없는 한 임기 5년을 보장받는다. 아무리 여론의 뭇매를 맞는 정책을 추진하더라도 대통령이 그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을 테니 과감한 개혁도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 총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애초에 총리직은 법적으로 임기가 정해져 있지 않다. 중의원이 해산되고 새롭게 중의원의 구성원(의원)이 정해져 국회가 소집되면 새로운 총리로 교체할지 혹은 지금의 총리 체제로 갈지 결정된다. 국회의 다수결로 총리가 결정되기 때문에 여당 대표가 총리가 되는 것이 통상적이다. 즉, 유권자는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를 통해 총리를 간접적으로 뽑는 셈이지만 유권자가 그것을 실감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일본 국회는 양원제로 중의원과 참의원이 있다. 중의원 의원은 265명이고 임기가 4년이지만 여론의 심판을 받아야 할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해산되고 재선거를 치러야 한다. 한편 참의원 의원은 248명이고 임기가 6년이며 해산이 없다. 그 절반은 3년마다 선거를 통해 바뀐다. 중의원이 심의한 법안에 대해 해산이 없는 안정적인 참의원이 체크하도록 되어 있어 신중한 법안 심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 제도다. 눈앞의 이해관계뿐만 아니라 장기적인 시야를 가진 국회 심의를 가능하게 한다는 취지다. 다만, 중의원은 언제든지 해산될 가능성이 있어 언제 유권자의 심판을 받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총리의 입장이라는 것도 사실 불안정하며, 한국 대통령제에 비해 일본 의원내각제는 여론의 동향이 반영되기 쉬운 제도라고 할 수 있다. 2000년대 후반에는 거의 1년에 1명꼴로 총리가 교체됐고, 거슬러 올라가면 2개월 만에 퇴임한 총리도 있었다. 물론 제도상 문제만이 아니라 정치가의 자질 문제나 자유민주당(자민당)의 장기집권으로 정권교체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에 따른 폐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일본에서도 장기집권을 자랑한 총리가 바로 아베 신조였다.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이 이루어졌을 무렵 일본에서는 ‘모리카케 문제’가 큰 화제였다. 학교법인 모리토모(森友)학원이 2016년 국유지를 파격적인 가격에 매입했고, 그 과정에 아베 총리 부부가 관여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또 아베 총리와 사적으로 친한 관계였던 가케(加計)학원 그룹이 관련 대학에 신설 학부를 설치하는 데 부당한 우대를 받은 혐의도 비슷한 시기에 주목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의혹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한국의 최순실 게이트에 버금가는 대스캔들이었다. ‘모리카케 문제’는 국회에서 오랜 시간 논의되었고, 문서 조작이나 정보 은폐가 의심되는 정황까지 밝혀졌다. 의혹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실무직 공무원이 자살로 내몰리는 상황까지도 벌어졌다. 그럼에도 일본에서는 결국 정권교체가 일어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의혹에 대해 여론은 거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거나 적어도 의문에 대해 결백이 증명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그 스캔들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 것 같다. 결국 진상은 밝혀지지 않은 채 당시 아베 정권은 연명했을 뿐 아니라 이후 2020년까지 집권하며 장기집권 기록을 경신했다. 아베 정권은 2019년에도 ‘벚꽃 스캔들’이라고 불리는, 역시 자신의 지지자를 위해서 공금을 유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많은 비판을 받았다. 또한 그 당시부터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자민당 내 정치자금 유용 문제는 2024년 현재 큰 문제가 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 2017년에 있었던 정치비리 의혹만큼이나 유권자의 불신을 키우는 사건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정권교체가 일어나지 않으니 정말 신기할 따름이지만, 일본 내에서는 그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의원내각제가 나라의 지도자를 직접 뽑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영향을 끼칠 수 있지만, 투표를 해서 무엇이 달라질까 하는 무력감이 일본 사회에 만연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젊은이들의 정치적 무관심이나 저조한 투표율 등은 한국에서도 지적되고 있지만 일본의 그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문제로 느껴진다. 일본에서는 원래 정치를 자신과는 먼 일로 생각하는 감각이 뿌리 깊다. 일본어로 '오카미(お上)'라는 말이 있는데, 위정자나 정부를 '윗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정치는 윗사람이 해 '주는' 것이고, 스스로 바꿔가는 것이라는 의식이 희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학교 교육 문제도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2016년부터 만 18세 이상이 선거권을 갖게 되었는데, 한편으로 학교에서는 정치적 중립성이 확보되어야 한다며 교내에서는 정치적 활동이 금지되어 있다. 교외에서 선거운동에 참여할 때는 사전신고를 요구하는 학교도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모순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일본 사회다. 예부터 화합을 중요하게 생각해온 일본에서는 대립을 낳는 주장은 삼가는 것이 마치 미덕처럼 인식된다. 정치뿐만 아니라 자기 주장을 숨기는 경향이 강한 사회에서는 좀처럼 투표라고 하는 정치 참가를 스스로의 권리로 행사한다는 인식을 갖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또한 어른들 세계에 이르러서는 주의·주장을 밝히고 ‘화합’을 깨는 언행은 어른답지 않기에 피해야 한다는 규범이 일본 사회에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 애당초 정치 이야기는 어렵다, 귀찮다, 나와는 관계없다, 어차피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등 냉소적 태도를 낳는 분위기마저 있다. 한국에서 민주화란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하는 일이었고, 정치 참여가 자신의 권리와 자유에 직결돼 있다는 사회적 경험이 존재한다. 반면 패전 후 일본에서는 그러한 사회적 성공 체험이 존재하지 않았고, 이것이 한국과 일본의 큰 차이로 여겨진다. 이번 한국 총선 투표일은 4월 10일이지만 이미 재외국민투표는 3월 27일부터 시작되었다. 시차 관계로 뉴질랜드 수도 웰링턴에 있는 한국대사관과 오클랜드 총영사관에서 시작한 뒤 세계 115개 국가와 지역에 있는 220개 투표소에서 4월 1일까지 실시된다고 한다. 이렇게 해외 거주 유권자가 투표할 수 있는 재외선거제도도 일본에서는 1998년 도입된 것에 비해 한국에 도입된 시기는 2012년(2009년 법 개정)이었다. 일본 사회에서 지방참정권조차 부여받지 못하고 있던 재일코리안 이건우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 끝에 쟁취한 권리다. 일본 정부는 식민지 지배 결과로 일본에 정착하게 된 한반도 출신자들의 후손에게 특별영주자격을 부여하는 것으로 그 책임을 회피해 왔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라 일본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재일코리안들에게 지방참정권이라는 최소한의 권리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미 2005년부터 정주 외국인에게 지방참정권을 부여한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그런 재일코리안들이 모국의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얻게 된 2012년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투표라는 것을 했다고 기뻐하며 흥분하는 재일코리안 친구들을 목격하고 내가 당연하게 누려온 참정권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뼈저리게 깨달았던 경험이 있다. 곧 결과가 나올 한국의 총선에서 사회적 갈등은 해소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갈등을 부추기는 기존 정치에 대해 냉소적인 유권자도 있을 것이다. 나는 유학 당시 한국 친구들에게 “왜 한국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느냐. 한국 정치에서 도대체 무엇을 배울 수 있느냐”는 말을 듣곤 했는데 자신들의 정치적 권리를 쟁취해 온 사회에서 일본 사회가 배워야 할 것은 결코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필자 주요이력 △후쿠오카대학 인문학부 동아시아지역언어학과 준교수 △연세대 정치학박사 △전 홍익대 조교수 △전 주한일본대사관 전문조사원

  • 지난 2월 2일 군마(群馬)현 다카사키(高崎)시에 있는 현립공원 ‘군마의 숲’의 조선인(한인) 추모비가 강제 철거됐다. 추모비를 관리하는 시민단체와 추모비 철거를 요구하는 군마현 간에 법정 다툼이 계속되어 왔지만 군마현이 지난 1월 29일부터 ‘강제 대집행’이라는 조치로 철거를 강행한 것이다. 이 추모비는 일본강점기에 한반도에서 끌려와 가혹한 노동에 시달린 조선인들을 추모하기 위한 것으로 2004년 세워졌다. 하지만 일본의 식민지배 책임을 부정하는 우익 단체들이 이 추모비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우익 단체들은 매년 거행된 추도식을 보도한 과거 신문기사 등을 조사해 “조선인들이··· 전쟁 중 강제로 끌려왔던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발언 등을 두고 “반일(反日)적이다” “거짓 사실이 회자되고 있다”고 문제시하며 추모비 철거를 요구했다. 군마현은 이러한 우익 단체 주장을 받아들여 추모비를 철거한 것이다. 물론 군마현이 공식적으로 우익 단체 주장을 인정하는 입장은 아니다. 야마모토 이치타(山本一太) 군마현 지사는 “역사를 수정하려는 의도는 없다” “비문이나 설치 취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설치할 때 정한 규칙을 어긴 것이 전부”라고 말한다. 추모비가 설치되었을 때 협의한 문서에 '종교상 목적 및 정치상 목적에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있는데 추모행사 등에서 시민들 발언이 '정치적'이며 당초 약속을 어겼다는 것이다. 2014년 군마현이 10년 단위로 허용되던 추모비 설치 허가 연장을 불허하는 결정을 내리자 이에 추모비를 관리하던 시민단체가 불허처분 취소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2018년 마에바시(前橋) 지방법원에서는 추모비 설치 연장 불허 처분은 부당하다는 판결이 내려졌지만 2021년 도쿄(東京) 고등법원에서는 군마현 측 주장이 인정되어 추모비 설치 연장 불허 처분이 '적법'하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결국 2022년 대법원은 “행사에서 ‘강제연행’이라는 문구를 포함한 정치적 발언이 있었고, 추모비는 중립적 성격을 잃었다”고 판단하며 시민단체 측 상고를 기각했다. 이에 야마모토 군마현 지사는 “공익에 반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어 여기까지가 한계”라며 추모비 철거를 강행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강제연행'이라는 표현에 자주 과잉 반응을 보인다. 물론 무엇이 '강제'적이고 무엇이 '연행'인가 하는 용어의 정의가 모호하게 쓰일 때도 적지 않다. 역사 용어로서 뜻하는 바와 일반 사회에서 이해하는 데 차이가 있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그것이 아니다.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식민지배하에서 입은 피해가 역사적 사실로 존재하며, 그 사실은 지금까지 많은 전문가와 연구자, 시민들에 의해서 밝혀져 왔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역사수정주의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군마현 내에는 과거 다수의 광산과 군수공장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과 한반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끌려왔다고 한다. 공식 통계기록이 확인되지는 않으나, 시민단체 조사에 의하면 현내 10여 곳에 약 4600명의 조선인이 끌려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현내 지하수로 공사를 맡은 기업의 사사(社史)에는 600여 명의 중국인과 1000여 명의 조선인이 근무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군마현 의회도 조선인 피해 사실을 인정하고 2001년 6월 만장일치로 추모비 설치를 허용했을 것이다. 원래 조선인 강제노동 실태 조사를 진행하던 시민들은 공식 기록이 남아 있지 않거나 생존자도 적어지는 상황에서 일본의 식민지배로 인한 피해를 역사로 기록해 후세에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노역을 당한 조선인들의 고통을 애도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추모비 건립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만약 추모비를 세운다면 그 피해가 국가 정책에 의해 이루어진 이상 공유지에 설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현립공원인 ‘군마의 숲’을 선택했다. 이 ‘군마의 숲’은 일본 육군의 화약제조소가 있던 자리이기도 하다. 1990년대는 일본에서 '증언의 시대'라고도 불린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비롯해 일본의 식민지배 피해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무렵이고, 위안부 피해에 일본군의 관여를 인정한 고노(河野) 담화(1992년)에 이어 무라야마(村山) 담화(1995년)가 발표되어 과거 식민지배를 반성하고 그 책임을 어떻게 완수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있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일본 사회가 과거사에 대해 가장 깊이 고민한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당시 추모비 설치가 순탄치만은 않았다. 설치를 앞두고 군마현은 일본 외교부와도 협의해 비문 초안에 있던 '강제 연행'이라는 용어를 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현재까지 이어진 일본 정부의 일관된 입장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비문에서 '강제 연행'이라는 표현을 '노무 동원'으로 바꾸면서 군마현 공공시설 내에 추모비를 설치하는 것에 간신히 성공했다. 그래도 추모비 설치는 군마현과 시민들, 그리고 일본 정부까지도 인정한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다. 2004년 추모비 제막식에는 많은 시민들과 함께 군마현 당시 지사와 자민당 군마현 간부 등도 참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대가 '증언의 시대'이자 일본 사회가 식민지배 책임에 대한 논의를 가장 심화시킨 시기였다면,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에 걸친 일본 사회는 '백래시(backlash·반동)의 시대'이자 '역사수정주의 대두의 시대'였다. 과거사를 직시하는 것은 '자학사관'이라고 조롱받게 되었고,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라는 역사수정주의자들에 의해 역사교과서 운동이 확산되었다. 그 결과 1990년대에 중학교 검정 역사교과서 모두에서 언급하게 된 위안부 문제는 다시 모든 교과서에서 사라졌다. 북한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한 관심이 2010년대에 걸쳐 재일코리안을 향한 헤이트 크라임(hate crime·증오범죄), 그리고 혐한(嫌韓) 붐으로 이어졌다. 버블 경제 붕괴로 인해 '잃어버린 10년, 20년, 그리고 30년'으로 일본 사회가 정체의 시기로 치달았을 무렵의 일이다. 북한 일본인 납치 문제를 계기로 정치인으로서 영향력을 키워 간 것이 아베 신조(安倍晋三)였고, 역사수정주의의 대두를 배경으로 세력을 넓힌 것이 자민당을 중심으로 한 우파 정치인들이었다. 그러한 정치인들이 1990년대 고노 담화를 부정하고, 무라야마 담화 등을 통해 보여준 식민지배 책임에 대한 반성의 자세를 약화시키려는 사회 분위기가 당시를 지배하고 있었다. 군마현 추모비를 둘러싼 백래시가 시작된 2012년은 2차 아베 정권 출범 무렵이었다. “추모비 내용은 엉터리다”라는 등 항의가 군마현청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2012~2014년에 400건 이상 관련 민원이 들어왔다는 보도도 있다. 추모비 철거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군마의 숲’을 찾아가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군마현은 “추모비는 존재 자체가 논쟁의 대상이 되었고 시위, 항의 활동 등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어 도시공원에 있어야 할 시설로 적합하지 않게 됐다”는 인식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대법원 판결은 군마현에 의한 추모비 설치 연장 불허 처분을 '적법'하다고 한 것일 뿐 '추모비를 철거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철거 결정은 군마현의 판단이다. 야마모토 군마현 지사는 추모비에 대해 현저하게 공익에 반한다면서 그 이유는 약속 위반이지 역사인식 문제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하지만 결과적으로 역사수정주의 입장을 조장하게 될 결단을 내린 것이 사실이다. 2019년 군마현 지사에 취임한 야마모토는 자민당 전직 국회의원으로 아베 전 총리와 가까웠고, 2차 아베 내각에서 각료를 지내는 등 요직에 있었던 정치인이다. 과거 아베 총리가 위안부 문제를 놓고 “강제 연행을 보여줄 증거는 없었다”고 발언함으로써 마치 위안부 피해 사실 자체가 없었던 것처럼 일본 여론에 영향을 준 과거가 떠오른다. 군마현 추모비 철거 사건에 대해 자민당 국회의원 스기타 미오(杉田水脈)는 본인 SNS에 “정말 다행이에요. 일본 내에 있는 위안부와 한반도 출신 노동자들에 대한 추모비나 동상도 이를 따랐으면 좋겠어요. 거짓 기념물은 일본에 필요 없어요”라는 글을 올렸다. 스기타는 자민당 아베파 의원으로 지금 일본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비자금 문제로도 비판을 받고 있지만, 그 이전부터 거듭되는 차별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켜 온 정치인이다. 인터넷상에 아이누 민족이나 재일코리안을 조롱하는 글을 올려 비판을 받았고, 일본 법무부에서 '인권 침해'로 경고를 받은 바가 있다. 하지만 자민당은 여전히 그를 중용하고, 야마모토 군마현 지사도 그의 발언을 두고 “개인으로서 신조”라며 비판하지 않았다. 과거부터 군마현과 비슷한 사례가 일본 각지에 있었고, 앞으로 그 영향 또한 우려된다. 아사히신문 보도에 따르면 나라(奈良) 덴리(天理)시 공원에 설치되어 있던 구 일본해군 항공대 기지 야나기모토(柳本) 비행장터 안내판의 '많은 조선인 노동자가 동원이나 강제 연행으로 끌려와 힘든 노동 상황 속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라는 기술이 문제시되어 결국 덴리시는 그 안내판을 2014년에 철거했다. 또 나가노(長野) 마쓰시로 조잔(松代象山) 지하호의 안내판에 적힌 '총 300만명의 주민들과 조선인들이 노동자로서 강제적으로 동원'이라는 문구 역시 문제시되었고, 나가노시는 2013년 '강제적으로'라는 글자를 흰 테이프로 가린 뒤 2014년 '꼭 모든 경우가 강제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는 문구를 추가한 안내판으로 교체했다고 한다.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쿄도 지사는 간토(関東)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모식에 추모문을 보내지 않는 방침을 고집하고 있다. 매년 9월 1일 도쿄도 위령당이 있는 요코아미초(横網町) 공원에서 추모 행사가 개최되는데, 역대 도쿄도 지사가 추모문을 보내던 것을 고이케 지사가 2017년 취임 이후 줄곧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분들에게 애도를 표하고 있다”고 고이케 지사는 설명하지만 간토대지진 희생자를 모두 똑같이 취급함으로써 학살의 사실에서는 눈을 돌리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 특히 정치인의 발언이나 태도는 사회 인식에 큰 영향을 미친다. 도쿄도에서 작년 ‘도쿄도 인권 플라자’ 기획전에서 상영 예정이던 영상 작품에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을 언급한 장면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안 도쿄도 담당 부서는 “기획전 취지에 맞지 않는다”며 상영을 거절했다. 도쿄도 담당 직원이 고이케 도지사의 정치적 입장을 이유로 상영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는 사실도 나중에 밝혀졌다. 한편 후쿠오카(福岡)현 이즈카(飯塚)시는 탄광으로 번창한 지역으로 그곳에는 시가 운영하는 이즈카영원(飯塚霊園)이라는 공동묘지가 있고, 조선인 추모시설도 마련되어 있다. 영원 부지 내 ‘국제교류광장’에 ‘무궁화당’이라는 납골당이 2000년 12월에 설치되었다. 추모시설 설치를 요구하는 시민과 이즈카시가 약 5년간 수십 차례에 걸친 협의 끝에 부지 일부를 무상으로 빌려주기로 합의하며 성사되었다. 무궁화당 앞에는 '수많은 조선인과 외국인이 일본 각지로 강제 연행되었습니다'라고 적힌 비문이 있고, 무궁화당 주위에는 일본과 한반도의 관계를 보여주는 역사 패널도 설치되어 있다. 이 시설도 2015년 우파 정치단체인 ‘일본회의’ 회원과 일부 주민들이 문제 삼았지만 시설을 건립한 시민단체와 이즈카시 간에는 지속적인 협의가 이루어져 지금까지 추모비 철거나 수정 등은 검토되지 않고 있다. 매년 가을에는 추모식도 열린다. 군마현 추모비는 포크레인 등 중장비로 흔적도 없이 분쇄돼 철거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역사적 사실까지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 한국에서도 그렇듯 역사의 평가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갈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유일한 사실(史實)은 존재한다. 추모비를 철거한다고 기억까지 지울 수는 없다. 우리 시민은 일본이나 한국/조선, 그리고 보수와 진보에 관계없이 사실을 기억하고 그것을 이어감으로써 역사수정주의에 저항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추모비에는 일본어와 함께 한글과 영어로 크게 '기억, 반성, 그리고 우호'라고 적혀 있었고, 그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21세기를 맞이한 지금 우리는 과거 일본이 조선인들에게 엄청난 손해와 고통을 안겨준 역사의 사실을 깊이 기억하고 진심으로 반성하며 다시는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표명한다. 과거를 잊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고 새로운 상호 이해와 우호를 다지고자 이곳에 노무 동원으로 인한 조선인 희생자들을 진심으로 추모하기 위해 이 비를 건립한다. 이 비석에 담긴 우리의 마음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고, 더한 아시아의 평화와 우호의 발전을 바라는 바이다.'

  • 2024년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많이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란다. 신정을 보내는 일본에서 새해 인사는 일반적으로 양력 1월 1일부터 7일까지로 정해져 있는데, 한국에서는 곧 설날이기 때문에 조금 이른 인사로도 받아들일 수 있겠다. 내가 19년의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일본 후쿠오카(福岡)로 온 것이 2022년이니까 어느덧 후쿠오카 생활 3년째에 접어들었다. 이번 칼럼에서는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면서 일본으로 돌아와 생활하며 느끼는 한국과 일본의 생활 속 문화 차이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한다. 일본에도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넌다(石橋を叩いて渡る)'는 말이 있다. 신중하게 일을 진행한다는 의미로, 일본 기업 등에서 일 처리하는 방식을 나타내는 말로 자주 사용된다. 하지만 그러한 신뢰도 높은 일본의 일 처리 방식은 도가 지나치면 '돌다리를 두들겨도 건너가지 않는다'고 하여 야유를 받는 일이 자주 있다. 이에 반해 한국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들끼리는 한국의 순발력 있는 일 처리 방식을 '진흙다리라도 건너가 버린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물론 그것이 칭찬의 뜻으로 쓰이는 말이기도 하면서 어떨 때는 무모하게 일 처리하는 방식이 리스크 관리가 부족하다는 의미로 비판적으로 쓰이기도 한다. 한·일 양쪽 문화를 모두 아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한·일 양국의 문화를 더해 절반으로 나눈 정도가 적당하지 않겠냐는 결론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 일본에서는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넌다'와 같은 신중함이 왜 그렇게 뿌리내리고 있을까 생각했을 때 종종 일본에서는 자연재해가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사람이 있다. 자연재해는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일본에서는 어릴 때부터 다음 날 입을 옷을 머리맡에 미리 준비하고 자도록 배운다. 일종의 훈육이고 예절과 같은 것이다. 밤중에 지진이 일어나도 바로 옷을 입고 도망갈 수 있도록 하려는 잠재의식에서 오는 준비성일지도 모른다. 집이나 가게 등 실내에 들어갈 때 신발의 발끝을 밖으로 향하게 벗어 두는 것도 하나의 예절로 여겨지는 것 역시 지진을 대비하는 습관인 것 같다. 서둘러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야 할 상황을 대비하는 의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무엇이든 다음 동작을 상정해 미리 준비하는 것이 어릴 때부터 훈육으로서 실천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한번 자리 잡은 것을 바꾸면서까지 새로운 도전을 하지 않는 신중함이 중요시된다. 예측 가능한 안정감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중요한 가치인 것이다. 자연재해로 인해 언제 그 일상의 평온이 깨질지 모른다는 불안함을 항상 안고 있기에, 예측되는 현재 상태에 안심하는 것일지 모른다. 한국어 '힘들다'에 해당하는 일본어로 '다이헨(大變)다'라는 말이 있다. 뭔가 좋지 않은 상황이 일어나고, 정신적으로도 힘들어지는 상황 등을 표현하는 말이다. 한국어 '큰일 났다'는 말에도 해당된다. 정확한 어원까지는 잘 모르고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하지만 일본에서는 '다이헨다', 즉 '크게 변하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이다. 자연재해가 많은 일본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온한 상태가 바로 바람직한 상태이며, 뭔가 큰 변화가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자 힘든 일인 것이다. 그런 일본에서 새해 첫날부터 잇따라 큰일이 터졌다. 하나는 1월 1일에 발생한 노토(能登)반도 지진이다. 이시카와(石川)현 노토반도 부근을 진원지로 규모 7.6, 진도 7의 지진이 관측됐다. 당시 나는 300㎞ 이상 떨어진 도쿄 쪽 본가에 있었는데도 흔들림을 느낄 정도였으니 얼마나 큰 지진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일본에서는 신정이 중요한 명절이기 때문에 그때도 가족끼리 집에서 쉬고 있는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나도 TV로 신정 특집 방송을 보고 있었는데, 지진이 난 직후 바로 긴급재해정보 프로그램으로 전환되어 진원 근처의 사람들에게 피난을 재촉하는 아나운서의 강한 어조의 목소리가 계속되었다. 진원지 인근의 모습을 담은 영상 속에서는 건물이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쓰러지는 모습도 포착됐다. 바로 '다이헨다(큰일 났다)'라는 걸 알았다. 그로부터 20일이 지난 현시점에서 아직 안부조차 확인이 되지 않은 사람들이 22명이나 되고, 이시카와현 내에서만 232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중경상자는 1170명에 이른다. 그리고 또 하나의 '큰일'이 1월 2일 도쿄국제공항(하네다공항)에서 벌어졌다. 해상보안청 항공기와 일본항공(JAL) 여객기의 충돌 화재 사고다. 노토반도 지진의 이재민들에게 구호물자를 실어 나르려던 해상보안청 항공기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홋카이도에서 온 JAL 여객기가 착륙하려고 하던 활주로에 진입해 충돌한 것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여객기에 탑승했던 승무원을 포함한 379명은 모두 무사히 탈출했으나 해상보안청 항공기에 탑승했던 6명 중 5명은 숨졌고 생존한 1명(기장)도 중상을 입었다. 해상보안청 항공기가 허가를 받지 않은 활주로에 왜 진입하게 됐는지 아직 그 원인은 규명되지 않았다. 가족이 모여 평온해야 할 설날 일본의 안방은 단번에 '다이헨'한 뉴스들로 가득 찼다. 새해 첫날부터 굉장한 '큰일'이 벌어진 한편 일본 사회의 나쁘지 않은 변화의 조짐도 보였다. 얼마 전 하네다공항 사고를 겪은 일본항공(JAL)이 마침 차기 사장 인사를 발표했다. 새롭게 사장으로 결정된 사람은 돗토리 미쓰코(鳥取三津子) 전무이사이다. 그는 JAL 사장으로는 첫 여성이자 첫 승무원(CA) 출신이라고 한다. 대기업이자 일본을 대표하는 항공사의 인사인 만큼 많은 언론이 이 소식을 다뤘다. 일본의 여성 임원 비율은 2021년에 13.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맹국 중에서 최하급이고, 예전부터 OECD는 일본의 그러한 상황을 '인재의 치명적인 배분 실패'가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해 왔다고 하니, JAL의 이번 인사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도 이해가 된다. 2018년 미국발 ‘#MeToo 운동’이 한국에서도 크게 화제가 된 데 비해 일본에서는 당시 사회 전반의 큰 움직임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물론 이후에 한국에서 벌어진 젠더 갈등 양상을 보면 암담하고 아쉽기만 하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 양쪽을 경험한 나의 실감으로는 젠더 문제를 둘러싼 한국 사회의 발전은 분명하고, 한편으로 일본 사회의 양상은 좀처럼 눈에 띄는 변화가 없고 구태의연하기에 실망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말 발간된 주간지 <주간문춘(週刊文春)>에서는 일본을 대표하는 코미디언 콤비 ‘다운타운’의 한 명인 마쓰모토 히토시(松本人志)의 성폭력 가해 의혹을 보도했다. 이 사건은 마쓰모토 본인이 사실을 부인하고 있고, 올해 들어 주간지 출판사를 상대로 명예훼손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제소를 하기로 했다고 하니 그 진위에 대해 내가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어쨌든 그는 이번 사건으로 일시적으로 연예 활동을 쉰다고 발표했고, 당시 현장에 함께 있었다는 후배 코미디언들도 방송 출연을 자숙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에서 지금까지 주간지의 보도 하나만으로 연예계의 대스타가 이렇게 빠른 반응을 보였던 일은 없었는 것 같다. 더구나 본인은 그 의혹을 부인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의혹이 의혹일 뿐이고,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언론 보도의 문제가 지적될 만한 사건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 대한 사회 전반의 눈이 엄격해졌다는 사실은 적어도 긍정적으로 볼 만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작년에 큰 화제가 되었던 자니 기타가와(ジャニー喜多川)의 연쇄 성착취 사건이 큰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 사건이 오랫동안 못 본 척해 온 연예계 성범죄에 대해 세상이 따가운 눈초리를 보내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동안 성폭력이나 젠더를 둘러싼 문제에 둔감했던 일본 사회의 분위기에 조금이나마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번에 마쓰모토를 둘러싼 의혹도 단순하게 연예인의 스캔들로 떠들썩하게 호기심의 대상으로 소비하기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연예계의 보다 본질적인 문제로 눈을 돌리게 된다면 그것은 '큰일'이자 바로 '큰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계에도 '다이헨'한 사건이 벌어졌다. 집권 자유민주당 의원들이 불법 비자금을 조성해 온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자민당 내 ‘파벌(派閥)’ 집단은 선거 협력이나 당내 출세 시스템으로서 모종의 공적인 기능을 지니고, 자민당 국회의원들에게는 자신이 속한 파벌에서 힘을 기르는 것이 바로 정치인으로서 출세로 이어진다고 한다. 현재 기시다(岸田) 총리는 자민당 최대 파벌인 ‘아베파’의 후원 덕분에 총리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가 사망한 이후에도 ‘아베파’로 불리는 정치인 집단이 존재하며 영향력을 계속 행사해 온 것도 그만큼 파벌이 수행하는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아베파가 관례적으로 불법 비자금 조성을 해 왔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구속되는 국회의원까지 나온 것이다. 더욱이 관례적인 불법행위는 아베파뿐 아니라 자민당 전체에서 자행돼 온 악습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적어도 여론은 그렇게 보고 있다. 이러한 논란 가운데 기시다 총리는 자신의 ‘기시다파’를 해산하겠다고 발표했다. 악습을 끊겠다는 자세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아직 그 진정성은 불분명하지만 그것이 만약 단순한 보여주기식 퍼포먼스가 아닌 자민당의 개혁으로 이어진다면 일본 정치의 큰 변화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한 해에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넌다'는 일본 사회가 '다이헨'한 각오를 하면서까지 큰 변화를 일으킬까. 자니 기타가와의 성범죄 사건이 주목을 받게 된 것도 본인의 사후였고, 피해자들에게 충분한 보상과 지원이 이뤄질지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황이다. 연예계의 금기가 한 연예인의 스캔들로 끝날지, 그 진위조차 결론이 나지 않은 채 어느새 잊힐지 그 가능성도 부인할 수 없다. 자민당의 비자금 문제도 어느새 자민당 내 파벌을 해산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왜소화되고, 아베파의 유력 국회의원들이 아닌 그 비서나 회계 담당자만 잡혀가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될 것으로도 보인다. 코로나19 사태로 한국에서도 주목받은 일본의 서류와 도장을 중시하고 팩스를 사용하는 인터넷 시대에 어긋난 종이문화는 웃음거리가 되고 비판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남아 있다. 아무런 합리적인 이유 없이 그저 관습으로 행해지는 일종의 의례와 같다. 합리적인 논의보다 관례에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직장 문화도 건재하다. 무언가를 바꾸는 것은 '다이헨(힘들다)'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코로나19 사태로 많은 기업들이 재택근무를 도입해도 회사가 문제 없이 돌아간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는 재택근무가 특별히 드문 일이 아니게 되었다. 이렇듯 도장도 팩스도 남아 있고, 젠더 감수성도 여전히 낮다는 지적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예전에 비하면 일본 사회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대를 품으며 2024년을 시작하고 싶다. 오가타 요시히로(緒方義広) 주요 이력 ▷후쿠오카대학 인문학부 동아시아지역언어학과 준교수 ▷연세대 정치학박사 ▷전 홍익대 조교수 ▷전 주한 일본대사관 전문조사원

  • 지난달 23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중요한 판결이 나왔다. 한국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16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한 소송의 항소심 판결이었다. 서울고법은 피고인 일본 정부에 대해 피해자 1인당 2억원씩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일본 정부는 주권국가에 대해서는 다른 나라의 재판권이 미치지 않는다는 국제법상 ‘국가면제(주권면제)’라는 원칙을 이유로 애초부터 소송을 인정하지 않고 참여하지도 않아 상고 또한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달 9일 이 판결이 원고 승소 형태로 확정됐다. 이번 재판은 원래 2016년에 제기된 것이었다. 2021년 1심 판결에서는 “국제 관습법과 이에 관한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주권적 행위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고 하여 ‘주권면제’ 원칙을 적용해 원고 측 소를 물리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판결은 “현행 국제 관습법상 일본에 대한 대한민국 법원의 재판권을 인정하는 게 타당하다”며 “한반도에서 원고들을 위안부로 동원한 불법행위가 인정되므로 합당한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고 지적하여 ‘주권면제’ 원칙을 인정하지 않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판결이 보도되자 일본 정부는 바로 윤덕민 주일 한국 대사를 초치해 “극히 유감이며 일본 정부로서 본 판결은 결단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하게 항의했다. 가미카와 요코(上川陽子) 외무대신 또한 “국제법과 한·일 양국 간 합의에 명백히 위배되는 것으로 극히 유감스럽고 결단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일본으로서는 한국에 대해 국가로서 스스로의 책임으로 즉시 국제법 위반 상태를 시정하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강구할 것을 다시금 강하게 요구한다”고 담화를 발표했다. 2019년 한·일 관계는 '국교 정상화 이후 최악'이라고 불리는 상태에 빠졌지만 올해 3월 한국 정부의 사실상 ‘양보’로 관계가 개선됐다. 당연하다는 듯 한·일 양국 여론은 관계 개선을 환영했다. 한국에서는 윤석열 정부의 ‘양보’에 대해 '빈손 외교' '굴욕 외교'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일본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의 결단을 찬양하는 듯한 보도가 잇따르면서 매우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사실 필자도 한·일 관계에서 대화의 기회가 생긴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런데 원래 2019년 양국 관계를 악화시킨 계기였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당시 문제의 발단이 된 것도 사법 판단이었다. 2018년 식민지 지배하의 강제노동 문제, 이른바 ‘징용공’ 문제를 놓고 피고인 일본 기업에 대해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이 그것이다. 이에 재판 당사자도 아닌 일본 정부가 판결에 대해 '국제법 위반'이라며 역시 당사자가 아닌 한국 정부에 대응을 요구했다. 이번에도 일본 정부 측 반응은 그때와 같다. 한국 정부로서는 삼권분립을 침범하는 일을 할 수는 없었다. 하물며 당시 문재인 정부는 2012년 유사한 판단을 내린 사법부에 개입한 것이 '사법 농단'이라고 비판을 받았던 박근혜 정부 탄핵의 결과로 탄생했기에 사법부에 대해 어떠한 조치를 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했다. 그 결과 대일 외교로서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당시 문재인 정부는 '반일 정권'으로 이해된 것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번에도 그렇지만 사법부 판단에 행정부가 개입할 수는 없다. 아니,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일본도 그렇듯, 그것이 입헌주의 민주국가의 룰이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그것을 요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한국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또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진보 정권은 ‘반일’이며, 그 밑에서 정치적으로 배려한 사법부가 내린 판결은 '국제법 위반'이라는 인식의 틀이 받아들여졌고, 일본 사회에서는 그것이 이미 상식인 것처럼 공유되고 있다. 그렇기에 2022년 윤석열 보수 정권이 탄생했을 당시 일본 여론은 별다른 근거 없이 한·일 관계 개선을 기대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윤석열 정부는 식민지 강제노동 문제를 둘러싼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한국 재단이 떠맡겠다는 ‘제3자 변제’라는 해결책을 내걸며 일본 정부와 여론의 기대에 부응했다. 그러나 이번 사법 판단은 일본 여론을 당황하게 만든 것 같다. 현재 보수 정권인 한국에서 일본의 식민지배를 비판하는 사법 판단이 내려질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본 언론들은 이번 판결을 부정적으로 보도했다. 일본 정부 방침에 따라 국제법이나 2015년 한·일 외무장관 합의에 반하는 판결이라는 시각이다. 다만 2019년과 2021년 때처럼 비판이 고조되는 상황은 아니고 적어도 일반 여론은 상당히 조용하다. 한편 이번 사법 판단은 한국 사회에서도 의외의 결과였던 것으로 보인다. 원고 측 지지자들도 승소를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서울고법은 특히 보수적 성향이 강해 인권보다 한·일 관계를 우선시한 판단을 내릴 가능성도 있었지만 결과는 달랐다. 식민지 지배하의 강제노동과 관련한 2018년 판결과 마찬가지로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인권을 존중한 이번 판결이 가지는 의미는 크다. 아직 주류라고 할 수 없는 판결일지 모르나 기존 가치 판단에 일석을 던지는 사법 판단이 이어진 셈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도 피해자 편에 선 이러한 판결이 나온 데 대해 국가 논리만 앞세우고 중대한 인권 침해에 면죄부를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가치 판단이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두고 있다. 원고 측 대리인인 이상희 변호사는 “국제사법 흐름은 분명히 인권 중시로 가고 있으며 주권면제 법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관한 다양한 논의와 판례, 입법이 형성돼왔다”며 최근 세계 각국에서 주권면제를 인정하지 않는 판결도 많이 나오고 있음을 지적했다. 2011년 헌법재판소가 역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정부의 부작위를 지적한 것, 2012년과 2018년에 강제노동 문제를 놓고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한 판단이 내려진 것, 그리고 이번과 같은 ‘위안부’ 판결이 내려진 것 모두 피해자 구제 논리를 중요시하는 국제사법 조류와 무관하지 않다. 각지에서 잇따르고 있는 비슷한 사법 판단이 서로 영향을 미쳐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보면 일본 사회에서 널리 이해되고 있듯이 한국 사법부가 진보 정권 눈치를 살피면서 ‘반일’ 판결을 내리고, 반대로 보수 정권하에서는 그런 판결을 저지함으로써 한일 관계가 개선되고 유지된다는 이해가 얼마나 치졸한지 알 수 있다. 애초 2011년 헌재의 결정은 이명박 정권하였고 이번 판결도 보수정권하의 일이다. 게다가 강제노동 문제에 대해 과거 노무현 정권은 '이미 해결됐다'고 하는 일본 정부와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진보와 보수로 한·일 관계가 좌우된다는 일면적이고 단순한 발상 자체가 왜곡된 인식의 틀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배하의 피해 문제나 피해자 인권을 이야기하면 '한국 측 대변자'로 여겨질 때가 종종 있다. 식민지 피해 문제를 놓고 한·일 관계가 삐걱거리자 '한국은 무엇을 요구하느냐'고 묻는 일본 여론도 많다. 식민지를 둘러싼 문제는 과연 한·일 간 문제, 즉 한·일이라는 국가 간에 대립해야만 하는 문제인가? 필자가 오랫동안 생각해온 의문이기도 하다. 필자가 지금 살고 있는 후쿠오카에는 오랜 세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해온 시민사회가 있다. 거기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온 하나후사 도시오(花房俊雄)·하나후사 에미코(花房恵美子) 부부가 재작년 <관부재판(関釜裁判)>이라는 책을 냈다. 일본 시모노세키(下関)와 부산(釜山), 즉 '관부(関釜)'를 오가면서 사법 투쟁을 해온 '소송과 한국의 원고 피해자 할머니들과 함께한 28년의 기록'(부제)을 담은 책이다. 세간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식민지 피해 문제를 국가 간 문제로 엮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힘없는 풀뿌리 시민운동으로서 여론의 주목을 받기 위해 민족주의적 혹은 국가주의적 감정론을 부추기는 수법을 일부 취해온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애초 피해자들과 함께해온 운동의 상당수는 인권 구제를 위한 활동이었다. 거기에는 한·일 갈등 이전에 한·일 시민의 연대가 있었다. 한·일 관계 발전을 이야기할 때 자주 지적되는 것이 한·일 간에는 공통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기 때문에 서로 각을 세울 때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특히 안보와 경제 분야에서는 한·일 간 신뢰와 협력 관계 구축이 무엇보다도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다. 필자는 결코 이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협동해야 할 과제는 그 외에도 많다고 생각한다. 식민지하에서 일어난 인권 문제, 피해자 구제, 그리고 불행한 과거를 직시하여 교훈으로 남기기 위해 노력하는 일들이 거기에 해당한다. 이번 판결에 대해 한국 정부는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을 회복해 나가는 노력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 그러면서 동시에 한국 정부는 2015년 한·일 외교장관 합의를 존중한다고 했다. 이것은 1965년 국교 정상화 때 '모두 이미 해결되었다'며 '불가역적 해결'을 했다고 하는 일본 정부 주장을 결과적으로 보강하게 된 합의다. 그렇다면 피해자 구제 문제는 이제 한·일 양국 정부가 지혜를 모아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닌가. 한·일이 대립하는 문제에서 한·일이 함께 대처하는 인권 문제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 오가타 요시히로(緒方義広) 주요 이력 ▷후쿠오카대학 인문학부 동아시아지역언어학과 준교수 ▷연세대 정치학박사 ▷전 홍익대 조교수 ▷전 주한 일본대사관 전문조사원

  • 일본 언론에서는 요즘 팔레스타인의 정세가 연일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가자지구의 참극을 직시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음악 축제를 습격한 하마스가 무고한 이들의 일상을 한순간에 빼앗는 영상들은 처참하고 충격적이어서 하마스의 잔인함을 사람들에게 각인시켰다.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미국과 동맹관계에 있는 일본과 한국 모두 팔레스타인 정세에 대한 시각은 비슷할 것이다. 중동지역의 사건을 충분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것 또한 일본과 한국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하마스의 첫 공격 이후 한 달여가 지나며 가자지구의 참상이 연일 전해지는 가운데, 특히 학교나 병원, 그리고 구급차에 대한 무차별 공격이 보도되면서 이스라엘의 책임을 묻는 보도도 늘어나 단순하지 않은 팔레스타인 정세를 더욱 신중하게 전달하려는 보도가 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며칠간 일본 언론에서는 가자지구에서 ‘국경 없는 의사회’ 활동을 마치고 일본으로 귀국한 민간인에 대한 인터뷰를 다루거나 팔레스타인 언론인의 생생한 현지 보고를 전달하기도 했다. 가자지구에 직접 들어가지는 못하더라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현지 분위기와 함께 이스라엘 정부를 직접 인터뷰하는 등,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서 살아 있는 정보를 전달하려는 듯한 보도도 이어지고 있다. 가자지구의 사망자는 1만명을 넘었는데, 그중 4000명이 아이들이라고 하는데, 그러한 숫자나 “이스라엘이”, “하마스가”라고 하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국가나 조직이 주어가 된 정보뿐만 아니라, 거기에 사는 사람들과 전쟁에 의해 빼앗긴 그들의 일상에 대해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성 있는 보도를 하려는 노력들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이나 일본에 있는 우리에게 팔레스타인 정세가 먼 나라 이야기인 것은 틀림없는 현실이다. 팔레스타인 정세가 우리 일상에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참상에 대해 상상력을 동원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팔레스타인 자치구의 일부를 이루는 가자지구는 ‘천장 없는 감옥’이나 ‘지상 최대 감옥’으로도 불린다. ‘자치구’의 일부라고 하지만 육지와 바다, 그리고 하늘까지 이스라엘에 의해 봉쇄되고, 거대한 장벽으로 둘러싸인 채 감시되어 온 땅이기 때문이다. 그 역사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 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 등으로 박해받던 유대인들에 의해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주변 아랍 국가들의 반발이 일어났고, 팔레스타인 분쟁이 시작됐다. 그리고 1993년 팔레스타인 분쟁을 끝내기 위해 ‘오슬로 합의’가 이뤄지면서 팔레스타인 자치구가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이후 애초 이스라엘 건국 자체를 부당하다고 생각해 오슬로 합의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했던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자치구 선거를 통해 팔레스타인인들의 지지를 얻는다. 그러자 오슬로 합의를 맺을 당시 자치정부였던 파타와 하마스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고, 팔레스타인 자치구는 내전 상태에 돌입한다. 그 결과 지지를 얻은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자치구 중 가자지구만을 통치하는 형태가 되었고, 요르단강 서안지구는 자치정부인 파타가 통치를 계속하는 분단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파타 정부를 지지했고, 이스라엘과 긴밀한 관계인 미국은 하마스를 적대시해 온 것이다. 가자지구로 내몰린 하마스 입장에서는 애초 팔레스타인에 존재하지 않았던 이스라엘이 서방 국가들의 정치적 의도와 군사적 지원에 의해 갑자기 출현해 수많은 난민을 낳는 상황을 조성하고 있는 것이 지극히 부당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하마스는 가자지구를 부당하게 지배하는 ‘무장단체’에 불과하고, 파타 정부는 교섭 상대가 될 수 있는 ‘온건파’인 것이다. 미국이나 그를 따르는 한국이나 일본에서도 같은 인식으로 팔레스타인 정세를 바라보고 있다. 물론 이스라엘의 건국과 하마스의 가자지구 지배를 둘러싸고 여러 입장과 시각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복잡한 역사적 배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측의 일방적 시각에서만 팔레스타인 정세를 판단하고 있지 않은가. 사실 국제사회 또한 복잡한 팔레스타인 문제를 한쪽으로 기울어진 시각으로 단순화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팔레스타인인들의 증오를 낳았고, 그들의 증오는 반유대주의 폭력을 만들어냈으며, 그것이 오히려 팔레스타인에 대한 증오라는 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참극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번 팔레스타인 사태를 접하면서 2021년에 출간된 <나머지의 목소리를 듣다(残余の声を聴く)>라는 일본 책을 다시 들었다. 이 책은 ‘오키나와(沖縄)·한국·팔레스타인’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일본 오키나와에 사는 문학연구자 오세정(呉世宗), 한국에 사는 역사사회학자 조경희(趙慶喜),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문제 전문가 하야오 다카노리(早尾貴紀) 세 사람이 집필한 논고집이다. 원래는 한국에 대한 관심에서 입수한 책이었지만, 팔레스타인 사태를 보며 다시 이 책을 들고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금의 비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했다. 언뜻 보기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오키나와, 한국, 팔레스타인 세 곳이지만 각 지역이 안고 있는 문제를 파고들다 보면 공통된 문제를 찾을 수 있고, 다양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1948년에 건국된 이스라엘에서 ‘국민’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국민국가’를 둘러싼 내적 문제는 한국에서도 오키나와에서도 무관하지 않은 이야기다. 역시 1948년에 정부를 수립한 한국 또한 냉전 속 분단국가로 지금에 이르렀다. 1945년 패전으로 식민지를 잃은 일본은 주일미군기지의 대부분을 오키나와에 둠으로써 ‘평화국가’로 있을 수 있었고, 오키나와는 1972년까지 일본이 아닌 미국의 통치하에 있었다. 가자지구를 둘러싼 폭력은 이스라엘 점령의 문제인 동시에 팔레스타인인들에 의한 ‘저항운동’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슬람에 의한 부당한 ‘테러행위’로만 해석하는 일방적인 여론을 주로 접한다. 이는 동아시아 식민주의 문제가 탈냉전의 시대임에도 냉전시대의 사고에 따라 ‘적’을 만들고, 폭력의 장치인 군사력을 정당화하는 것과 비슷한 구도라고 하겠다. 평택의 미군기지 확대와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그리고 오키나와 헤노코(辺野古)의 미군기지 이전 문제가 현지 사람들을 외면한 채 진행되었고, 기지 주변에서 일어난 불상사와 사건들이 은폐되고 정당화되어 온 한국과 일본의 역사이기도 하다. 팔레스타인 정세를 언론에서 말하는 외교 문제로만 치부해서는 안 되는 부분도 있음을 상기시켜줄 수 있는 대목이다. 일본은 미국의 입장을 따르지만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깊은 서방 국가들과는 다소 다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란이나 다른 아랍 국가들과도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언론에서 일본의 역할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몇몇 대학교와 연구기관 등에서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루는 긴급 학술회의 등을 개최하고 있고, 도쿄에 위치한 이스라엘 대사관 주변에서는 시민 등 약 1600명이 모여 가자지구 공격 중단을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내가 살고 있는 후쿠오카 등 일본 각지에서도 수백명이 모여 시위를 벌이고 있다고 한다. 보도를 통해 세계 상황도 엿볼 수 있는데,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도 이스라엘을 비난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가자지구 공격으로 인한 피해에 관심을 갖고 분노하며 울부짖고 있다. 동시에 대항하듯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집회도 적지 않게 열리고 있는 모양인데, 안타까운 것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에 촉발된 상호 증오가 팔레스타인에서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달, 미국 시카고 근교에서 한 팔레스타인계 모자가 집주인 남자에게 습격당해 6세 소년이 숨지는 사건이 있었다. 범행 당시 남자는 “이슬람 신도는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시위 행진이 한창일 때 발포 사건도 벌어졌다.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또 다른 집회에서는 유대계 남성이 습격당해 숨지는 사건도 벌어졌는데, 반유대주의 증오 범죄(hate crime)일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 곳곳에서 ‘반이슬람’, ‘반유대’의 증오가 분출되고 있다. 팔레스타인 참사가 가자지구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문제는 역사적으로도 복잡하게 얽힌 차별과 편견의 문제이자 폭력의 문제다. 강대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질서라는 미명 아래 외면해 왔던 차별과 폭력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조장해 온 이 폭력과 증오의 문제를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 우리는 끊임 없이 고민해야 한다. 팔레스타인 정세가 주목을 받는 가운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끝난 것이 아님에도 관련 보도는 보기 힘들어졌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강력 비판하던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이 가자지구를 공격하는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지지 입장을 밝혔다. 이를 두고 ‘이중 잣대’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한국이나 일본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는 비판이다. 세계 정세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명심해야 할 것이다. 연일 계속되는 보도를 보며 가슴 아파하면서도 멀리 떨어진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극을 막기 위해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하지만 세계 정세를 둘러싼 편향된 보도나 입장이 아닌 스스로 생각하는 자세와 최소한의 관심이라도 가지려는 노력은 필요하지 않을까? 오가타 요시히로(緒方義広) 주요 이력 ▷후쿠오카대학 인문학부 동아시아지역언어학과 준교수 ▷연세대 정치학박사 ▷전 홍익대 조교수 ▷전 주한 일본대사관 전문조사원

  • 오가타 요시히로의 한일 풍경 오가타 요시히로 ogatayoshihiro@gmail.com 후쿠오카대학 인문학부 동아시아지역언어학과 준교수 緒方義広. 연세대 정치학박사. 전)홍익대 조교수, 전)주한일본대사관 전문조사원 자니즈 사무소(Johnny&Associates, 이하 자니즈)는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고 팬도 많은 J-팝(POP)을 대표하는 연예 기획사다.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SMAP이나 V6, 아라시(嵐) 등이 이곳 기획사 아이돌 그룹이었다. 그런데 최근 자니즈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아니, 자니즈뿐만 아니라 일본 연예계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나아가 일본 사회의 인권 의식과 미디어가 가져야 할 본연의 자세를 되묻는 사건이 벌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다. 지난 3월 영국 BBC가 'J팝 포식자 : 숨겨진 스캔들(Predator : The Secret Scandal of J-pop)'이라는 다큐멘터리를 공개했는데, 피해자 인터뷰와 함께 자니즈의 창업자이자 전 사장인 자니 기타가와(ジャニー喜多川, 이하 자니)의 성범죄를 고발하며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자니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만에 비로소 이 문제가 공론화된 것이다. 자니를 둘러싼 성추문은 J-POP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나조차도 들어본 적이 있을 정도였는데, 사실 그것은 ‘소문’이 아니었다. 2003년 재판부에서 자니의 성 가해 사실을 인정한 바 있기 때문이다. 1999년 한 주간지에서 자니가 소년들을 성적으로 학대했다는 사실을 보도했고, 이에 대해 자니 본인과 자니즈가 명예훼손으로 주간지를 고소한 재판이었다. 사실 이전부터 자니즈를 떠난 연예인들이 피해 사실을 꾸준히 호소해왔으나 주요 언론사에서 이를 거론하는 일은 거의 없었고, 여론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남성이 성범죄의 피해자가 된다는 게 믿기지 않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이유는 그뿐만이 아닐 것이다. 피해자의 증언은 매우 구체적이고 충격적이었으며 사법부에서도 그 만행이 사실로 인정되고 있었지만, 정작 일본 사회에서 자니의 성적 학대 문제는 그저 ‘소문’으로만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최근에서야 밝혀진 사건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이미 자니즈 측에서 확인했다고 한 피해자만 478명이고, 아직 목소리를 내지 못한 피해자까지 더하면 그 규모는 수천 명에 이르지 않을까 이야기되고 있다. 또한 자니가 30대 때부터 87세에 사망하기까지, 50~60년에 걸쳐 아동 및 10대 소년들에 대한 성적 학대가 이어져왔다고 한다면 아마도 세계적으로도 전대미문의 대범죄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대범죄가 왜 일본 내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까. 그것은 역시 자니라는 인물이 키워온 자니즈라는 연예 기획사가 큰 영향력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연예계에 머무르지 않고, 일본 사회에 있어서 ‘자니즈’의 존재감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예를 들어, 한국의 SM, YG, HYBE 등의 기획사를 모두 합친 것보다도 영향력이 크다고 하면 짐작할 수 있을까? 그만큼 일본의 TV를 켜면 자니즈 소속 연예인이 나오지 않는 날, 시간대는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가요 프로그램과 예능, 드라마뿐만 아니라 스포츠 프로그램과 뉴스 프로그램에서조차도 자니즈 소속 연예인을 볼 수 있다. 즉, 일본의 TV 방송은 자니즈의 연예인을 제외하고는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미디어 특히, TV 방송국에서는 자니즈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았고, 자사의 콘텐츠를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자니즈를 비판할 수 없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다고 한다. 자니를 둘러싼 ‘소문’을 몰랐던 것이 아님에도 침묵했던 것은 자니즈와 언론의 비정상적인 관계 때문이었다. 그러나 외신의 고발로 가해자인 자니의 사후에야 그 범죄 사실이 주요 언론에서 크게 다뤄지게 됐고, 자니로 인한 피해자들이 여러 명 전면에 나서자 국제사회도 주목하게 되었다. UN인권이사회 조사단이 일본을 방문해 피해자들로부터 청취도 이뤄졌고, 그제서야 성범죄 사실을 자니즈 측에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문제가 공론화된 뒤 자니즈는 지금까지 두 차례 기자회견을 열어 사과하고, 향후 대응에 대해 설명했다. 자니즈가 그런 자리를 마련한 것 자체가 일본 사회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동안 사장을 맡고 있던 자니의 조카 후지시마 줄리 게이코(藤島ジュリー景子)가 물러나고, 사장 자리에는 소속 연예인이자 전 아이돌 그룹 ‘소년대(少年隊)’의 히가시야마 노리유키(東山紀之)가 취임했고, 부사장 역시 아이돌 그룹 ‘V6’ 출신의 이노하라 요시히코(井ノ原快彦)가 맡았다. 자니가 생존해 있던 당시의 자니즈 간부는 전면에 나서려고 하지 않고 있다. 가해 기업으로서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보상을 담당할 책임자 또한 소속 연예인이라는 것은 신기한 체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가운데 1차 기자회견에서 사과는 이뤄졌지만, ‘자니즈 사무소’라는 이름은 남기기로 한 것을 두고 많은 비판이 일었다. 그 결과, 2차 기자회견에서는 가해자의 이름을 딴 소속사의 이름을 ‘SMILE-UP.’으로 바꾸는 동시에, 연예 기획사로서의 활동은 멈추고, 피해자에게 보상하는 회사로 존속시킨 후 폐업하겠다고 발표했다. 또한 자니즈의 이름을 딴 관련 기업들도 모두 명칭을 바꾸고, 현재 소속 연예인은 새로 설립하는 새 회사와 에이전트 계약을 맺는 형태로 진행할 것이며, 새 회사와의 계약 체결 여부는 각 소속 연예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맡기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보상에 대해 자니즈(SMILE-UP.)는 법적인 기준을 넘어 성의를 다하겠다고 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보상의 범위나 방법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피해와 그것을 은폐해온 자니즈의 실태에 관해 구체적인 조사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는 목소리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 신임 사장 히가시야마에 대해서도 자니의 범죄를 못 본 척 해온 죄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과 함께 소속사 후배들에 대한 본인의 성추행 의혹도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더욱이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 열린 2차 기자회견에서는 자신들에게 곤란한 질문을 할 것 같은 기자 명단을 사전에 작성해 그들에게는 질문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 진심으로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는지조차 의심받고 있는 상황이다. 또, 질문하지 못한 기자들이 소란을 일으키자 부사장 이노하라가 “아이들도 보고 있다. (성범죄) 피해자 분들이 자신들의 일로 이렇게 옥신각신하고 있구나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룰을 지키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며 기자를 달래려고 한 것도 물의를 빚고 있다. 성범죄를 저지른 가해자 측에서 할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 이노하라의 발언에 그 자리에 있던 다른 기자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아동 성범죄 사실과 그 책임을 밝혀야 할 자니즈 측이 아동과 피해자를 보호하는 듯한 말로 기자를 달래고, 본래 가해 기업을 규탄해야 할 언론이 반대로 그 대응을 칭찬하는 이상한 광경이야말로 이 문제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후 언론에서는 사전에 작성된 이 기자 명단을 둘러싸고 기자회견을 준비한 컨설턴트 회사의 독단인지 자니즈 측이 알고 있었는지 등의 내용을 연일 보도하고 있다. 말로는 성범죄를 막지 못한 언론에도 책임이 있다며 자성하는 듯한 자세를 보이지만, 여전히 문제의 핵심을 파고드는 보도가 아닌 가십에 치우친 보도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자니즈 연예인들에 대한 팬심이나 애꿎은 소속 연예인들의 처지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그것과 성범죄 피해자 문제의 본질을 동등하게 거론하는 것에서는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번 사건은 한 연예 기획사의 스캔들에 그치지 않고, 일본 사회의 인권의식과 미디어가 가져야 할 본연의 자세를 되묻는 문제가 되고 있다. 나 자신도 지난해 한국 대학에서 일본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 차이를 새삼 피부로 느끼는 중이다. 물론 어느 쪽이 낫다, 나쁘다를 비교해봤자 의미는 없다. 다만 한국에서는 이미 의식이 미치고 있는 부분이 일본에서는 아직 의식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 부모들 중에는 일본 TV 프로그램이 너무 비인권적이어서 어린 자녀에게 보여줄 수 없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지하철 안에 성인잡지 광고가 공공연히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얼굴을 찌푸리는 외국인도 많았을 것이다. 어린아이를 비롯해 누구나 볼 수 있는 편의점 잡지 코너에도 성인잡지가 버젓이 놓여 있는 것이 문제시되기 시작한 것도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2018년 전 세계적으로 ‘미투(MeToo)’ 운동이 주목받았을 때 한국에서는 다양한 업계에서 그 영향이 나타나면서 한국 사회 전반의 인식에 큰 변화가 생겼다. 물론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 백래시(backlash)나 갈등이 생긴 것도 사실이고, 그것은 바람직한 상황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그 미투 운동의 파급효과가 지극히 한정적이었고, 당시 아직 한국에 살고 있던 나에게는 일본만 세계와는 동떨어진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편, 일본에서도 조금씩 변화는 나타나고 있다.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이 일본에서 큰 주목을 받은 것 또한 그 변화 중 하나일 것이다. 책의 무대가 한국이기 때문에 내용에 대한 거부감 없이, 그리고 자신의 일로 절실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심리가 작용했기 때문에 큰 주목을 받았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일본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는 주제였기 때문에 화제가 된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한국 사회의 경험에 관심을 보이며, 그것을 일본과의 공통 과제로 보는 사람들이 일본 사회 내에서 늘고 있다고 느낀다. 다만, 자니의 성범죄 문제와 그 대응을 둘러싼 현재 진행 상황에 대해서는 낙관할 수 없다고 본다. 이 문제가 일본 사회에서 ‘책임지는 방법’이나 일의 결정을 이끄는 ‘과정의 문제’를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공론화시킨 계기였던 BBC 다큐멘터리 속에서도 일본 사회는 마찰을 피하고, 때로는 그것이 자기검열을 낳고 있다는 점, 아직도 일본 사회는 못 본 체하려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책임 추궁 과정에서는 핵심에서 벗어난 이야기에 논의가 집중되고, 세간의 관심은 본질에서 어긋난 방향으로 모아진다. 문제의 핵심 책임자를 모호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방대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고,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는 신중하고 섬세한 논의가 추구된 나머지 문제의 핵심에는 도달하지 못한 채 어느새 종식되고 만다. 이것이 바로 일본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논의 양상이다. 이번 자니즈 성범죄 사건에서는 무엇보다 피해자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이행되고, 그들의 존엄성이 회복되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러나 이미 조금씩 지적되고 있듯이, 이 문제를 한 고인에 의한 성범죄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범죄를 용서하고 은폐해온 주변과 그 기회가 있었음에도 피해를 막지 못한 사회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검증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번 사건을 둘러싼 논쟁을 계기로 일본 사회의 인권의식과 사회구조, 그리고 사람들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인식 변화가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오가타 요시히로(緒方義広) 주요 이력 ▷후쿠오카대학 인문학부 동아시아지역언어학과 준교수 ▷연세대 정치학박사 ▷전 홍익대 조교수 ▷전 주한 일본대사관 전문조사원

  • 지진이 잦은 일본에서는 매년 9월 1일을 ‘방재의 날’로 정하고 있다. 1923년 9월 1일은 간토(関東) 대지진이 일어난 날이고, 올해는 지진 재해가 일어난 지 100년째 되는 해다. 일본 TV, 신문 등 미디어에서는 다양한 각도에서 지진 당시를 다루었고 관련 영화와 서적도 주목받았다. 도쿄 등 수도권을 강타한 간토 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 토요일 낮 11시 58분에 일어났다. 지진 자체로 인한 피해도 컸지만 토요일 점심시간이라 많은 가정에서 불을 사용해 화재로 인한 피해가 심각했다. 지진으로 인한 사망·실종자는 약 1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들 중 약 90%에 해당하는 사람이 화재에 의한 희생자였다. 전파·전소된 가옥이 29만채, 살 곳을 잃은 사람은 200만명에 이르렀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일으켰던 동일본 대지진 당시 사망·실종자가 1만8000명, 전파·전소된 가옥이 12만채였던 것과 비교하면 간토 대지진 당시 피해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일본에서 간토 대지진은 조선인 학살 사건으로도 기억된다. '조선인'이라고 하면 차별적인 용어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당시는 아직 대한민국 성립 이전이었고 한반도라는 의미로 일본어는 '조선반도', 한반도 출신은 '조선인'으로 인식된다. 올해 100주년을 맞으며 조선인 학살 사건을 다룬 일본 언론도 많았다. 지진 재해의 혼란 속에서 많은 조선인이 일본인의 손에 살해되었다. 희생자 중에는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도 있었고 조선인으로 오인된 일본인도 포함됐다. 정확한 수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본 정부 중앙방재회의가 발표한 보고서(2009년)에 따르면 지진 피해로 인한 전체 사망자 중 적게는 1%에서 많게는 수십 %까지가 살해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1000~수천 명이 학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피해 규모도 그렇지만 그 실태는 처참했다. 혼란 속에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거나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불을 질렀다” 등 유언비어가 돌았고 이를 믿었던 일본 관헌과 자경단 등이 다수 조선인과 중국인을 살해했다. 조선인이 발음하기 어려운 일본어 '15엔(円) 50전(銭)'을 말하게 해서 발음이 일본어 원어민과는 다르거나 말하지 못하면 조선인으로 간주해 살해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투리를 쓰는 지방 출신 일본인이나 청각장애인도 희생되었다. 당시는 식민지 시대로 독립운동 등을 통해 일제에 저항하는 조선인들도 적지 않았기에 일본인들에게는 무슨 일이 생기면 조선인에게 공격받을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공격의 대상이 되었고, 이러한 자경단의 만행을 경찰이 방관한 사례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 보고에서는 ‘학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살상’이라고 했지만 이는 조선인이나 중국인이라는 특정 민족을 대상으로 한 틀림없는 ‘학살’이자 ‘제노사이드(Genocide)’ 사건이었다. 일본 시민들은 매년 9월 1일 조선인 학살이라는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수도권 곳곳에서 희생자 추모 행사를 열어왔다. 도쿄에서는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가 있는 스미다구(墨田区) 요코아미초(横網町) 공원에서 매년 추모식이 열린다. 추모비에는 “잘못된 책동과 유언비어 때문에 조선인 6000여 명이 고귀한 생명을 빼앗겼다” “이 역사를 영원히 잊지 않고 재일조선인과 굳게 손잡고 일본과 한반도의 친선, 아시아 평화를 세우고자 한다”고 새겨져 있는데 1973년 도쿄 도의회 여야 합의로 세워졌다고 한다. 이 공원은 당시 도쿄 시내에서 가장 피해가 컸던 지역에 위치해 있고 조선인뿐만 아니라 지진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 유해를 모시는 위령당도 있다. 이곳에서 열린 추모식에는 과거 매년 도쿄 도지사가 추도사를 보내왔다. 중국인을 공공연히 ‘삼국인’으로 부르는 등 차별주의자로 유명했던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도 도지사 재임 기간 중 빠짐없이 추모문을 보냈지만 현 도지사인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는 2017년부터 이를 중단하고 있다. 이에 대해 고이케 지사는 “재해와 여러 사정으로 돌아가신 모든 분들께 애도를 표한다”고 하면서도 조선인 학살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시민단체 등은 학살의 역사를 부정하는 일이 될 수 있다며 도지사의 추모문 송부를 도쿄도에 재차 요청하고 있지만 올해도 끝내 추모문을 보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도쿄도는 추모식을 방해하기 위해 같은 곳에서 열리는 역사부정 차별주의 단체의 가짜 ‘위령제’ 개최를 허용했다. 많은 시민의 대항으로 그 가짜 ‘위령제’는 결국 불발됐지만 도쿄도의 대응 또한 아쉬운 점이 많았다. 학살의 역사를 부정하는 목소리를 조장하고 있는 것은 도쿄도뿐만이 아니다. 지난달 말에는 마쓰노 히로카즈(松野博一) 일본 관방장관이 기자회견에서 조선인 학살에 대한 정부 입장을 알려 달라는 질문에 “정부 조사에 한정한다면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답했다. 학살을 보여주는 기록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고 정부가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러나 정부는 최근 몇 년간 기록이 없다는 발언을 반복하며 마치 조선인 학살이 없었던 것처럼 계속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사건 당시 일부에서는 사건 은폐도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있어 정확한 희생자 수가 공식적인 기록으로 파악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고 그 실태 또한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것이 학살 사실이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기록이 없다는 것은 오히려 정부의 능력 부족을 보여주는 것이니 부끄러워해야 한다. 공식적인 기록이 충분하지 않아도 학살을 보여주는 기록은 분명 남아 있고 그동안 많은 시민과 전문가들이 조사·연구해왔으며 조선인 학살의 역사는 이미 확인된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정부 중앙방재회의 보고서를 봐도 지진 직후 살상 사건에서 중심을 이룬 것은 조선인 박해였다. 당시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운동 등에 직면해 일본인들이 공포감을 느낀 적이 있고, 몰이해와 민족적 차별 의식이 조선인 박해의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는 내용 등이 기재되어 있다. 보고서가 인용한 1차 자료에는 조선인들이 희생된 살상 사건이 기록되어 있고 국립공문서관이 운영하는 아시아역사자료센터 등에서 보관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 보고서는 어디까지나 지식인의 기술이지 정부의 견해는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회의는 정부가 설치한 것으로 당시 내각 총리대신에게도 조사 결과가 보고된 바 있다. 그러므로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답변은 관방장관의 무지 또는 궤변에 불과하다. 간토 대지진 그리고 조선인 학살 사건 100주년을 맞이하며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가 있다. 지진 재해가 일어난 9월 1일에 맞춰 최근 공개된 영화 <후쿠다무라(福田村) 사건>(모리 다쓰야(森達也) 감독)이다. 지진 당시 혼란 속에서 일본 지방인 가가와현(香川県)에서 약을 팔러 온 보따리상들이 지바현(千葉県) 후쿠다무라(지금의 노다(野田)시)에서 현지 자경단에게 폭행을 당해 아이와 임신부를 포함해 9명이 살해된 사건을 그린 작품이라고 한다. 이들이 살해당한 것은 사투리를 써 조선인으로 오인받았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학살 문제는 조선인이나 중국인 같은 외국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인도 그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식민지 지배하에서 조선인에 대한 멸시, 앞서 말한 것과 같은 공포심에서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가 안이하게 믿어졌고, 신문 매체에도 이를 부추길 만한 기사가 실리면서 유언비어가 사실처럼 유포되었다. 사람들의 차별의식을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은 정부 등 공적 기관이자 언론이었다. 요즘 한국에서는 한 국회의원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행사에 참석한 사실이 비판적으로 보도되고 있다. 그 의원이 참석했다는 행사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 수도권 각지에서 개최된 조선인 학살 추모식 중 하나로 도쿄도나 일본 정부가 역사를 직시하지 않는 가운데 일본 시민들이 주최한 것이었다. 일본의 시민운동을 잘 아는 사람에게는 상식 같은 이야기지만 식민지 시기 역사 문제를 다루는 자리나 조직에 총련 관계자가 참여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재일동포의 역사를 알고 있으면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상식이다. 가해 역사를 부정하려는 일본 일부 보수세력에 의한 탄압의 역사는 재일동포들의 저항의 역사이기도 했고 그 중심에는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있었다. 그것과 남북 분단 상황에서 체제 경쟁을 똑같이 생각하는 것은 몰역사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역사는 정치적 입장을 초월한 인권 문제다. 일본 식민주의가 불러온 외국인 또는 민족에 대한 차별, 혐오범죄(hate crime)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기억하고 교훈으로 삼아야 할 부정적 역사이기도 하다. 사람을 조직이나 속성 등 카테고리로 묶는 발상은 위험하다. 일본인도 간토 대지진 학살을 피해갈 수 없었듯이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고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최근 <재해와 외국인 범죄 유언비어 - 관동대지진부터 동일본대지진까지>를 저술한 곽기환 도호쿠가쿠인(東北学院)대학 교수가 언론 인터뷰에서 매우 중요한 지적을 했다. 지진 재해라는 극한 상태에서 소리를 내지 못하는 수많은 이재민과 그 피해에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감정의 출구’로서 외국인에 대한 공격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평소 이질적인 것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존재하는 가운데 대중에게 스트레스 해소의 분출구가 된 외국인이 위험에 처한다는 것이다. 사람을 조직이나 속성에 의해서만 식별하고 단정함으로써 생기는 편견과 차별은 혐오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 바로 그것이 차별의 사슬이자 ‘증오의 피라미드(Pyramid of Hate)’다. 우리는 이런 것들이야말로 100년 전 역사에서 배워 나가야 한다. 원래는 정부가 그것을 주도해야 하지만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든 그 뜻을 이어가려는 시민사회의 힘에서 희망을 찾을 수밖에 없다. 여론을 선동하는 언론의 자제가 요구되는 동시에 언론에 휘둘리지 않는 우리 시민들 나름의 식견 또한 요구된다. '간토 대지진 100년' 방재훈련 연설하는 기시다 (도쿄 AP·교도=연합뉴스) 일본 간토(關東) 대지진 발생 100년을 맞은 지난 1일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도쿄에서 방재훈련 관련 연설을 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간토 대지진이 발생한 9월 1일을 '재해의 날'로 지정해 매년 재해 대응 훈련과 행사 등을 개최하고 있다. 오가타 요시히로(緒方義広) 주요 이력 ▷후쿠오카대학 인문학부 동아시아지역언어학과 준교수 ▷연세대 정치학박사 ▷전 홍익대 조교수 ▷전 주한 일본대사관 전문조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