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려대 철학과
- 중앙대 정치학 박사
-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 EBS 이사
- 연합통신 이사
- 언론중재위원
-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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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격세유전, 白頭血統 정통성 승계로 확보한 리더십 부각 본명이 김성주(金成柱)인 김정은의 조부 김일성(1912~1994)은 1912년 4월 15일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古平面 南里: 현 평양 만경대구역 만경대)에서 아버지 김형직(金亨稷:1894~1926)과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 강반석(康盤石:1892~1932) 사이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모태신앙 기독교인으로 8살 때 부모 따라 만주 지린성(吉林省) 푸쑹(撫松)으로 이주, 유년시절을 보냈다. 김형직은 무면허 한의사로 공산주의자라면 치료도 거부하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공산주의자의 미움을 사 김일성이 14살이던 1926년 32살에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했다. 김일성은 조부모 슬하에서 보통학교인 창덕학교를 거쳐 지린성 송화강변의 위원(毓文, 육문)중학교에 1926년 입학했으나 1929년 중퇴했다. 이 학교 중국인 선생 상웨(尙鉞)에게서 공산주의를 배우고, 1929년 5월 조선공산청년회(朝鮮共産靑年會)에 가입, 공산당 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적발되어 투옥, 6개월여 수감 생활을 하던 중 퇴학당했다. 1930년 석방된 뒤 김일성(金日成)이란 가명을 쓰기 시작한 그는 1931년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33년 이후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항일연군의 소속으로 만주 일대에서 소규모 부대를 조직해 ‘보천보 전투’ 등 빨치산 활동을 시작했다. 일본군의 추격을 받은 김일성은 1941년 소련령 블라디보스토크로 피했다가 하바로프스크로 옮겨 그곳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88여단에서 특무공작 요원 훈련을 받고 소련군 소좌 계급장을 달았다. 1945년 33살이던 김일성은 광복을 맞아 9월 소련 상선을 타고 원산항에 입항, 10월 14일 평양의 군중대회에 모습을 드러낸다.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북한에 돌아온 그는 1946년 2월에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수립을 선포, 같은 해 7월에 스탈린에 의해 북한의 지도자로 낙점받아 해방정국에서 기라성(綺羅星) 같은 백전노장 독립투사들을 제치고 대권을 장악했다. 아버지를 잃은 한미(寒微)한 가문 출신으로 만주에서 10대에 독립운동을 시작, 일제 토벌군을 피해 소련으로 건너갔던 그는 로마넨코, 스티코프 장군 등 북한에 주둔한 소련군 지도자들의 전폭적인 지원과 천거로 왕기(王器)임을 알아본 스탈린의 낙점을 받아 최고지도자로 갑자기 등장한 것이다. 김일성의 집권은 ‘문득 무심하게 고개 돌려 쳐다보니'처럼 홀연히 찾아든 선물 같은 북한판 맥연회수(驀然回首)였다. 김일성은 북조선 공산당과 북한 정권을 장악, 1950년 남침을 감행해 6·25 한국전쟁을 일으켰으며, 전후 연안파, 소련파, 갑산파 등 반대 세력을 숙청하고 확고한 1인지배체제를 구축했다. 1960년대 말부터는 개인숭배 운동이 고조돼 거의 신격화(神格化) 수준에 이르렀고, 이에 따라 북한 근·현대사는 김일성 가계 중심으로 재편됐다. 북한 정권 수립 뒤 일제하에서 공산당 최고 리더로 군림, 카리스마 넘치는 거물 박헌영 등 숱한 정적들을 제거한 김일성은 유일 체제를 확립했다. 특히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던 그는 세계공산주의 패권을 놓고 전쟁을 불사할 정도로 대립하던 중-소대결의 틈바구니에서 ‘주체사상’을 제창, 신정체제(神政體制)와 같은 1인 독재체제를 완성한 것이다. 인민들에게 신(神)과 같은 존재로 생전에 이미 ‘무오류(無誤謬)의 전설적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김정일은 마르크스 레닌의 공산 사상보다 우선시하는 ‘주체사상’을 ‘국책 이데올로기’로 확립하고 이를 기념, 연호(年號)를 김일성 출생 시기로 잡아 ‘주체(主體)’로 쓰는 현대판 왕조체제를 완벽하게 구축한 것이다. 우상화를 통한 개인숭배로 구축된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후계 세습체제를 확고히 구축, 김일성 사후 장남인 김정일이 대권을 세습, 승계했다. 김일성은 ‘민족의 태양’이 되어 출생일이 국경절이 됐고, 주체사상 유일 지배체제로 사후에도 여전히 확고한 카리스마를 유지하고 있다. 사망 후 3년 정도의 과도기에는 이른바 ‘유훈통치(遺訓統治)’로, 김정일 시대 개막 이후 현재까지 ‘영원한 수령’으로 여전히 군림하고 있다. 김일성과 그의 부인 김정숙이 백두산을 거점으로 항일투쟁을 벌였다고 해서 김일성 직계 가족을 일컫는 ‘백두혈통’(白頭血統)은 상징적인 북한 체제 선전의 이데올로기다. 김정일은 집권 후 신격화를 위해 실제 출생지인 연해주 하바로프스크가 아닌 ‘백두산 밀영(密營)’에서 태어났다고 선전한다. 백두산 한 봉우리에 ‘정일봉(正日峰)’이란 이름을 붙이고, 생가로 밀영을 짓는 등 백두산과 김정일을 동일시하여 혈통적으로 우수함을 상징조작한 것이다. 김정은 역시 후계체제 세습의 정통성 명분과 ‘혁명 위업 계승자’라는 논리를 ‘백두혈통’에서 찾고 있다. 백두산 소재지인 양강도 삼지연군은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지역이자 김정일 출생지로, 북한 주민들이 순례하는 ‘혁명의 성지(聖地)’로 선전되고 있다. 북한 매체들은 중대한 고비에서 중요한 결단을 내릴 때마다 “김정은 동지께서 백두의 첫눈을 맞으시며 몸소 백마를 타시고 백두산정에 오르시었다”라며 ‘백두혈통’ 상징인 백마 탄 김정은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그동안 ‘백두혈통’이라는 정통성을 바탕으로 권력을 세습, 김정일이 선친의 유훈(遺訓)을 통치지침으로 삼은 데 이어 그의 사후 권력은 그의 아들인 김정은에게 승계되었다. 김정은은 신화적인 조부 ‘김일성 통치행태’를 모방, ‘조부 이미지 전이(轉移)’를 통해 김일성이 누렸던 ‘위대한 어버이 수령’의 어진 모습을 부각하며 인민 생활 향상을 내세우는 인민 친화적인 대중적 이미지로 포지셔닝했다. 지난 2010년, 김정은은 집권 초 ‘3년 안에 주민들이 쌀밥에 고깃국을 먹도록 하겠다’는 구호를 내걸었다. 이는 1962년 최고인민회의에서 당시 내각 수상이던 김일성이 했던 약속을 48년 만에 다시 들고나온 것이다. 김일성이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었다’는 신화처럼 김정은도 3살 때부터 백발백중(百發百中)의 명사수로 7개 언어를 구사한다는 등 선전도 흡사하다. 2012년 15일 김일성 주석 100회 생일(태양절)을 맞아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김정은은 앞뒤 좌우로 기우뚱기우뚱 몸을 흔들어가며 다소 빠른 속도로 나지막이 연설하는 목소리, 큰 몸집에 뒤로 쓸어올린 머리 스타일, 짙은 색깔의 인민복과 손뼉 치는 모습까지 닮은 모습을 연출했다. 이날 열병식에서는 흰색 망토를 휘날리며 백마부대가 등장, 역시 김일성 주석 생전에 있었던 열병식에서 자주 보이던 모습으로 김일성 시대의 향수를 자극했다. 젊은이답지 않게 성량(聲量)을 조절해가며 일부러 톤을 낮춘 김정은의 스피치 스타일은 평소 연설을 즐기던 김일성 주석의 지난 1948년 인민위원회 연설 때 장면과 흡사했다. 김일성의 출생일을 기념하는 국경절인 태양절 무대는 ‘이미지 메이킹’의 정점이었다. 주석단 무대의 김정은 왼쪽에 도열한 최룡해 총정치국장 등 군부 인사들의 둥근 모자와 흰색 예복은 김일성 주석이 해방 이후 처음으로 평양에 들어와 연설할 때 복장 그대로였다. 호방하게 웃는 모습, 짧게 친 머리 스타일, 롱코트 옷차림 등 젊은 시절 김일성 주석을 닮은 외양으로 주목을 받았다. 김 위원장은 집권 후 외모나 정치적으로 김 주석을 모방, 할아버지 김일성 ‘따라잡기’ 모습을 보여왔다. 목소리, 몸동작은 물론 연설 태도까지 할아버지를 너무나 빼닮아 ‘김일성이 환생(還生)’ 한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북한 주민들에게 각인됐다. 이에 대해 ‘김일성 모방’을 학습해 ‘철저히 만들어진 지도자’ 이미지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김정은이 할아버지를 닮기 위해 6차례 성형수술을 했다”는 중국 일부 매체의 보도에 대해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근거가 없다” (2013.01.23.)고 보도했다. 김정은이 김일성을 닮은 것은 ‘격세유전(隔世遺傳·손자 세대 이후에 나타나는 유전)으로 매우 정상적’이라고도 평했다. 많은 설왕설래에도 불구, 그는 선친 김정일과는 확실하게 차별화된 행보를 보여 세대를 걸러 나타나는 ‘격세유전(atavism)’으로 조부인 김일성 스타일과 흡사하다는 평가다. 김정은의 통치 스타일은 김일성처럼 대중과의 스킨십 강화, 공개적인 대중 연설, 상대적으로 민생을 중시하는 정치, 대남 초강경 기조, 경제개혁 가능성 시사 등 통치방법도 유사하다. 김정은이 옷차림과 걸음걸이, 웃는 모습 등에서 할아버지를 본받으려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국민을 아낀다는 인상을 주려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설명이다. 배를 내밀고 걷는 모습은 ‘타고난 위인’이라는 느낌을 전하려는 의도라고 분석했다(조선일보, 2013.1.24.). ‘뿔테 안경에 뒷짐’을 쥐고 걷는 보행과 선대(先代) 패션을 따라 하는 행태는 폐쇄적인 독재 국가의 집권자인 만큼 단순한 패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선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연상케 하는 선글라스와 카키색 점퍼 차림의 연설 등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권력을 승계한 김 위원장으로서는 인민들에게 선대(先代) 향수를 자극함으로써 체제의 정통성을 부각,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다지는 패션 정치의 일환인 셈이다. 선친인 김정일 위원장이 지난 74년 후계자로 공식 지명된 이후 92년 인민군 창건기념일 때 딱 한 문장이 전부인 “영웅적 조선인민군 장병들에게 영광 있으라”고 한차례 연설한 데 비해 김일성은 해마다 신년사도 직접 읽고, 주민들과도 스스럼없이 접촉했었다. 이처럼 김정은의 할아버지 따라 하기는 ‘할아버지의 업적’에 기대 3대 세습체제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지금보다 형편이 나았던 김일성 시대를 상기시키기 위해 권위주의적인 아버지 김정일식 리더십보다는 주민과 병사들을 챙기는 ‘김일성식 수령 리더십’을 차용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조부 김일성과 함께 찍은 사진이 없고, 생전에 만나지 못한 태생적 한계극복을 위한 눈물겨운 이미지 조작이라는 평가다. 공포통치 용인술, “닭 목을 쳐 원숭이 길들인다”는 ‘살계경후(殺鷄儆侯)’ 전술 김정은의 용인술(用人術)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공포통치의 전형(典型)을 보여준다. 집권 초 김정은은 체제 단속과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해 ‘징역형도 무조건 공개처형’, ‘탈북자 무조건 사살’ ‘군부숙청’ 등 ‘공포심을 자극’하며 통치했다. 당시 주민들은 “어리다고 우습게 보지 마라”는 김정은의 공포통치라고 수군거리며 무시하는 분위기였다. 고위 탈북자 최모씨는 “1998년 공식 집권한 김정일은 ‘고난의 행군’으로 사회가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총소리를 울려라’고 인민보안부에 지시해 절도범까지 총살했다”며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고 김정은도 아비가 했던 짓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 같다”고 했다(조선일보, 2011.12.15.). 집권 초 27세의 세습 권력자로 권력 기반이 취약했던 김정은은 이복형인 김정남을 지지,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할아버지의 사위이자 아버지의 매제였던 고숙 장성택을 가차 없이 숙청, 자신의 권좌를 넘보거나 걸림돌이 되면 가차 없이 제거한다는 본보기를 시현했다. 모택동이 자신을 위협하는 유소기 임표 등 2인자 제거를 통해 일벌백계(一罰百戒) 로 본보기를 보인 것과 유사한 통치 수법이다. 김정은은 곡예장의 원숭이가 재주를 부리지 않자 ‘원숭이는 피를 싫어한다’는 속설을 믿는 주인이 “닭의 목을 쳐 공포로써 원숭이를 길들였다”는 ‘살계경후(殺鷄儆侯)’ 고사를 실천한 셈이다. 원숭이(侯)가 보는 앞에서 목이 잘린 닭(鷄)이 순식간에 피가 솟구치고 파닥거리다 죽자 공포에 질린 원숭이는 그제야 주인의 징 소리에 따라 필사적으로 주인이 시키는 대로 재주를 부리게 된다. 목숨을 건 생존본능을 자극하는 ‘살계경후’가 먹혀들게 하려면 되도록 ‘큰 닭’을 대상으로 피를 뿌리게 할 필요가 있다. 그럴수록 원숭이를 잘 길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손자병법의 26계(計)에 해당하는 지상매괴(指桑罵槐·뽕나무를 가리키며 회나무를 꾸짖는다) 같은 전술이다. 강력한 적을 제압해 다른 조직원들에게 경고를 보낼 때 흔히 쓰는 계책이다. 김정은은 권력층에 피바람을 예고, 누구도 권력을 넘보거나 까불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경고로 유일 영도체계를 확립한 것이다. 강태공(姜太公)이 제왕학 교과서인 『육도(六韜)』에서 “한 사람을 죽여 삼군(三軍)에게 경각심을 줄 수 있다면 그를 죽이고, 한 사람에게 상을 주어 천하를 기쁘게 할 수 있다면 그에게 상을 주라”고 했다. 한 사람을 벌해 다른 사람에게 경고한다는 의미로, 공포심을 극대화해 뜻하는 바를 도모한다는 말이다. 『한서(漢書)』는 ‘하나로써 백을 경고하면, 모든 사람이 복종하게 된다. 공포감은 스스로 새롭게 변화시킨다(以一警百, 使民皆服, 恐懼改行自新).’고 했다. 2013년 12월 조선중앙통신은 당시 장성택 실각과 관련, “장은 겉으로는 당과 수령을 받드는 척 순종하면서 속으로는 딴마음을 품는” 양봉음위(陽奉陰違)식의 종파적 행위를 일삼았다”며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을 천세만세 높이 받들어 모시기 위한 사업을 외면하고 각방으로 방해하는 배신행위를 감행하였다”고 죄상을 밝혔다. 부자(父子)간에도 "재산은 나누어도 권력은 나누지 못한다"는 만고의 진리를 몰각, 방심한 자업자득이었다.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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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 정치가 교본 『군주론』 실천하는 김정은 “인간들이란 다정하게 안아주거나 아니면 아주 완벽하게 짓밟아 철저히 뭉개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사소한 피해에 대해서는 보복하려 들지만, 엄청난 피해에 대해서는 감히 복수할 엄두조차 못 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려면 복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예 완전히 절멸(絶滅)시켜야 한다.” (마키아벨리, 『군주론』) 교황청이 금서로 지정한 ‘악마의 책’ 『군주론』은 세기적 독재자인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애독한 ‘독재자 교본’으로 군주, 즉 최고 통치자가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 권모술수(權謀術數)의 보고다. 권력에 대한 적나라(赤裸裸)한 현실주의적인 접근법을 통해 군주의 행동과 선택에 대한 방법론을 제시한 『군주론』은 독재적인 정치가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집권 이듬해인 지난 2013년 12월, 공화국 형법 제60조에 따라 고모부이자 정권 창출 일등 공신인 후견자 장성택(張成澤, 1946년 1월 22일 ~ 2013년 12월 12일)을 국가반역죄로 처형했다. ‘흉악한 정치적 야심가, 음모가이며 만고역적(萬古逆賊)인 장성택’을 ‘혁명(革命)과 인민의 이름’으로 준열히 단죄 규탄, 사형에 처하기로 판결하고 즉시 집행한 것이다. 김정은 자신의 등극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친고모 남편이자 고숙(姑叔)인 장성택에 대한 잔혹한 처형은 ‘정치의 본질은 투쟁’ 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김일성 사위이자 김정일 처남인 장성택은 김정일의 권력 승계과정에서도 김정일 라이벌이었던 숙부 김영주와 이복동생 김평일 등을 제거한 고굉지신(股肱之臣)이었다. 그야말로 ‘재산과 명예는 나눌 수 있지만, 권력은 부자(父子)간에도 나누어 가질 수 없다’고 했던가. 서양의 ‘제왕학’을 집대성한 『군주론』은 ‘잔인함과 인자함에 대하여: 군주는 공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사랑받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를 다룬 용인술에서 ‘군주는 여우의 교활한 지혜와 폭력적인 사자의 힘’을 겸비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사자는 덫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없고, 여우는 늑대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없다. 따라서 함정을 알아보는 여우가 되어야 하고, 이리를 도망가게 하기 위해서는 사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군주란 정직, 의리, 겸손 등 도덕적 덕목을 갖춰야 하지만 여기에만 치중하다 보면 권력 유지는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속임수, 살인과 같은 비도덕적 행위는 군주가 필수적으로 갖춰야 하는 덕목이다. 단, 국민 혹은 나라를 위해 옳은 목적으로 행할 때 말이다.” 『군주론』의 충실한 실천자 김정은은 “현명한 잔인함이 진정한 자비다”라는 마키아벨리 명언대로 자신의 킹메이커이자 2인자였던 고모부 장성택이 중국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에게 자신을 이복형인 김정남으로 교체하려 상의했다는 밀고에 격노, 반역과 부패 혐의를 적용, 국가전복음모죄로 가차 없이 처형한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20년 2월 열린 베트남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김정은과의 비화를 전했다. 김정은이 북한 고위 간부들이 다니는 계단에 ‘2013년 장성택을 처형한 후 목이 없는 시신의 가슴 위에 얼굴을 올려놓아’ 전시한 ‘엽기적인 행위’를 자랑삼아 얘기했다는 것. (‘워터게이트’ 특종 기자 밥 우드워드, 『격노:Rage』, 2020.9.) 추측건대 “인간은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등에만 칼을 꽂기 마련이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하더라도 그는 자신에게 보복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라는 권력투쟁의 원리를 몰각(沒却)한 장성택의 의표(意表)를 찔러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자신의 절대권력에 걸림돌이 될 화근(禍根)을 제거한 것이다. 김정은은 “군주는 사랑받기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낫다. 하지만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미워지는 것을 피하는 것이 좋다.”는 인간의 야비한 본성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군주론』의 가르침을 현실 정치에서 주체적으로 실천한 셈이다. 이후 장성택 계보 고위인사를 포함, 1000여 명의 주요 보직 인사를 대대적으로 숙청한 뒤 3년여 뒤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김일성의 사랑을 받고 자란 ‘백두혈통의 장자인 이복형’ 김정남을 제거, 체제 도전 세력에게 본보기성으로 강력한 경고를 보냈다. 2017년 2월 13일 오전 9시 대낮, 사람들로 북적이는 말레이시아 제2국제공항 대합실에서 ‘비운의 황태자 김정남’ 얼굴에 29세인 베트남 국적 여성 공작원이 화학무기용 무색무취 신경작용제 VX를 손바닥으로 문질러 절명케 했다. 2.33초라는 순식간에 흔적을 찾기 힘든 치명적인 독극물을 이용한 암살이었다. 김정은 집권에 반감을 품은 북한 내부 세력의 ‘김정남 옹립’ 등 반(反)김정은 책동 근원을 제거한다는 참초제근(斬草除根)이다. ‘잡초를 없애려면 뿌리까지 뽑아야 한다’는{『춘추좌전(春秋左傳)』 ‘은공(隱公) 6년(BC 707년)’} 권력의 논리를 따른 것이다. 권좌에 위협이 되는 잠룡을 포함, ‘누구도 예외 없이’ 화근(禍根)을 선제적으로 제거하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야수(野獸)적인 권력특성인 공포통치로 권부 인사들을 죽음에 대한 ‘위협적인 공포’로 얼어붙게 한 것이다. 히틀러를 철저하게 벤치마킹하는 김정은 통치전략 김정은 독재체제 롤 모델인 히틀러 나치 체제는 북한의 벤치마킹 대상이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김정은은 물론 “김정일이 아돌프 히틀러를 존경해 잠잘 때 그가 지은 『나의 투쟁』을 ‘베고 잔다고 말할’ 정도로 부자(父子)가 히틀러에 대해 우호적”이라고 전한다. 김정일이 명절 때 간부들에게 고급 양주나 이탈리아 양복 천과 같은 사치품을 선물했지만, 김정은은 운동 관련 외국산 스포츠용품이나 음악 CD, 세계유머집 등의 책으로 선물품목이 바뀌었다. 김은 집권 초기인 2013년 자기의 생일(1월 8일)을 기념, 당 중앙위원회 부장급(제1부부장, 군단장급 이상 포함) 고위 간부들에게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선물했다. 저작권법을 피하면서 김씨 일가와 그 특권층만의 문화적 취향을 위해 세계 유명도서를 100권만 비공개로 번역 출판하는 ‘100부 도서’(1970년대 말 처음 등장한 ‘100부 도서’는 소설을 좋아했던 김일성 개인을 위해 외국 유명소설들을 불법적으로 들여와 출판한 데서 유래)로 인쇄된 『나의 투쟁』은 김정은 통치의 지침서로 알려져 있다. 평양 파워 엘리트들 사이에선 김이 스위스 유학 때 히틀러에 심취했고, 장성택 처형에서처럼 국민을 공포에 질리게 하는 잔혹한 고문을 일삼은 게슈타포 통치방식을 따라 하고 있다는 것. 『뉴욕포스트』는 ‘Heil Kim Jong Un!(김정은 만세!)’라는 문장으로 시작된 기사에서 “김정은이 『나의 투쟁』에 심취해 있다”라며 “김정은이 대학 시절 히틀러의 애인 에바 브라운에 대해 심도 있는 연구를 했고, 북한의 인민보안대장이 나치의 비밀경찰 게슈타포에 대한 언급을 여러 번 했다”라고 보도했다. (노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 때 눈물 보인 ‘계몽 군주’ 김정은의 본모습, 최우석 기자, 월간조선 2020년 11월호) 신비주의적 유사 종교에 기초한 유대를 강조하면서 자신을 ‘메시아’로 상징조작, 히틀러 집권 후 나치 교본이 된 『나의 투쟁』은 히틀러가 1923년 뮌헨 폭동을 일으킨 쿠데타 혐의로 갇혔을 때 루돌프 헤스에게 구술(口述)해 펴낸 책이다. 반(反)유대 및 인종주의 이념을 표방, 히틀러 집권 당시에는 나치당원의 필독서로 전 세계적으로 1500여만 부가 팔리며 널리 읽히기도 했다. 독일 당국은 2014년 히틀러 성장과 정치투쟁 과정 등이 고스란히 담긴 『나의 투쟁』 뿐 아니라 히틀러 저술에 대한 ‘무비판적 출간’을 전면 불허했다. 김정은은 간부들에게 『나의 투쟁』을 선물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패전국 독일을 짧은 기간에 재건한 히틀러의 ‘제3 제국’을 깊이 연구하고 적용 방안을 모색하라”라고 지시했다. 핵실험·장거리 미사일 발사 등으로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 제재를 받고 ‘핵·경제 병진 노선’으로 전체주의 국가를 장악한 자신과 유럽대륙을 전쟁 공포로 떨게 했던 제2차 세계대전 전야의 히틀러를 동일시하는 심리적 기제가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김은 또 ‘거짓말은 거창하게 하라’는 히틀러의 대중 기만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독점자본주의 옹호, 반사회주의, 반공산주의자였던 히틀러는 대중을 끌어들이기 위한 기만 술책으로 사회주의적 정책을 내세웠다. 북한도 ‘사회주의 낙원’ 건설이라는 장밋빛 공약으로 선전, 세뇌작업을 펼치고 있다. 히틀러가 『나의 투쟁』 속에서 대중조작의 진수(眞髓)를 설파한 ‘거짓말을 하려거든 거창하게 하라는 원리’는 “그것 자체가 완전한 진실이며 거창한 거짓말에는 반드시 사람들이 그것을 믿게 하는 힘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박하고도 단순한 마음으로 하는 사소한 거짓말은 일반 대중도 가끔 하지만, 대규모 속임수 술책을 쓰는 것은 수치스러워하기에 그들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므로 오히려 사소한 거짓말보다는 거창한 거짓말에 간단히 속아 넘어가기 쉽다. 엄청난 거짓말을 만들어낸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겐 생각지도 못할 일이며, 야비하게 진실을 왜곡시킬 수 있을 만큼 뻔뻔스러운 인간도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을 것이다.” 히틀러 통치 기간 독일국민 대다수는 파시즘 특유의 선전 선동을 포함한 흑색선전 즉 거짓선동(demagogy:대중 선동을 위한 정치적인 허위 선전이나 인신공격)에 속아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전쟁에 패할 때까지 히틀러를 ‘강제가 아닌 진정으로 열망’하고 진심을 담은 자발적 의지에 따라 영웅적 지도자로 인식하고 추종했다. 이처럼 김정은은 히틀러 시대의 여러 통치술을 따르고 있다. 그는 “독일의 단결과 나치 사상 전파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한 것은 스포츠”라며 “모든 인민이 체육전문가가 되어야 전쟁에서도 승리할 체력을 가질 수 있다”며 2012년 말 ‘국가체육지도위원회’를 신설, 스포츠를 장려했다. “히틀러의 게르만족 우월성 주창은 출산장려정책에서 잘 나타났다”며 ‘한 가정 3자녀 낳기 운동’을 적극적으로 격려하고 지원해주도록 지시했다. 출산장려정책의 총괄 지휘는 김정은의 아내 리설주가 맡고 있으며 이를 통해 그를 ‘조선의 어머니’로 선전하는 작업이 추진되고 있다. 체제 선전을 위해 ‘조선소년단’을 조직, 9세부터 철저하게 세뇌 교육을 시도하는 것도 나치 체제의 벤치마킹이다. 세습 정당화와 체제유지를 위한 세뇌 교육을 위해 조직된 ‘소년단’은 히틀러가 1920년대 소년병 양성을 목표로 청소년에게 나치사상을 주입하기 위해 창설한 청소년 조직 ‘히틀러유겐트’와 닮은꼴이다. 다년간의 세뇌로 히틀러를 광적으로 섬긴 ‘히틀러유겐트’는 노르망디 전투 등에서 연합군에 맞서 난폭하고 야만적으로 집요하게 싸웠다. 김정은도 목에 빨간 소년단 넥타이를 맨 ‘조선소년단’ 창립기념 행사에 참석, 4만 명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집권 후 두 번째 공개연설을 통해 격려했다. 그는 “조선소년단이 오늘처럼 혁명 계승자들의 힘 있는 조직으로 자랑을 떨치게 된 것은 한없이 숭고한 위대한 김일성 대원수님과 김정일 대원수님의 은혜로운 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역설, 히틀러 통치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세뇌 공작을 펼치고 있다. 히틀러는 ‘독일 소녀연맹(German Girls' League)’을 조직. ‘바람직한’ 여성상을 주입했다. 10세 소녀부터 포함된 ‘소녀연맹’은 가정과 국가에 봉사하는 여성을 ‘구원(久遠)의 여인상’으로 키워내는 것을 목표로 했다. 히틀러의 개인적 여성관은 “부드럽고, 상냥하고, 맹해야(tender, sweet, and stupid) 한다”는 캐릭터로 ‘나는 독일과 결혼했다’며 내연녀로 지내다가 독일 패배(1945년 5월 8일 항복선언) 전인 4월 30일, 동반자살 40시간 전 결혼한 애인 에바 브라운을 연상시킨다. 패배로 베를린 함락이 임박, 권총으로 자살한 히틀러가 청산가리를 줘 자살케 한 브라운은 당시 33세(히틀러 56세). 개인 취향과 국가 목표가 다른 히틀러의 여성관은 이중적이었다. 장기간 혹독한 훈련 등으로 북한 주민들의 피눈물이 담긴 대규모 카드섹션과 다양한 퍼포먼스로 구성된 ‘아리랑 공연’은 어린 학생들을 포함, 군중 10만여 명이 동원해 김일성·김정일 부자 우상화와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세계적 퍼포먼스. 2002년 김일성 생일 90돌을 맞아 세상에 공개된 ‘아리랑’은 기네스북에 등재될 만큼 세계최대 규모의 집단체조. 북한에서는 “체육 기교와 사상 예술성이 배합된 대중적인 체육 형식”이라고 정의하고, “청소년 학생들과 노동자들을 건장한 체력으로 튼튼히 단련시키고 조직성, 규율, 집단주의 정신을 키우는 효과적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김씨 정권을 과시하기 위한 노예들의 대축제로 비판받는 ‘아리랑’을 도올 김용옥은 ‘이상 국가를 위한 집단체조’라고 찬탄한 바 있다. CNN이 “지구상에서 가장 놀라운 쇼이자, 동시에 최악의 잔인함을 도출한 쇼”라고 평가한 ‘아리랑’ 집단체조는 1930년대 뉘른베르크에서 벌인 히틀러의 나치 전당대회 모방작품이다. 1920년대 시작, 최고 70만여 명이 동원되기도 한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전설’인 레니 리펜슈탈 감독의 1935년 작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홍보 다큐멘터리 ‘의지의 승리’란 영화(1934년 9월 5일부터 10일까지 개최된 뉘른베르크집회)로 제작되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지금도 선전·선동 영화의 전범(典範)으로 일컬어진다. 김정은은 히틀러가 즐겨 입고, 할아버지가 애용했던 롱코트 패션도 따라 하고 있다. 젊은 시절 미술가를 꿈꿨던 히틀러는 패션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다른 어떤 전략 못지않게 전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고, 나치 조직 안에 의복 관련 정책을 전담케 하는 ‘독일 패션국(Deutsches Modeamt)’을 설립, 군복 색깔과 ‘하켄크로이츠(卐:Hakenkreuz:‘갈고리’를 뜻하는 ‘하켄 Haken’에 ‘십자가’를 뜻하는 ‘크로이츠 Kreuz’가 합쳐진 조어)’ 마크 등 디자인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게르만족과 아리아인의 인종적 우월성을 주창하며 반(反)유대인 투쟁을 펼쳐온 히틀러가 게르만 고유의 상징이었던 나치 독일을 상징하는 갈고리 십자가 하켄크로이츠는 1920년 나치당 기로, 1935년엔 독일 국기로 제정됐다. 김일성 배지를 신성시하고, 전 국민이 착용케 하는 것도 이런 상징조작의 하나로 보인다. 히틀러는 멋있는 ‘군복의 판타지’가 청년들을 전쟁에 끌어들이는 유인책임을 간파, 청년들이 멋진 제복의 모습에 반해 앞다퉈 나치 대열에 합류하도록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초라한 군복은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줄 수 없고, 멋지고 강한 존재라는 인상을 심어주지 못한다며 침략과 패션을 결합해 나치 특유의 멋지고 독특한 군복 패션디자인으로 젊은이들을 유혹한 것이다. 직물공장 집안에서 태어난 ‘나치 선전문화상 괴벨스 박사’는 어린 시절 소아마비로 다리가 굽어 불우한 시절을 보내며 병역까지 거부당했으나, 패션에서는 완벽을 추구했다. 출세한 뒤 수백 벌의 정장을 가진 그는 같은 옷을 두 번 다시 입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나치당이 패션을 중시하면서 독일 패션브랜드 ‘보스(Hugo Boss)’ 등 의류업자들과 디자이너들이 가세했다. 보스는 독일군 군복은 물론 나치돌격대, 히틀러 청년단, SS 친위대 등의 제복을 만들었다. 이들이 제작, 납품한 악(惡)을 상징하는 검정 일색의 정장과 해골이 그려진 모자는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샤넬, 크리스티앙 디오르, 루이뷔통 등도 나치와 호흡을 맞추며 성장, 나치에 동조했던 과거사와 상관없이 지금도 패션계를 주도하고 있다. 김정은이 즐겨 입는 가죽 롱코트 등은 김정은의 ‘패션 통치’로 롱코트 차림으로 파리에 입성한 히틀러의 패션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2021년 1월 제8차 노동당 대회를 기념하는 열병식에서 김정은을 비롯해 김여정·현송월 당 부부장, 조용원 당 비서만 가죽 롱코트를 입고 나와 ‘패션으로 권력을 드러내는’ 패션 통치의 단면을 보여줬다. ‘주체 조선의 태양’은 김일성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김정은의 자아도취 북한의 야간 행사는 스케일로 대중을 압도하는 대규모 이벤트와 ‘빛의 은유(隱喩)’를 선전 선동에 적극적으로 활용한 히틀러의 심야 행사를 벤치마킹한 것. 북한은 2018년 9월 정권 수립 70주년 행사까지는 대부분 오전에 열병식을 개최했으나, 김정은 집권 후 10년간 노동당 창건·정권 수립일 등을 계기로 총 12차례 열병식을 개최했다. 이 가운데 2020년 10월 10일 당 창건 75주년부터는 다섯 차례 연속 오후 6시에서 자정 사이 야간 행사로 심야에 진행했다. 2022년 4월 25일 열린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90주년 기념 열병식은 그간 야간 열병식 중 가장 화려했다는 평가다. 형형색색의 야광 조명이 달린 옷을 입은 항공육전병 부대(공수부대)원들의 스카이다이빙과 에어쇼·드론 쇼, 조명 매스게임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김일성광장 앞에서 대동강을 가로질러 맞은편 주체탑 광장까지 부교 2개를 설치해 강변을 가로지르는 폭죽 조명 쇼를 펼친 것이 하이라이트로 꼽힌다. 열병식 때 대동강에 부교를 설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영교 기자, 중앙일보, 2023.2.8.) 북한이 작년 심야 열병식에서 김일성·김정일 시신을 보관 중인 금수산태양궁전을 향해 쏘아 올린 조명 연출도 나치와 닮은꼴. 1933년 뉘른베르크 나치당 대회에서 히틀러 총애를 받던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가 심야에 152개 서치라이트를 12m 간격으로 밤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쏘아 올린 ‘빛의 대성당’(Lichtdom) 퍼포먼스는 20세기 대표적 정치 선동 예술로 꼽힌다. 인간은 심리·뇌과학적으로 낮 보다는 육체적으로 지쳐 있는 밤에 감정을 전달하는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 분비량이 줄어 훨씬 감정적으로 영향을 받는 경향이 있다. 또 밤엔 수면을 유도하는 멜라토닌 분비가 촉진되면서 나른함과 몽롱함이 더해지고 감정적인 진폭도 높아진다. 종교 단체가 각종 수련회 ‘캠프파이어’ 행사나 기도회 등 종교 행사를 심야에 여는 이유는 인간의 이러한 특성을 이용한 것이다. 히틀러는 정치 초년생부터 오전 시간대보다는 저녁 시간에 연설하거나 각종 집회를 개최했다. 대중의 이성과 비판 등 판단력이 활발한 오전보다는 감성적이 되는 석양(夕陽)을 노려, 어스름 해가 지는 때부터 저녁을 활용함으로써 메시지를 비판 없이 수용하게 하려는 의도적 행위였다. 실제 히틀러 시대 나치는 베를린 중심에 있는 브란덴부르크 문 앞 ‘파리저 광장’에서 횃불이나 전기 조명 등을 활용한 군중 집회를 자주 개최했다. 김정은 체제에서 벌어지는 잦은 야간 행사에 대해 전영선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교수는 “북한에서 축포는 단순한 승리의 의미가 아니라 선대에서 폐허가 됐던 땅을 빛으로 밝힌다는 상징성이 크다”라며 “북한의 야간 열병식은 드론, 레이저, 비행쇼, 플레어(강한 열을 뿜어 열추적 미사일을 교란하는 불꽃) 같은 과학기술과 ‘광명(光明)’, ‘여명(黎明)’이라는 상징을 복합적으로 보여주는 이벤트”로 “당의 영도력으로 북한 체제가 안정적이라는 인식을 인민들에게 심어주는 선물 겸 축제의 의미”라고 설명했다. (연합뉴스, 2022.4.28.) 히틀러는 자신이 정치가로 유능하며 가장 위대한 전쟁 영웅이자 독일의 최고 건축가로 믿는 등 각 분야에서 권위자임을 자처했다. 이런 과도한 자기과시와 자기애, 내가 누구보다 우월하고, 대중으로부터 당연히 인정받아야 한다는 나르시시즘에 빠진 절대적인 독재자로 ‘유럽제패’를 꿈꾸며 전쟁을 일으켰던 히틀러를 숭배하는 김정은의 행보가 주목된다. ‘울보’ 눈물의 感性統治, 먹고 사는 문제 미해결, 불만과 피로감 키워 김정은 통치방식이 세월이 흐르며 집권 초기의 서슬 퍼런 공포통치 시절과 달라졌다. 1인 집권 수령체제로 ‘영도력을 확립’하면서 ‘권력은 마상(馬上)에서 잡지만, 통치는 달라야 함’을 인식한 듯하다. 선대(先代)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거나 대중을 사랑하는 애민(愛民)정치 지도자 이미지 메이킹을 통한 감성 정치로 인간적 모습을 부각, 민심 잡기에 나섰다. 2011년 김정일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렸던 김정은은 이듬해 한 음악회 화면에 등장한 선친 김정일의 생전 모습을 보며 울었고, 2014년 수산사업소를 방문해서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회상케 하는 언급이 나오자 눈물을 보였다. 2020년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식, 지난해 7월 정전협정 70주년 열병식에서도 눈물 흘리는 모습을 노출했다. 노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에선 2016년에 발표한 국가 경제발전 달성에 “나라를 위한 자신의 노력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낀다”며 울먹이는가 하면 지난해 전국 어머니 대회에서 “출생률 감소를 막고 어린이 보육 교양을….”이라고 말하다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등 각종 현장에서 울컥하는 등 ‘울보 모습’을 자주 노출하고 있다. 집권 초기 김정은의 눈물은 백두혈통 상속자 이미지를 상징하는 ‘위대한 대원수님들(김일성·김정일)을 경애’하는 선대(先代)와 관련된 게 대부분이었지만 정권장악에 성공하면서 정권 유지를 위해 감성에 호소하며 권력과 리더십을 재구성하는 이미지 즉 “인간적인 모습을 부각해 인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감성 통치’”를 펼치고 있다. 영국 시사주간지(weekly current affairs magazine) 『스펙테이터』는 ‘Why Kim Jong-un keeps crying’이라는 기사에서 “면밀하게 연출해 TV로 방영되는 행사에서 애써 눈물을 참는 모습을 내보이는 데는 나름대로 저의(底意)가 있다. 어머니 대회에선 젊은 세대들에 만연한 비사회주의적 문제들을 엄중히 단속할 것이라며, 자녀에게 사회주의 가치를 고취하는 것은 어머니의 혁명적 과업이라고 강조하면서 우는 모습을 곁들였다.”라고 지적했다. 지배자가 자기의 권력을 신으로부터 주어진 절대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여 인민의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신권정치(神權政治:theocracy) 줄여서 신정(神政)으로 신(神)에 가까운 위상을 누리는 김정은이 눈물을 내비치는 건 극적 효과를 위한 감성 통치를 노린 정치적 노림수다. 체제 선전 목적을 드러내는 행위로, 무엇보다 우선 정권 생존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위한 것이다. ‘인민의 아버지’ 이미지보다는 자애로운 ‘어머니 형상’으로, 자신의 따뜻한 보살핌이 없으면 인민은 배를 곯으며 우는 수밖에 없는 ‘아이 같은 신세’로 세뇌하려 한다. 우상화(偶像化)된 ‘어버이 수령’의 가식적 ‘악어의 눈물’은 독재자 각본에서 나온 내부 지지 부추기용 도구일 뿐이다는 분석이다. 『스펙테이터』는 김정은이 위한다는 가족은 인민이 아니라 열 살짜리 딸 김주애 등 ‘김씨 일가’뿐이라고 꼬집었다. 눈물 정치를 비판한 미국의 경제 매체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세계적으로 우는 모습이 공개된 몇 안 되는 세계 독재자 중 한 명”이라면서 이오시프 스탈린 옛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비공개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릴 듯한 모습을 보였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3선에 도전한 2012년 3월 대선 투표 직후 지지자 집회에서 눈물을 보인 바 있다고 지적했다. 핵으로 무장한 군사 강국에 집착, 백성들의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불만과 피로감만 키워 체제유지가 흔들리고 있는데, ‘울보’처럼 자주 흘리는 눈물의 감성통치(感性統治)로 이미지 변신을 시도한 그의 눈물이 순정(純情)인지 지켜볼 일이다. 미국의 고립주의, 푸틴과의 정상회담으로 강화된 친러시아 행보와 ‘심리적 내전 상태’인 국내 사정 등 6·25 전야와 비슷하게 재편되는 국제정세 속에서 자연재해와 만성적 식량난에 시달리는 김정은이 전쟁이라는 돌파구를 모색할만하다. 반대의견도 있지만, 김정은 정권이 전쟁을 결심했고 한반도 정세가 6·25 이후 가장 위험한 국면으로 진입했다는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전차, 기계화 보병, 항공기, 공수부대를 이용, 기동성을 최대한 추구한 전격전(電撃戰) 작전으로 유럽 대부분을 점령했던 것처럼 히틀러를 숭배한다는 김정은이 ‘3일 작전’ 등을 거론, 한반도의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김정은은 지난달 말 심각한 수해로 자강도에서만 2500명 이상 사망 추산 보도를 ‘날조’라며 “적은 변할 수 없는 적”이라고 적대감을 분명히 드러냈다. 할아버지 김일성에게 부여됐던 ‘태양’의 호칭마저 떼어내고 선대가 열망하던 ‘절대무기 원자폭탄까지 확보해 ‘주체 조선의 태양’이라는 김정은의 자아도취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심각하게 우려된다.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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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모든 것이 다 변하여도 총만은 자기 주인을 배반하지 않습니다. 총은 혁명가의 영원한 길동무이며 동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총에 대한 나의 지론이고 총관입니다.” (김정일 장군 일화집, 평양출판사, 2003, p.55) 김정은(金正恩, 1984년 1월 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 지도자는 28세에 세계 최연소로 집권, 12년째 권좌를 유지하며 불혹(不惑)의 장년(壯年)인 40세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 ‘준비 없는 불안정한 리더십’으로 체제유지가 힘들 것이라는 국내외 전망이 무색하게 ‘권불(權不) 10년’을 넘어 유일 영도체제를 확립, ‘총’으로 철권통치를 하고 있다. 모택동의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힘의 논리’를 신봉한 김정일은 17년간 북한을 ‘총’을 통한 무력통치로 선군(先軍) 경제 노선을 관철시켰다. 김정은도 대를 이어 대남 무력적화통일이란 목표하에 ‘선군 지향’의 유훈(遺訓)통치를 근간으로 경제-핵병진 노선을 국가전략으로 채택했다. 그는 근년 핵 무력을 바탕으로 선대 숙원이었던 통일과업 완수를 국시로 설정하고 호시탐탐 ‘남조선’ 점령기회를 노리고 있다. 김정은은 2010년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으로 정치에 참여, 후계자로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선친 김정일 국방위원장(2011년 12월 17일 사망) 사후 대권을 갑자기 승계한 그는 2주 뒤 2011년 12월 29일 김정일 추도대회에서 영도자로 선포됐다. 다음 날 3대 세습으로 당 정치국 회의에서 북한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가 되었다. 이듬해인 2012년 4월 11일 조선로동당 대표자 회의에서 노동당 제1비서, 이틀 뒤인 13일 최고 인민 회의에서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어 김정일 직책을 모두 세습해 12년째 최고 존엄으로 군림하고 있다. 김정은은 김정일의 세 번째 부인인 고용희와의 사이에서 2남 1녀 중 차남으로 강원도 원산시 송천동 원산에서 태어났다. 재일교포 출신인 고용희는 평양 음악무용종합대에서 무용을 전공, 1972년 만수대예술단원이 된 뒤 김정일이 주말에 여는 파티에서 김정일 눈에 들어 1979년 창광산 관저 안주인이 되었다. 그녀는 김정일 총애를 받은 셋째 부인으로 김정철 김정은과 김여정을 낳으며 퍼스트레이디 자리를 굳혔다. 고용희는 백두혈통 서열에서 정실부인 소생인 김정남에 이어 셋째 아들로 후계구도에서 밀리는 처지였던 김정은을 ‘최고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제왕학 교육’을 염두에 두고, 일찍이 해외로 유학시킨 뒤 강하게 키운다며 빡센 군 생활을 시킨 것으로 알려진다. 김정일 최측근 인물들에게도 은덕을 베풀며 ‘김정은 세자책봉’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아들의 등극을 보지 못하고 유방암으로 2004년 프랑스에서 세상을 떴다. 학창시절 ‘박운(박은)’(Pak Un)이라는 가명으로 통한 김은 어머니 뜻에 따라 프랑스를 거쳐 16세 때 스위스에 유학, 베른 근교 리베펠트-슈타인횔츨리 공립학교에서 김나지움(Gymnasium, 일반계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그는 학교 기록에 따르면 중학교 인근의 한 초등학교에서 독일어 보충학습을 받은 뒤 1998년 8월에 7학년(한국의 중학교 1학년 해당)으로 편입, 9학년이던 2000년 말 학교를 그만뒀다. 당시 담임이었던 시모네 쿤은 일본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 인터뷰에서 “그가 점심시간에 교무실로 와서 ‘내일 귀국한다’고 말한 뒤, 다음날부터 나오지 않았다”고 전했다. 김정은은 귀국 뒤, 2000년대 중반부터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아버지 김정일과 권력 수뇌부 주변의 시선을 끌기 시작했다. 2004년에는 부모 권유로 조선인민군에서 하전사로 입대, 1년 6개월 동안 군 복무를 한 뒤 하전사에서 곧바로 중장으로 진급했다. 김정일이 자신의 후계자로 김정은 지명을 중국에 알린 시점은 2009년 3~4월 전후. 김정일은 자신의 사후를 염두에 두고 자신을 대신해 엘리트들을 감시하는 중책인 국가 안전보위부장에 임명, 정권을 확고하게 장악할 수 있도록 포석했다. 당시 국내 대북 전문가와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도 김정은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 등을 들며 후계자 지명설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2010년 9월 27일 조선인민군 대장 임명, 다음날 3차 노동당 대표 회의에서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 및 당 중앙위원 임명 절차를 거치며 김정은은 북조선의 국가통치권 후계자로 공식 확정되었다. 2000년대 중후반부터 당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그는 이로써 실질적인 후계자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조부 김일성이 김형직의 장남이고, 선친 김정일 역시 김일성의 장남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장자 승계 원칙’을 깨고 3남임에도 불구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 지도자에 취임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김정일은 김일성 후계를 둘러싼 암투가 치열한 가운데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직계는 ‘원가지’, 방계는 ‘곁가지’로 규정하는 프레임을 씌워 정적들을 제거했다. 원가지는 김일성 김정숙 사이의 장남인 김정일로 이어지는 적장자(嫡長子). 김일성 장남으로 직계인 자신에게 백두혈통을 잇는 정통성이 있다며 4년여 치열한 소위 ‘혈통’ 투쟁을 벌인 끝에 삼촌 김영주와 이복동생을 ‘곁가지’로 몰아 제거한 것이다. 그는 전통적으로 정실(正室)부인이 낳은 자식 중 맏아들이 승계하는 불문율을 명분으로 1974년 2월, 북한 당 중앙위원회 5기 8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 후계자로 공식 승계했다. 집권 뒤 계모 김성애와 이복동생 김평일 김영일을 모두 ‘곁가지’로 분류, 철저히 견제했다. 북한도 유교적인 장자 상속사회라는 사회구조와 정서가 남아있어 한때 김정일 사후 맏아들인 김정남(金正男, 1971년 5월 10일 ~ 2017년 2월 13일)이 후계구도에서 가장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일성도 원가지인 종손(宗孫) 김정남을 총애, 후계구도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유력한 후계자로 여겨지던 김정남은 조선 컴퓨터중앙위원회 위원장, 1997년 12월 주캄보디아 전권대사, 1998년 3월 국가 안전보위부 제1차장을 역임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스위스에 유학, 자유 세계를 경험한 그는 서구식 민주주의로의 개혁을 거론할 정도로 자유분방한 개방적 성격이었다. 2002년 국가 예산 횡령 혐의로 좌천된 장성택을 결정적으로 구해준 ‘김정남 어머니 성혜림’의 음덕으로 장성택은 김정일 후계자로 김정남을 옹립하고 나섰다. 그러나 권력 핵심 요직에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임명, 김정일 시대 2인자로 ‘킹메이커’역을 자임했던 장성택이 지원하며 보살펴온 김정남을 버리고 ‘어리고 만만한’ 3남 김정은을 지지하면서 후계구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김정남은 2001년 도미니카 위조 여권으로 일본에 밀입국을 시도하다 추방되어 김정일의 분노를 샀고, 후계구도에서 밀려났다. 차남 김정철은 내성적인 성격으로 유약하고 무능력해 부하들을 휘어잡지 못한다는 이유로 배제되면서 김정일 사후 자연스럽게 권좌가 3남인 김정은에게 넘어간 것이다. 김정은은 김정일 아들 중에서 막내임에도 불구하고 두 형에 비해 성격이 억세고 조직 장악력을 평가받아 형들을 제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 지도자에 올랐다. 전통적인 장자(長子) 우선 사회에서 3남으로 후계자가 된 인물은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세종대왕이나 재벌기업 삼성에서 3남인 이건희 회장이 승계한 사례는 이를 증명한다. 후계자 옹립 과정에서 북 수뇌부는 김정은을 포병 전문가로 미화, 영도자 자질을 부각시켰다.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철저한 계획에 따른 공격으로 김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한 공작이었다. 일본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은 12월 1일 북측 소식통을 인용, “김정은의 이름으로 지난달 초 ‘적의 도발 행위에 언제라도 반격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라’는 지령이 북한군 간부들에게 하달됐다”고 보도, 그의 업적을 극대화해 김정은 후계구도를 확실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되었다. 갑작스러운 권력 이양과 통치력의 미숙, 핵 개발 집중과 최고위층 무분별한 숙청 등 폭력성이 부각되면서 정권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유엔 등 국제적인 제재 속에서도 건재하고, 심각한 경제난에도 독재적인 철권통치로 권력은 안정됐다는 평가다. 권력 행사에 거추장스러운 선대의 참모들은 물론 자신의 후계자 옹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 후견인이자 ‘킹메이커’인 고모부 장성택(2013.12.12.)과 한때 후계자로 거론되던 이복형 김정남(2017.2.13.)까지 숙청, 공포통치로 1인 집권체제를 거의 완벽하게 구축한 것이다. 김정은은 권력의 걸림돌이 될만한 측근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조선 태종 이방원에 비유된다. 이방원은 장자인 양녕대군을 폐세자하고, 이복동생 이방석과 이방번을 척살, 창업 공신 이숙번도 삭탈관직했다. 외척(外戚) 발호를 막는다며 창업 공신이라 할 자신의 처남(민무질과 민무구)을 사사(賜死)했으며 사돈인 세종대왕 장인 심온은 자진(自盡:스스로 자결)하게 했다. 왕권과 후대를 위해서라면 부인과 며느리 집안도 ‘멸문지화’(滅門之禍)에 몰아넣을 수 있는 비정한 군주였다. 조선 왕조 최고의 시대로 평가받는 세종 시대는 이방원이 악역(惡役)을 맡은 사전 정지작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가능성이 크다. 국가는 물론 대기업도 부불삼대(富不三代) 즉 ‘3대 가는 부자가 없다’는 말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1대가 일군 창업 자산이 3대까지 지속하는 사례가 흔치 않다. 3대를 못 넘기고 멸망한 강성제국 진나라의 흥망성쇠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역사상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B.C. 259 ~ B.C. 210, 재위 B.C. 247 ~ B.C. 210)은 13살에 진나라의 왕이 된 뒤 집권 26년째 해인 기원전 221년 중국을 최초로 통일, 전제주의적 중앙집권제의 강성대국 진(秦)나라를 창업, 시황제(始皇帝)로 군림했다. 군현제(郡縣制)에 의한 중앙 집권을 확립하고,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일으켜 사상을 통제하는 한편 도량형과 화폐를 통일시켰다. 시황제가 지방 순시중 50세에 갑자기 죽자 전국은 반란으로 분할되고, 무능한 2세 황제 호해(胡亥)에 이은 진왕 자영 대에 이르러 진시황 사후 5년, 3대 15년 만에 멸망했다. 진 제국은 급진적인 통일 정책, 무거운 세금, 가혹한 형벌을 통한 철권통치와 대규모의 토목 사업에 따르는 국민 생활의 불안 등으로 민심이 정권을 떠나 반란이 일어나 멸망한 것이다. 진시황은 폭정을 통해 사상의 통일을 이루려고 했지만, 민심은 정반대였다.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진나라 멸망은 “진시황은 천성이 고집불통으로 남의 의견을 듣지 않았다.”며 ‘정보와 소통’을 외면, 덕정(德政)을 펴지 못한 것을 가장 큰 이유로 지적했다. 2100년 전 사마천은 망국 요인으로 ‘지도자의 오만(傲慢)’을 지적, ‘마음의 귀를 열어놓지 않으면 처참하게 실패’한다며 소통문제를 중시한 것이다. “충성을 다하여 황제의 잘못을 막지 못했던 이유는 진나라에 꺼리고 피해야 할 습속이 많아 충성 어린 충고를 하는 사람은 말도 끝내기 전에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천하의 뜻있는 지식인들은 듣기만 하고, 두 다리를 모은 채 입을 다물었다. 이 때문에 임금이 바른 도리를 잃었는데도 신하들은 솔직하게 충고하지 못했다. 지혜롭다는 지식인들은 묘책을 내지 못했다. 천하가 어지러워진 다음에도 황제(2대 황제 호혜)는 이런 일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니 이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사마천, <진시황 본기>) 북한은 군사적으로 6차 핵실험으로 세계에서 10번째로 50여 기의 핵탄두(추정)를 확보해 핵 무력을 완성하고, 2017년 11월 29일 장거리 탄도미사일 화성 15형 시험발사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선대에도 하지 못한 세계 최강국인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24년 만의 북한 방문 등 그의 리더십은 내우외환(內憂外患)의 불안 속에서도 북한 처지에서는 상당한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데도 방북한 푸틴과 국내외 압박으로 체제위기에 처한 김정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지난 6월 19일 서명한 새로운 ‘포괄적 전략 동반자 협정’에는 유사시 자동 군사개입 조항이 포함됐다. 회담 뒤 푸틴은 “포괄적 동반자 협정은 무엇보다도 협정 당사자 중 한쪽이 침략당하면 상호 지원을 제공한다”고 말해 이번 방북을 기점으로, 양국이 군사적인 협력 관계를 넘어 소련 시절의 동맹 관계를 복원할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중국보다 북-러의 밀착은 소련의 승인하에 발발한 6·25 전야를 연상시키는 불길한 조짐이다. 올들어 군부대를 집중적으로 찾아 현지 지도하는 가운데 조선조와 일제 말기의 연장선에 있는 ‘김일성 왕조체제’는 심각한 구조적 모순으로 생존 위기에 처해 있다. 스마트폰 700여 만대 보급 등 디지털시대 만개(滿開)로 정보통제가 힘들고 ‘장마당 세대’로 상징되는 알파 세대 청소년들의 의식변화, 심각한 식량난 등으로 3만여 명의 탈북자가 양산되면서 북한 붕괴시나리오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과거 왕조시대에도 폭군이나 암군(暗君) 시대에 간신이나 중상 모략배들이 설치는 것을 비판한 공자는 정치적 비전을 논한 태백 편에서 “지배자가 포악하고 아부배들이 날뛰며 도덕이 행방불명된 나라라면 군자가 안주할 땅이 아니니 탈출하라”고 하였다.(危邦不入, 亂邦不居) 만일 탈출이 불가능하다면 우둔함을 가장하는 자위(自衛)전략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권하였다.(논어 태백편 卷8) 어린 나이에 집권, 10여 년 만에 강대국 정상들과 맞서는 스트롱맨이 되어 철권통치를 계속하고 있는 김정은의 제왕적 통치술은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의 정치 지형의 최대 변수로 등장, 청출어람(靑出於藍)이 될지 호부견자(虎父犬子)로 귀결될지 전 세계가 그를 주목하고 있다. 3대 세습한 그가 갖은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겪으며 나름대로 12년째 조부가 창업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체제 수호에 성공했지만, 국내외에서 목을 조여오는 위기의 기로에서 어떻게 수성(守城)해 낼지 지켜볼 일이다.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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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째 이 땅에 뿌리내린 가족 “내가 웬만한 전라도 사람보다 더 징한 ‘전라도 사람 인요한’으로 살게 된 사연들의 기록이다. 나는 내 핏속에 흐르는 한국인 기질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나를 키운 8할은 한국 사람들의 그 뜨거운 정이었다. 내 영혼은 한국 사람들의 그 ‘강직하고 따뜻한 심성’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것에 길들여졌다.”(《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 인요한, 2006. 생각의 나무) 130년 전 갑오년(1894년)은 갑오경장, 동학혁명, 청일전쟁이 한 해에 동시다발로 일어난 천지개벽이라 할 미증유의 혼란으로 한 시대를 마감하는 시대였다. 갑진년인 올해는 1월 대만 총통선거를 필두로 미국, 러시아, 우크라이나, 대만, 일본, 영국 등 20여 개국을 포함해 대한민국도 4월 총선을 앞두고 있어 그야말로 천하 대란의 시대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대로 새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으로 등장하면서 기대를 모으는 것처럼 새 인물들이 정치판에 등장해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서울 강서구청장 선거 참패 12일 만인 지난해 10월 26일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으로 혜성처럼 등장했던 인요한(印曜翰·1959년 12월 8일~ )도 의외의 인물. 지난해 12월 11일 당 최고위원회의에 ‘지도부·친윤(친윤석열)·중진 의원들의 불출마·험지 출마(희생)’를 포함한 6개 혁신안을 백서 형태로 보고했으나 험지 출마·불출마론으로 지도부와 갈등 속에 현실정치의 벽을 못 넘고 혁신위는 예정보다 2주 먼저 40여 일 만에 '조기 종료‘했다. 그는 ‘혁신이 혁명보다 어렵다’는 기득권 깨기의 지난(至難)함을 보여 주고, “정치와 거리를 둘 것”이라고 했지만 “다양성 희박한 한국에서 정치판 흔든 미국인 아웃사이더”(WSJ, 2023.12.8.)로 ‘국적·이색 배경·폭넓은 스펙트럼 등 상징적 다양성 주목’으로 정치판을 뒤흔들었다. 혁신위 시작 때 “정치해 본 적 없고, 32년 동안 의사만 해서 공부할 게 많다”며 겸양 자세였지만 치밀하게 계산된 ‘밥상머리 교육’ ‘구들방 아랫목 도덕교육’ ‘매 맞고 우유 먹을래’ 등 그가 툭툭 던진 정치적 메시지는 불멸의 어록(語錄)이 되었다. 인요한의 본명은 존 올더먼 린튼(John Alderman Linton). 한국 이름 성씨 인은 린튼의 린에서 따왔고 요한의 영어식 이름이 존(John)이다. 어린 시절을 대부분 전남 순천에서 보내 영어보다 전라도 사투리가 더 능숙했던 ‘개구쟁이 짠’이로 유명했다. 지금도 가장 좋아하고 허물없이 지내는 사람들은 함께 쥐불놀이하고 서리하러 다니던 순천 친구들이라는 그는 ‘특별귀화 1호’ 한국인으로 2012년 3월 21일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2012년 귀화하면서 얻은 그의 본관은 ‘순천 인(印)씨’. 성씨 본관 등록 당시 순천 인씨 시조(始祖)가 된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 윌리엄 린튼(인돈)과 아버지 휴 린턴(인휴)을 가문의 시조 및 중시조로 삼고 있다. 한국에 5대째 뿌리 내린 그 집안의 120여 년 가족사는 한국 근현대사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조선 고종 때인 1895년 4월 8일 스코틀랜드계 미국인이며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이자 진외증조부(陳外曾祖父)인 유진 벨(Eugene Bell, 배유지·裵裕祉·1868~1925)이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되었다. 이들 가족은 전라북도 전주에 정착했고, 광주·목포 지역에서 현재까지 4대째 선교 및 교육사업을 펼쳐왔다. 1959년 한남대학교 전신인 대전대학을 비롯한 다수의 교육기관과 의료기관을 세웠고, 유진 벨 재단을 출범시켜 북한 결핵 퇴치를 위주로 한 의료 지원에 400억원 넘는 의약품과 의료장비를 지원했다. 인요한의 할아버지 윌리엄 린튼(인돈·1891~1960)은 유진 벨 선교사의 사위다. 미국 조지아공대를 수석 졸업하고 모친 사망 뒤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21세이던 1912년 한국으로 왔다. 이후 48년간 전주와 군산 일대에서 선교와 교육, 의료봉사를 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주치의를 맡았고, 1917년 영명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를 후원했다. 한국 독립운동을 외국 신문을 통해 전파하는 등 해외 홍보를 주도했다. 군산 만세시위를 배후에서 지도했으며,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거부로 고초를 겪은 공로로 2010년 3·1운동 91주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아버지 휴 린턴(인휴·1926~1984)은 전라북도 군산에서 태어났다. 미 해군사관학교를 나와 태평양 전쟁에 참전해 한국인 포로를 돌봤다. 전라남도 지방 도서 및 농촌 지역에 612개 교회를 개척했고, 6·25전쟁 당시 대위 계급으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으며, 이후 선교활동을 하다 순천에서 음주운전 버스에 치여 사망했다. 그의 형인 스티브 린턴(인세반·1950~)은 한양대 교수를 지냈고, 1995년부터 북한 결핵 퇴치 및 의료 지원을 해오고 있는 ‘유진벨 재단’ 회장직을 맡고 있다. 유진벨 재단은 북한에 결핵 진료소 200여 개를 세우고, 어머니는 호암재단 상금 1억원으로 구급차를 사 기증했다. 인요한은 1997년 북한을 처음 방문한 이래 총 29번 방북한 남다른 기록도 갖고 있다. 전라도 출신 열혈청년 1980년대 초반 20대 전라도 출신 열혈청년이었던 그는 연세대 의대 1학년 재학 중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만난다. 그는 당시 대사관 직원을 사칭해 검문소 7개를 거치며 참혹했던 광주 현장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다. 또 <뉴스위크> 등 광주 시민군의 외국 언론 기자회견장에서 5·18 진실을 알리는 영어 통역을 했는데, 이로 인해 전두환 정부 때 추방 경고를 받기도 했다. 이후 ‘요주의 인물’로 찍혀 2년여 보안사 요원의 사찰 대상이었다. 1987년 연세대 의대에서 학사·석사(1992년)·의학박사(1996년), 1990년 고려대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과 석사 등을 취득했다. 1991년 연세대 의과대학 가정의학과 조교수로 시작해 의료인으로 활동했으며, 2012년부터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직을 맡고 있다. 2015년에는 국민의힘 전신인 새누리당 대한민국 대통합위원회 부위원장, 제4대 한국 국제보건의료재단 총재를 맡아 본격적으로 현실 참여에 나섰다. 한국 지형 맞춤형 구급차 개발 1984년 4월 10일 인요한은 부친상을 계기로 한국형 앰뷸런스를 최초로 개발하면서 한국 응급의료학의 초석을 놓았다. 아버지가 순천에서 교회 물품을 싣고 오다가 만취한 기사가 운전하던 관광버스에 치여 중상을 입었을 때였다. 당시 구급차가 없어서 큰 병원이 있는 광주광역시로 택시 뒷좌석에 실려 이송되던 중 사망했다. 1992년 미국 남장로교 측에서 받은 부친 추모 자금을 바탕 삼아 미국 구급차 구조를 본떠 국산 승합차를 개조한 구급차를 제작해 고향인 순천소방서에 기증했다. 한국 국적을 취득한 그가 장차 정계 진출을 이뤄 대한민국 국회의원, 외교관 등으로 임용된다면 그의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지 아직은 짐작하기 어렵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서 1년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세계 41위인 한국 축구를 조련해 ‘4강 신화’를 달성하면서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린 거스 히딩크 전 한국축구 대표팀 감독처럼 그의 정치적 역할을 기대하는 여론도 있다. 쿠바의 체 게바라,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와 함께 의사 출신으로 세계 3대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쑨원(孫文)은 “작은 의사는 병을 고치고, 더 나은 의사는 사람을 고치며, 진정으로 큰 의사는 나라를 고친다(小醫治病 中醫治人 大醫治國).”고 했다. 캐나다 출신 외과 의사로 스페인 내전과 중공의 항일투쟁에 참전한 의료개혁가 노먼 베순은 “질병을 돌보되 사람을 돌보지 못하는 이는 소의(小醫), 사람을 돌보되 사회를 돌보지 못하는 이는 중의(中醫), 질병과 사람, 사회를 통일적으로 파악해 그 모두를 고치는 이가 대의(大醫)”라고 했다. 이들이 혁명이나 사회개혁에 헌신하게 된 것은 사람의 병을 치료하다가 아예 그 질환을 앓게 만든 사회적 병리를 고치기 위해 온 몸을 던진 것이다. 의사 출신인 그 역시 본업과 함께 우리나라 현대 정치사의 격렬한 소용돌이 속에서 활발한 사회 참여를 해왔다. 그렇다면 그는 ‘하와이’에서 케냐 출신 흑인 아버지와 캔자스주 출신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다양한 인종·문화적 경험과 아웃사이더라는 약점을 극복하고 흑인 최초로 미국 대통령이 된 버락 오바마처럼 될 것인가? 결과를 예단하기 어렵지만, 2023년 귀화인·이민자 2세·외국인을 합친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230만여 명(전체 인구 중 4%)에 이르는 현실에서 인요한의 출현은 선진국이라면서도 막다른 길, 즉 ‘아포리아에 빠진 대한민국’의 정치계에 신선한 자극을 준 것은 명백하다. 잠룡이 꿈틀거리고 있다 천마산 자락에서 상통천문(上通天文)하고 하달지리(下達地理)해 세상사를 두루 살핀다는 중찰인사(中察人事)에 능한 노선사(老禪師)는 “앞으로 대의(大醫)가 출현해 병란(兵亂)을 병란(病亂)으로 불의 무도한 천하를 바로잡는 광구천하(匡救天下)에 나서 남북이 자유 통일돼 대한민국은 대륙으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된다. 엄청난 일이 이 시대에 벌어지고 있다. 광구천하가 되면 웅비(雄飛)하는 한민족 시대가 반드시 열릴 것”이라고 전제하고 “일제의 분열정책에 따라 100여 년 동안 국민학교에서부터 청백군으로 나눠 싸움만 훈련받아온 한국인에게 히딩크 같은 용병(傭兵)을 모셔 대한민국의 판을 다시 짜야 할 때가 왔다. 모소대나무는 100년이 지나야 꽃이 핀다는데 ‘적선지가 필유여경’이라고 잠룡이 꿈틀거리고 있다”며 다언삭궁(多言數窮)이니 불여수중(不如守中)이라며 말을 아꼈다. 스님이 예로 든 모소대나무는 희귀종 대나무로 일명 모죽(毛竹)이라 불린다. 이 대나무는 땅이 척박하든 기름지든 파종 후 4년 동안 아무리 물을 주고 가꾸어도 3㎝밖에 자리지 않는다. 하지만 5년이 지나면 손가락만 하던 죽순이 갑자기 하루에 30㎝ 가까이 쑥쑥 자라며 폭발적으로 성장해 대략 6주가 지나면 15m 이상 자라나 텅 비어 있던 대나무밭이 빽빽하고 울창한 대나무 숲으로 변하며 ‘비약적인 발전(quantum leap)’을 이룬다. 황무지에서 불과 두어 달 사이 엄청난 높이의 대나무 숲을 형성한다. 인요한 집안은 장장 4대에 걸쳐 128년 동안 대한민국 남쪽 지방에 깊은 뿌리를 내렸다. 외증조부 유진 벨은 목포에 영흥남학교와 정명여학교(1903년)를 세웠고, 1907년 광주에 ‘유일한 하나님만을 섬긴다’며 ‘으뜸’이라는 뜻을 지닌 숭일(崇一)학교와 1908년 수피아여학교를 설립했다. 광주 최초 병원인 재중병원(현 광주기독병원) 설립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송정리교회(1901년), 해남군 우수영교회(1902년) 등 전라도에 600여 개 교회를 설립했다. 인요한의 국내외 인맥 역시 다양하다. 백수(白壽)를 다하고 지난해 12월 1일 작고한 키신저가 방한 중 복통이 났을 때 치료했고, 미국 대통령을 지냈던 카터, 클린턴, 부시와도 남다른 교류를 맺고 있다고 한다. ‘통합과 화해를 실천’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멘토로 존경한다는 그는 ‘민주당이 김대중 정신을 잃어버렸다’며 민주당은 한 번도 자신을 불러주지 않았다고 한다. 덕망과 경륜을 갖추고도 때를 만나지 못해 은인자중(隱忍自重)하고 있는 정세균 노무현재단 이사장(전 국무총리·국회의장)이 자신의 할아버지가 교장을 지낸 전주 신흥고 출신이라고 자랑하는 그는 “좋은 분으로 큰어른으로 모신다”며 ‘훌륭한 대통령감’이라고 칭송한 바 있다. 예수가 등장하기 직전 세례를 베풀던 구약 시대 최후의 예언자 요한의 이름을 딴 그의 지인지감(知人之鑑)의 귀추가 주목된다. 임채청 동아일보 사장, 지난해 바이든 대통령이 방문한 풍력발전 타워(기둥) 세계 1위 ‘씨에스윈드’ 김성권 회장도 신흥고가 배출한 인물. 조수진 의원도 인요한의 조부모가 교장을 지낸 전주 기전여고 출신으로 사석에서는 그를 ‘스승님’이라고 부른다. 숭일고 출신으로는 팔로군(현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을 작곡한 정율성, 국방부 장관을 지낸 조영길 장군, 최초 100만 관객을 돌파한 ‘서편제’로 전설적 영화감독이 된 임권택이 있고, 서편제 여주인공 오정해는 목포 정명여중 출신. 수피아여고는 현해탄을 넘나들며 트로트 가수로 이름을 날린 김연자, 1970년대 유명 MC 최미나(허정무 축구 감독 부인) 등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18대 대선 때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선거대책위원회에 합류해 호남 유세 때 지지 연설을 하면서 '대한민국 여성 대통령론'을 편 그는 박근혜 대통령 인수위원회에서 국민대통합 부위원장도 지냈다. 모소대나무는 100년 만에 꽃을 피운다는데, 인요한 가문이 4대에 걸쳐 ‘마땅히 머무를 바 없이 마음을 낸다(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금강경)'는 정신으로 이 땅에 뿌린 교육과 의료, 선교의 씨앗들이 어떤 결실로 이어질지, ‘순천 인씨’ 시조인 인요한 박사의 향후 거취가 주목된다.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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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태풍이 읍써서 바다와 갯벌이/ 한번 시원히 뒤집히지 않응께 말이여/ 꼬막들이 영 시원찮다야// 근디 자넨 좀 어쩌께 지냉가/ 자네가 감옥 안 가고 몸 성한께 좋긴 하네만/ 이놈의 시대가 말이여, 너무 오래 태풍이 읍써어/ 정권 왔다니 갔다니 깔짝대는 거 말고 말여/ 썩은 것들 한번 깨끗이 갈아엎는 태풍이 읍써어// 어이 친구, 자네 죽었능가 살았능가 -(시인 박노해 ‘꼬막’) 자칭 ‘천하 잡놈’이라는 인요한 연세대 의대 가정의학과 교수 겸 국제진료센터 소장(64). 전남 순천(順天) 출신인 그는 2023년 10월 23일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에 발탁돼 한 달 넘게 거침없는 행보를 펼쳤다. 대한민국이 경제는 ‘한강의 기적’을 이뤘으나 정치판도 환골탈태(換骨奪胎)해야 한다는 그가 ‘혁신’을 내걸고 동분서주했다. 전라도 특유의 욕을 걸판지게 하지 못해 입이 근질근질하다며, ‘잡놈’은 ‘못되게 구는 사람’이 아니라 ‘박식하고 대인관계 좋은 친구’의 애칭(愛稱)이라고 유권해석('순천에선 욕을 해야 돼!' 인요한, 순천표 ‘욕(?) 강의’ SBS, @집사부일체 75회 2019년 6월 23일)한다. 엘리트와 부자가 권력의 탈을 쓰고 있지만 황금만능주의에 매몰돼 오로지 돈으로 자신을 비롯한 모든 가치를 결정한다. 탐욕과 부도덕을 당당하게 드러낸 정치사기꾼 모리배, 소시오패스 같은 마음과 몸가짐이 매우 천박한 통칭 ‘잡(雜)놈’들이 위선(僞善)을 떨며 설치는 한국 정치판에서 스스로 잡놈임을 당당히 고백(?)하는 그가 오히려 솔찬히 솔직해 보인다. 잡놈에게도 서열이 있어 서해에서 ‘유월 사리’ 때 잡히는 새우는 새하얗고 깨끗해서 ‘육젓’은 새우젓 가운데 최고로 친다. 하지만 ‘오월 사리’ 때 잡히는 새우는 밴댕이 꼴뚜기 새끼 등 온갖 잡것이 뒤섞여 새우젓 취급을 받지 못한다. ‘사람 중에도 못된 짓만 하며 지저분하게 구는 불한당(不汗黨)’을 오월 사리 때 새우 같다고 해서 ‘오사리잡놈’이라 부른다. 세계 선진국들은 5차산업 혁명에 대비해 새로 판을 짜는 국가전략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비전도, 미래 전략도 없는 시정잡배보다 못한 그야말로 ‘오사리잡놈’ 같은 정치사기꾼들의 정쟁이 끝이 없다. 정치판은 상식은 물론 시비선악(是非善惡)마저 헷갈리게 하는 난장판이 됐다. 그야말로 우주가 혼란스러워 자연이 무질서하자 인간이 미쳐 날뛰는 천하대란(天下大亂) 시대다. 물론 희망은 있다. 난극당치(亂極當治)라고, ‘혼란이 극에 달하면 새로운 질서’가 오는 법. 빈부 양극화와 보수-진보 간 이념논쟁으로 날이 새고 지는 오늘날 대한민국을, 시인의 말처럼 ‘썩은 것들 한번 깨끗이 갈아엎는 태풍’처럼 대청소할 때가 과연 다가올 것인가. 저항시인 이육사의 광야(曠野)에 등장하는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처럼 ‘초인’이 대망(待望) 되는 시대다. 그렇기에 집권여당을 ‘조사분(?)’ 인요한 혁신위원장 행보가 관심을 끌었다. 그가 재능과 도량을 아울러 이르는 기국(器局)이 큰 빼어난 인물인지 아직 평가가 이르다. 하지만 위원장 취임 이래 ‘붕정만리(鵬程萬里)’까지는 아니지만 ’낮도깨비’처럼 제주에 번쩍, 대구·부산에 번쩍 신출귀몰(神出鬼沒), 전국을 휘젓고 다닌 190㎝ 거구(巨軀)인 ‘한국판 몬스터(怪物)’의 광폭 행보가 화제가 되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 사랑,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 펴내 인요한 위원장은 미국과 대한민국의 이중 국적자다. 1959년 전북 전주시 완산구 중화산동 예수병원에서 태어났지만 유년 시절을 전남 순천에서 보냈다.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2006년)이란 수필집 제목처럼 그의 순천 사랑은 병적(?)이다. 미국에서 4년 살고 난 뒤 은근히 미국이 마음에 들어 아예 이민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순천이 그리워져서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그는 인터뷰 때마다 개구일성(開口一聲)으로 ‘순천이 우주(宇宙)의 중심’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지구의 중심’이라는 중국(中心之國) 차원의 ‘글로벌’을 뛰어넘어 ‘메타버스(Metaverse)시대’에 걸맞게 ‘유니버셜’로 사고의 축(軸)을 우주 공간으로 확대한다. 천하를 거머쥐려는 대장부의 웅대한 포부를 뜻하는 ‘대붕도남(大鵬圖南)’(<장자> 소요유편), 즉 대업(大業)의 웅지(雄志)를 품은 야심가(野心家)가 아니면 입에 올릴 수 없는 천기누설(天機漏洩)이다. 구한말 임오군란 후 낙백시절 흥선대원군이 호남을 유람하다 너른 순천 벌을 보며 땅이 기름지고 풍성해 사람 살기 좋은 곳이라 ‘지불여순천(地不如順天)’이라 평했는데 그는 ‘지구상에 순천만큼 좋은 곳이 없다’고 허세를 담은 재해석으로 풍(?)을 떤다. 순천(順天) 지명은 ‘하늘의 뜻에 따르는’ 것이라며 천하를 논하는 그는 2016년 6월 16일에는 고향 순천시 ‘순천만국가정원’ 명예 홍보대사 1호를 맡았다. 그는 그동안 퇴직하는 날 바로 고향 순천으로 돌아간다고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조렸다. 호남표준말(‘순천이 우주의 중심’이라 전라도 사투리가 아니라고)을 포함해 8개 국어를 자유자재(自由自在)로 구사하는 ‘파란 눈의 토종 한국인’ 인 위원장. 그의 입에선 이제는 전라도 사람도 기억이 희미한 찰진 ‘호남 사투리’가 거침없이 쏟아져 나온다. 말이 막히거나 곤란한 질문에 임기응변으로 ‘감픈 놈’ ‘허벌나게’ ‘거시기’ 등 걸쭉한 사투리를 적절한 타이밍에 맞춰 다양한 뉘앙스를 풍기는 레토릭으로 활용한다. 총선 앞두고 혜성처럼 등장한 벽안의 한국인 어린 시절 유난히 큰 두상(頭相) 때문에 ‘앞뒤 꼭지 3천 리, 왔다 갔다 6천 리, 돌아가면 9천 리’라는 놀림을 받으며 동네방네 쇳덩어리는 물론 염소 쇠 목줄까지 엿 바꿔 먹어 이빨까지 다 망가졌다는 개구쟁이 소년 인요한, 아명은 인쨔니.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말처럼 어린 시절 야생마(野生馬)처럼 자랐고 ‘엿장수’가 꿈이었던 그가 집권여당을 혁신한다며 ‘변화. 통합. 희생. 놀라운 미래’라는 구호를 내걸고 정치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정치판을 휘저었다. 총선 출마나 윤석열 정부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로 세평에 올랐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혁신위원장으로 발탁돼 김기현 국민의힘 당대표에게 ‘혁신위원회 구성·활동 범위·기한 등 전권을 부여’받아 활동을 시작한 뒤 각종 혁신안을 제시했다. 1호 안건은 ‘당내 통합과 화합을 위한 대사면’이었고 이어 11월 3일 당 지도부와 중진, 친윤(친윤석열)계 의원들의 ‘불출마 선언 및 험지 출마’ 등이 담긴 2호 안을 발표했다. 당대표를 포함한 이른바 ‘윤핵관’들에게 불출마 선언 혹은 험지 출마를 권고했으며 국회의원 정수 10% 축소, 불체포특권 포기, 세비 박탈, 하위 비율 20% 현역 컷오프 등도 제안했다. 취임 일성으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야 한다”는 과거 이건희 삼성 회장의 신경영 선언에서 따온 혁신을 강조한 그는 ‘얼굴 자체가 다른 것이 바로 변화의 상징’이라며 “제가 원래 의사로, 당에 필요한 쓴 약을 지을 것”이라며 결기를 드러냈다. “당내 낙동강 하류 세력은 뒷전에 서야 한다”며 영남 중진 물갈이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에 한 현역 의원이 “대구·경북 시·도민에게 깊은 영혼의 상처를 줬다"며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자 “낙동강 하류는 6·25 때 우리를 지킨 곳이다. 이후 많은 대통령이 거기에서 나왔다. 좀 더 다양성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야기한 것이지, 농담도 못합니까”라며 물러섰다. '낙동강 하류'라고 해서 상류(TK)도 아닌 하류(이른바 낙동강 벨트 지역)를 지칭한다는 그의 히트 앤드 런, 즉 ‘치고 빠지는 식’ 전술은 노련한 정치인들의 언론플레이를 뺨치게 한다. 말실수였지만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은근슬쩍 해프닝으로 치부되었다. 만약 다른 정치인 같았으면 구설이 무성할 설화(舌禍)일 텐데 애교로 넘어간 것이다. ‘국민의힘’은 100석 넘는 의석을 갖고 있지만 수도권 의석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이른바 영남 지역 중진 현역 의원들이 수도권에 출마해 야당 독식을 견제해야 한다는 제안에 장제원·김기현 등 몇몇 의원들이 오히려 지역구 사수 의지를 드러냈고, 인요한 혁신위원장은 시한을 정해 중진·친윤 의원들에게 '결단'을 촉구했다. '험지 출마 요구'를 두고 기 싸움이 이어지는 가운데 김기현 대표는 '급발진'이라는 표현으로 유감을 드러냈다. 이른바 윤핵관으로 윤 대통령 당선인 시절 비서실장을 지낸 킹메이커 장제원 의원은 4000여 명을 동원한 지지모임에서 “알량한 정치 인생을 연장하려고 서울 가지 않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과 함께 죽겠습니다”라며 16년 동안 가꾸어 온 지역구 사수 의지를 공개 석상에서 강조했다. 11월 12일 부산 지역구 교회 간증에서 “우리가 뭐가 두렵겠나. 저는 그래서 눈치 안 보고 산다. 나는 내 할 말 하고 산다”며 반발했다. 인 위원장은 그동안 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부터 이준석 전 대표,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 홍준표 대구시장 등을 차례로 만났다. 그의 이런 통합 행보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성과는 거두지 못해 ‘혁신위 무용론’까지 제기되었다. 험지 출마를 종용받은 김기현 대표는 “총선은 ‘지도부 지휘’로 치르는 종합예술”이라며 혁신위의 속도 조절을 언급하자 용퇴론을 거둬들일 생각은 없다고 못 박았다. 그는 윤석열 대통령 측에서 “소신껏 맡은 임무를 거침없이 하라”는 메시지를 받았다(2023년 11월 15일.)는 일화를 소개하며 대통령의 뜻이 혁신위와 함께한다는 사실을 밝히며 ‘중진·친윤 용퇴론’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인 위원장은 라디오 인터뷰 등에서 “(혁신안에) 역행하는 사람도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그냥 우유를 마실래, 매를 좀 맞고 우유를 마실래’라는 입장”이라며 “저는, 안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강경했다. 그는 권고 대상자들의 자발적 ‘결단’을 촉구한 데서 한발 나아가 압박 수위를 높이며 ‘12월 마지노선’을 제시했지만 중진들은 결단을 미루면서 당내에서는 현실화가 힘들 것이라는 관측도 높아가고 있다. 인 위원장은 당 혁신안을 내놓는 본연의 역할을 넘어 “나는 민주당 의원들 입당에도 열려 있다”며 민주당 비명계 의원들까지 공개적으로 만났다. 내년 22대 총선과 관련해 3일간 잠행 끝에 지난달 30일 공천관리위원장을 요구하는 배수진을 친 폭탄선언에 2시간 만에 김기현 대표는 거부했다. 김 대표를 비롯한 이미 토사구팽(兎死狗烹) 대상이 된 윤핵관들은 이중 플레이에 능소능대한 윤 대통령의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라는 암수(暗手)에 말려들었다. ‘현타’에 무지몽매(無知蒙昧)한 김 대표는 ‘자신의 발탁을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는 인 위원장 언급대로 이제 호랑이를 타고 달리고 있으니 내려도 죽고, 타고 있어도 죽을 수밖에 없는 기호지세(騎虎之勢) 형국으로 ‘자신을 잡아먹을 호랑이를 키우는 꼴’이 된 셈이다. 혁신위 활동 종료 기간이 임박한 가운데 기성 정치판의 ‘틀을 깨고 판을 바꾸려는’ 혁신위와 당 지도부·중진 간 공천을 둘러싼 수 싸움의 귀추가 주목된다. 인요한, 그는 의사이면서 기독교 선교역사를 간증하는 최고 인기 강사다. 폭넓은 독서력을 바탕으로 전라도 사투리를 적절하게 섞어 수백 명의 청중을 웃기고 울리는 유머 감각도 갖췄다. 이는 그가 정치인으로서도 훌륭한 자질을 갖추고 있음을 입증한다. ‘벽안(碧眼)의 호남 아들’로 “박정희, 근로자, 어머니가 남한을 일으킨 3대 힘”이라고 주장하고 “이 국가, 이 나라 잘 지켜야 합니다”라고 역설하는 등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애국심’을 자랑한다. 또 ‘정치판에 큰 인물이 없다’는 한탄 속에서 “한국 정치는 국가 성장 수준보다 너무 뒤처져 있다”며 “전라도 말로 어문짓거리(엉뚱한 일)만 하는 거 아니냐”고 지적하는 등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그가 지향하는 정치적 종착점이 어디일지 지켜볼 일이다.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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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 레닌그라드 거리는 나에게 한 가지 규칙을 가르쳐줬습니다. 만약 싸움을 피할 수 없다면 내가 먼저 주먹을 날려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푸틴은 체첸 반군 학살을 변호할 때도 ‘그들을 쓸어버리겠다.’는 식으로 길거리 싸움꾼이 구사할 법한 언어를 사용했다. 지지자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자신의 ‘마초 이미지 메이킹’을 통해 팬덤을 만들어 집권 24년째 60%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72세가 되는 내년까지 총리와 대통령으로 24년 대권을 장악한 푸틴은 29년여 소비에트연방을 통치한 이오시프 스탈린 이후 최장기 집권자다. 내년 3월 17일로 예정된 대선에서 당선되면 그는 84세까지 추가 12년 장기 집권이 가능해 총리 기간 제외하고 ‘33년 대통령’으로 거의 ‘종신 차르’로 군림하게 된다. 1999년 총리 취임 이래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2000년 처음 대통령에 당선된 뒤 3선 연임 금지에 막혀 2008년 대학 후배인 최측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고 총리 직책에서 상왕으로 군림했다. 총리 당시 2008년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 임기를 4년에서 6년으로 늘렸다. 2012~2018년 연임한 그는 2020년 또 한 차례 헌법을 고쳐 임기를 ‘중임 2회’로 제한했다. 개정된 조항은 차기 대통령부터 적용함으로써 현직은 이전 조항을 따른다는 특별조항으로 차기 대선 가도를 닦아 놨다. 5개월여 남은 2024년 3월 대선 캠페인 준비에 착수한 푸틴에게 교착 상태에 빠진 ‘우크라이나 전쟁’은 최대 이슈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 등 서방세계 시각은 장기 집권 독재자, 정적(政敵) 살해자, (우크라이나) 영토 침략자 등 부정적 시각이 지배적이지만 현재 러시아 국민 약 60% 이상이 푸틴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어 선거는 절차상 요식행위라는 보도다. ‘이미지 정치’를 적극 활용한 푸틴은 선거용 이미지 제고를 위해 2000년에는 전투기를 타고 체첸으로 날아갔다. 소련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인 1989년 5월 31일 비공식 단체로 시작한 러시아 오토바이 라이더들인 ‘밤의 늑대들’의 2014년 크림반도 점령 축하 축제에도 참석해 러시아인의 애국심을 자극했다. 전격적인 우크라이나 침공도 내년 대선을 위한 떡밥으로 조기 승리를 통해 ‘밴드왜건 효과’를 노린 ‘승자 이미지’를 전이(轉移)시키는 캠페인의 일환이었으나 지지부진한 전황(戰況)으로 차질을 빚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는 해킹에 안전하고 절차를 간소화해 유권자들도 투표하기 편해진다는 이유로 블록체인 투표 플랫폼이라는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는 선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옛 소련이 붕괴된 후 10년 가까이 체제 전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수반되었던 1990년대 혼란과 경기 쇠퇴는 러시아를 초강대국 위상에서 개발도상국 수준으로 추락시켰다. 이에 푸틴은 2000년 집권과 동시에 구악 재벌들을 몰아내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석유 등 자원을 통해 경제를 활성화하고 파편화된 사회를 통합해 국가 정체성 확립에 나섰다. 동시에 러시아의 추락한 국제적 위상 복원을 위해 전격적으로 국가 혁신 작업을 실행해 큰 지지를 얻었다. 그동안 늙고 무기력한 옛 소련 공산당 서기장들과 병들고 노쇠한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에 지친 러시아 국민에게 젊고 건강한 40대 지도자 푸틴은 새로운 희망의 아이콘으로 국민을 열광시켰다. 부국강병 정책 추진으로 경제성장 러시아 사람들에게 푸틴은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영웅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1990년대는 소련이 해체되고 급진 개혁파인 옐친이 이끈 극단적인 혼란의 시대였다. 1991년 러시아 초대 대통령에 오른 옐친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도입해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던 러시아 경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이었다. 당시 물품 가격과 생산 자유화 정책이 시행되자 모든 물가가 미친 듯이 뛰어오른 ‘초(超)인플레이션’이 벌어졌다. 러시아인들의 예금은 휴지조각이 돼 버렸다. 시장경제에 적응하지 못한 국영기업들은 잇따라 도산했고 덩달아 실업률도 치솟았다. 살아남은 에너지 관련 산업들은 옐친 측근들과 결탁한 ‘올리가르히’라 불리던 신흥 재벌들 손으로 넘어갔다. 신흥 재벌들의 부정부패는 더욱 극성을 부려 국영기업을 마구잡이로 민영화했고 그 과정에서 알짜 기업들이 속속 서방 진영으로 팔려나갔다. 급기야 1998년 외환위기를 맞아 모라토리엄(채무지급유예)을 선언함으로써 러시아는 ‘국가부도’에 처했다. 1990년 러시아 1인당 GDP는 약 5300달러 수준이었다. 하지만 옐친 임기 말인 1998년에는 1600달러 수준으로 추락했다. 빈곤층이 무려 90%에 달했고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치안도 극도로 불안해지고 살인 범죄가 속출했다. 영화를 보거나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도, 버스를 타고 거리를 걷는 것도 모두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불안한 일상이었다. 이른바 러시아 마피아들이 지하 경제를 장악하면서 이들과 결탁하지 않고선 장사하기도 쉽지 않았다. 지난 세기 공산 진영 패권국으로서 미국과 경쟁하며 냉전 시대를 이끈 러시아 인구는 미국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GDP도 미국 대비 10% 수준으로 떨어지는 등 러시아는 삼류 국가로 전락했다. 러시아 혼란이 정점에 이르던 1999년 말 옐친이 사임하고 당시 총리였던 푸틴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으면서 러시아는 활로를 찾기 시작했다. 푸틴이 대통령에 오른 2000년부터 2008년까지 러시아 경제는 연평균 7%대 초고속 성장을 거듭했다. 절대 빈곤층 비율도 약 30%에서 14%로 줄었고 평균 임금은 2배로 상승했다. 대학 입학자가 50% 늘었고 청년 실업률은 4분의 1로 줄었다. 당연히 젊은 세대가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다. 복지가 늘면서 출산율과 평균수명이 대폭 높아지고 대신 범죄율과 자살률은 대폭 감소했다. 거리에는 카페들이 다시 들어서기 시작했고, 백화점에서 마음대로 물건도 살 수 있게 되었으며, 원하면 해외여행도 가능해졌다. 이렇듯 국가 이미지 제고는 실제적인 경제 발전의 수치로 뒷받침되면서 일부 정치적 반대 세력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푸틴의 인기는 고공 행진을 해온 것이다. 푸틴은 취임 이후 줄곧 60% 이상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2014년 크림반도 병합을 통해 러시아인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당시 푸틴 지지율은 무려 87%에 달했다. 경기 침체와 연금 개혁 등 부정적 요인들로 말미암아 현재는 60%에 다소 못 미치는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차르 꿈꾸는 러시아 팽창주의자 푸틴의 야망 차르(tsar)를 꿈꾸는 러시아 팽창주의자 푸틴의 야망은 어디까지일까? 러시아 남서부 영토 분쟁, 즉 체첸전쟁을 종식한 그는 2014년 3월 크림반도를 군사력으로 합병해 영토 확장을 이뤘다.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러시아 국경까지 확장된 것에 분개한 그는 그동안의 치욕을 극복하고 러시아를 다시 ‘강력한 나라’로 만들려는 의도를 공공연히 드러냈다. 크림반도 병합을 통해 영토 문제에서는 추호의 양보도 없다는 강한 면모를 보여주자 푸틴의 인기는 단박에 20%포인트 상승했다. 러시아에서는 푸틴이 제정러시아 예카테리나 여제 이후 ‘영토를 확장한 왕’이라는 농담이 돌았다. 또 옐친 시대 총리였던 그가 1999년 12월 전격적으로 실시했던 체첸 진압 작전은 독립국이었던 체첸공화국을 러시아 품으로 다시 돌려놓았다. 1999년 8월 총리 임명 당시 푸틴 지지율은 2%에 불과했고, 9월 여론조사에서도 대통령 후보 1위는 프리마코프 전 총리, 2위는 루시코프 모스크바 시장, 3위는 주가노프 공산당 위원장이었다. 푸틴은 4위였다. 그런데 푸틴이 주도한 체첸전쟁 승리는 불과 반년 만에 무명의 정치인을 이듬해인 2000년 대통령 자리에 앉히는 마술을 부린 것이다. KGB 출신 첩보원이자 평범한 관료였던 무명의 푸틴이 무너져 버린 러시아 제국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다. 그는 최고 권력자가 되면서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던 ‘올리가르히’들을 탈세, 사기, 횡령 등 혐의로 대거 체포해 러시아 재벌을 바퀴벌레라 부르며 부정부패 집단을 숙청했다. 올리가르히(oligarch)는 과거 소비에트연방(USSR)에 속했던 러시아, 우크라이나에서 국유기업의 민영화 등 자본주의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신흥 재벌 집단을 말한다. 푸틴은 체제 변혁으로 혼란한 틈을 타 은밀하게 번성한 이른바 러시아 마피아들을 대거 체포해 사회질서도 빠르게 잡아갔다. 국부 유출을 막기 위해 국유기업 민영화를 금지했고 최대 산업인 석유와 가스를 다시 국유화했다. 이후 석유 가격이 폭등하자 국유화한 석유·가스 기업 덕에 국가 재정이 튼실해져 체첸과 치른 2차 전쟁에서 승리했고 추가적인 연방 해체를 막을 수 있게 되었다. 소련 비밀경찰인 KGB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는 KGB 동료들을 크렘린 대통령궁, 정부, 언론, 재계 등에 배치했다. 푸틴은 FSB와 연방경호국(FSO), 해외정보국(SVR)을 국가보안부(MGB)로 통합시켜 과거 KGB를 완벽하게 부활시켰다. 정보 장악을 통한 철권통치로 새로운 권위주의 통치체제를 확립해 반대 세력과 민주 진영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언론을 장악했다. 국제적으로 고립이 심화하는 가운데서도 이미지 정치로 지지는 더 높아지는 기이한 권력이 되었다. 모스크바 정치 분석가 니콜라이 페트로프는 “푸틴에게는 유도가 정치 철학”이라고 주장한다. 유도 검은 띠 소유자인 푸틴은 “상대 약점을 파악한 뒤 번개처럼 갑작스럽고 폭발적인 공격으로 균형을 잃게 만들어 상대가 자기 체중 때문에 스스로 쓰러지게” 하는 “상대 강점을 역이용”하는 유도술을 현실 정치에 원용하고 있다. 상대 체격과 체중을 역으로 이용해 무게중심을 흩트려 무너지게 한다는 원리다. 푸틴은 상대의 힘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역이용하는 유도의 원칙으로 러시아 고위 관리, 사업가, 기업들을 대상으로 가해진 서방 제재를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역이용하고 있다. 그는 서방의 제재를 계기로 국내에서 권력을 확고히 다지고 외부의 영향을 차단하는 통치술을 구사하고 있다. 크림공화국을 합병한 것은 푸틴이 현 세계를 체스판이 아니라 유도 도장의 매트로 생각하고 혼돈에 빠진 우크라이나의 약점과 우유부단함을 이용해 전격적으로 진격해 성공했다. 2000년 대련 상대와 공동으로 ‘유도: 역사, 이론, 실제(Judo: History, Theory, Practice)’를 집필한 푸틴의 유도 사범 아나톨리 라클린은 2007년 한 인터뷰에서 “푸틴은 겨루기할 때 상당히 예측 불가능했다. 그는 예상치 못한 공격으로 상대를 누른 적이 많았다”고 말했다. 유도 친구들이 내무부 등 정부 고위직을 차지하면서 러시아의 ‘유도 통치집단(judocracy)’으로 불리는 가운데 푸틴은 “양보는 승리하는 데 필요할 때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크라이나에서 예상외로 고전하고 있는 푸틴은 자신보다 훨씬 강한 적들(미국, 중국, 유럽 등)을 상대할 수 있는 전술이 절실한 상황에 부닥쳤다. 유도에서처럼 그들이 스스로 에너지를 소진하게 하거나 그들의 강점에 노출되지 않고 그들을 꼼짝 못하게 누를 수 있는 위치로 그들을 유도하는 것이 푸틴의 전략이다. 그가 우크라이나 전장에서도 유도 전술을 쓰고 있는 게 분명하다는 평가지만 미국 등 서방의 대응책도 만만치 않아 고전하고 있다. “영웅 없는 시대보다 영웅을 요구하는 시대가 더욱 불행하다” 푸틴은 직접 전투기를 타고 군부대에 나타나는가 하면, 웃통을 벗고 호랑이나 곰 사냥을 하고, 70이 가까운 나이에 얼음을 깨고 한겨울 수영을 즐기는 등 ‘상남자 이미지’를 연출했다. 여기에 외국 정상과 회담할 때마다 일부러 지각해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이런 행동은 회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전술로, 2014년 메르켈 독일 총리는 4시간,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은 110분 기다리게 했다. 반대 사례도 있었다. 2018년 7월 트럼프는 약속 시각보다 30분 늦은 푸틴보다 20분 더 늦게 나타났고, 2019년 4월 북·러 회담에서 김정은은 30분 늦은 푸틴보다 30분 더 늦게 나타났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러시아인들에게는 당당하고 강력한 국가지도자 이미지로 비쳤다, 30년 결혼 생활 끝에 2013년 6월 6일 이혼한 전 부인 알렉산드로브나 류드밀라와 사이에 두 딸이 있다.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행정직에서 일하며 로큰롤 에어로빅 대회에서 활약한 바 있는 큰딸 카타리나(1985년생)와 둘째 딸인 내분비학 전문의 마리아(1986년생)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리듬체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인 알리나 카바예바는 현재 러시아 국회의원으로, 사실상 푸틴의 차기 아내로 거론되고 있다. 푸틴은 러시아 정교회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등 독실한 신앙인 면모도 드러내고 있다. 특히 2022년 12월 연례 기자회견에서 그는 애국심을 주제로 연설했는데 ‘러시아의 국가 이념은 애국심’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애국심은 조국의 발전에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영웅적인 과거를 고수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는 영웅적이고 성공적인 미래를 내다봐야 하며 이것이 바로 성공의 입장권이다. 현대 민주사회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이념은 애국심이다. 애국심은 반드시 탈(脫)정치화돼야 하고 러시아의 내적인 틀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애국심이야말로 가장 광범위하고 최고의 가치다.” 장기 집권을 넘어 종신 집권을 노리는, 그칠 줄 모르는 욕망의 화신 푸틴을 여전히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국민이 대다수인 러시아의 앞날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그리고 푸틴의 ‘영웅 신화’는 과연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과거 나치 시대를 살았던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는 이른바 ‘영웅론’에 대해 이렇게 갈파했다. “영웅 없는 시대는 불행하지만, 영웅을 요구하는 시대는 더욱 불행하다. 영웅을 요구하는 시대보다 영웅 없는 시대가 행복하다. 많은 국가는 영웅 없이도 잘살고 있다.”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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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렬 논설고문] “전쟁이 오래가면 병력은 둔해지고 사기가 꺾인다. 성을 공격하면 전투력이 소진되고 오랜 기간 군대를 운영하면 국가의 재정이 부족해진다. 군대가 약해지고 사기가 꺾이고 물자가 소진되면 재정이 파탄 난다. 내부 혹은 인접국에서 제후들이 이 틈을 타 일어나니 이런 상황이 되면 지혜로운 자라고 하더라도 후방의 상황을 감당할 수 없다.” (<손자병법> 2권 작전 편, 장기전의 위험 지적) 독재자는 결국 자승자박(自繩自縛), 스스로 만든 올가미에 걸려 파멸한다. 손자(孫子)의 가르침은,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서 오늘의 러시아가 처한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출구를 찾아야 하는 ‘23년 장기집권자’ 푸틴 대통령의 처지가 실감 나는 대목이다. ‘사흘 안에 우크라이나를 함락하겠다’던 푸틴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2월 전쟁이 시작된 후 러시아군 사상자는 30만 명, 우크라이나군 사상자는 20만 명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의 사상자가 50만 명 정도에 이르렀다고 미국 관리들을 인용, 보도했다.(NYT, 8.18.) 러시아군 사망자는 12만 명, 부상자는 17만∼18만 명, 우크라이나군은 사망자 7만 명, 부상자 10만∼12만 명인 것으로 집계됐다. 현재 우크라이나군 병력은 약 50만 명이지만, 러시아군은 130만 명 이상으로 관측되고 있다. 사망자는 민간인 집단학살이 포함됐지만 대부분 군인이다. 전쟁을 피해 고향을 등진 난민들도 최대 3천만여 명에 달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치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전쟁 발발 후 최근까지 1600만여 명의 우크라이나 국민이 전쟁을 피해 국경을 넘었다. 다시 귀국한 사람들을 제외해도 800만여 명에 달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이 타국에서 피난민 처지로 살고 있다. 러시아도 20만여 명의 지식인, 중산층이 해외로 나갔다. 두 나라 경제상황도 악화일로다. 국제통화기금(IMF)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우크라이나 GDP는 절반 수준으로 감소했고, 세계은행은 러시아 경제성장률이 2022년 –3.5%, 올해는 –3.3%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NHK 時論公論, 2023.1.12.) 2021년 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미국의 경고 메시지에 국제사회는 ‘설마 21세기에 침략 전쟁이 일어날까?’ 반신반의했다. 군사 전문가들은 ‘세계 2위 막강 군사력을 갖춘 러시아가 전쟁을 시작하면 국방력 순위 25위의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가 30분 이내에 초토화하고, 3일이면 사실상 전쟁이 끝날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침공 초기 기세가 좋았던 러시아군의 조직력 붕괴, ‘나라를 지키겠다’라는 우크라이나군의 벼랑 끝 의지, 미국 등 서방국의 무기 지원 등 변수가 복합적으로 작동, ‘전쟁의 파라독스(paradox)’를 드러냈다. 전쟁은 단순한 수적 양적 군사력 우위가 승패를 결정짓는 요인이 아니다. 첨단 무기로 무장된 병력도 전쟁의 연속성과 지속성을 보장하기 위한 군수지원 능력, 훈련의 성숙도, 지휘부의 지도력 및 항공지원 능력 등 기본여건이 갖춰졌을 때 그 기능을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다. 러시아의 경우, 병력 및 화력 측면에서 우크라이나를 월등히 압도했지만, 개전 초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점령에 실패했다. 이로 인해 러시아는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겪었고, 반격에 나선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군 점령하에 있는 북동부와 동부 돈바스 지역의 영토 탈환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서방국가들의 지원을 등에 업은 젤렌스키 대통령을 중심으로 2014년 뺏긴 크림반도 수복까지 다짐하며 항전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은 이제 20개월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전쟁이 장기전 양상으로 치닫자 푸틴의 고민은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미국을 필두로 서방 여러 나라로부터 지원을 받는 우크라이나와는 달리, 러시아는 점차 ‘공공의 적’ 처지로 전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에너지 등 원자재와 식량값 급등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금리 인상 등을 연쇄적으로 촉발했다. ‘코로나 19’에 따른 글로벌 공급망 붕괴로 이미 침체한 세계 경제에 치명상을 안기고 있어 푸틴에 대한 국제적 비난 여론도 비등(沸騰)해지고 있다. 특히 ‘우군’이라고 믿었던 중국과 인도마저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등, 국제사회에서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러시아 우크라이나 양국은 재차 전열을 가다듬고 있어, 종전 실마리를 찾기는커녕 전쟁은 장기화, 교착국면에 빠져 있다. 이 와중에 자중지란(自中之亂)도 발생했다. 지난 6월 24일, 악명을 떨치는 러시아 민간 용병단체 와그너 그룹이 모스크바로 진격한 군사 반란이 그것이다. 비록 불과 하루 만에 철군하는 등 용병들의 반란은 불발로 끝났지만, 이후 8월 23일 와그너 그룹 수장인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암살 의혹’을 부른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는 등, 푸틴은 안팎으로 여러 어려움에 봉착해있는 상태다. 지난 9월 13일, 푸틴은 러시아 동쪽 끝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날아가 북한 김정은과 재래식 무기 거래 협상으로 의심받는 만남을 갖는 등, 급박하게 움직이고 있다. UN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스스로 유엔 결의를 위반하는 위험한 행보를 펼치고 있다. 그만큼 러시아가 처한 상황이 좋지 않다는 방증이다. 북한의 러시아 밀착을 보여준 이번 회담은 한반도와 무관한 전쟁이 아님을 웅변하고 있다. 전쟁에 고전하고 있는 푸틴의 패착은 이른바 경적필패(輕敵必敗)다. 핵을 가진 초강대국이라 하더라도 스스로 자만한 나머지 준비를 소홀히 하거나 상대방의 능력과 전략을 과소평가할 경우, 전쟁에서 패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손자병법>에서 지적한 ‘장기전의 위험’이 그대로 시현되고 있는 셈이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경구대로 ‘푸틴’의 행태는 미국의 베트남 전쟁 당시 ‘맥나마라’를 상기시킨다. 냉전 시대 미국과 구소련의 대리전쟁으로 불린 베트남 전쟁(1965.11.-1975.4.)은 남북으로 분단된 베트남 통일을 둘러싸고 전개됐다. 미국이 남베트남을 대표해 북베트남 공산주의자와 싸운 이 전쟁에서 84만 9,018명의 군인이 사망했다. 미군 5만 8,318명이 숨지는 희생을 치렀지만,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했다. 최첨단 현대무기로 무장한 세계 최강의 미국을 상대로 물질적 역량으로는 비교할 수 없는 북베트남이 이긴 것이다. 많은 패인 가운데 전쟁 당시 미 국방부 장관 ‘로버트 맥나마라’ 이름을 따서 명명(命名)한 ‘맥나마라의 오류(McNamara Fallacy)’가 꼽힌다. 베트남 전쟁을 기획, 진두지휘한 맥나마라 장관은 1962년 베트남을 방문, “우리의 계량 평가는 미국이 승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호언장담, 정량적 관측만으로 결정을 내리고 다른 모든 요소를 무시했다. 6만여 명에 가까운 전사자를 내고 폭탄을 비 오듯 퍼부었지만 ‘절대 질 수 없는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다. 이는 맥나마라가 정글과 ‘베트남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인간의 의지’ 등, 전쟁 향방을 결정할 중요한 요소를 제대로 계량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버드대 조교수와 포드자동차 사장을 지내 당대 최고의 CEO로 평가받던 맥나마라 장관이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오류를 저지른 것은 ‘거울 이미지의 함정’에 빠진 탓이다. 다른 사람이 어떤 대상을 인식하는 방식이 나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나의 잣대로 모든 것을 재단할 때 거울 이미지 함정에 빠지고, 일을 그르치게 된다. 성공한 경험이 강한 사람이 환경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과거의 ‘성공법칙’을 고수, 생각이 굳어버리면 실패보다 무서운 ‘성공의 덫’(success trap) 함정에 빠져 망한다는 대표적 사례다. 2009년 7월 맥나마라가 93세 나이로 영면했을 때 뉴욕타임스는 ‘무익(無益)한 전쟁의 설계사 맥나마라 죽다’란 큰 제목으로 그의 부고 기사를 실었다. “이제껏 우리는 잘못했다. 정말 끔찍하게도 잘못했다. 우리는 다음 세대들에게 이유를 설명해줘야 할 빚을 지고 있다(Yet we were wrong, terribly wrong. We owe it to future generations to explain why).”(호찌민시:사이공시, 전쟁박물관에 전시된 맥나마라 글 ) 푸틴의 책사(策士) 알렉산드르 두긴 냉철한 판단과 과감한 개혁으로 역사상 러시아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높은 지지를 받아온 푸틴은 그동안 ‘전쟁’으로 집권 연장에 성공, 이제 종신 집권의 길에 들어섰다. 푸틴은 집권 후 체첸, 조지아, 크림반도의 침공을 승리로 이끌었다. 푸틴의 위상을 높이고 장기 집권의 결정적 기반이 됐다. 내년 3월17일 임기 6년의 ‘대통령 선거’를 앞둔 이번 전쟁도 그 연장선이었다. 1930년대 히틀러나 일본이 침략 중독증에 빠진 것과 비슷한 패턴으로 이른바 ‘푸틴이즘(Putinism)’의 국제정치적 발현이다. 러시아는 23년째 정치국도 중앙위원회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1인 독재체제를 구축, 푸틴 단 한 명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다. 푸틴은 언젠가 자신이 묘사했던 것처럼 ‘권력의 수직선(vertical of power)’이다. 하지만 지금 그 수직선은 여느 때보다 불안정해 보인다. 푸틴 대통령은 합법적인 선거절차를 거치며 집권해왔지만, 끊임없이 ‘외부의 적’을 만들어 내부 단합을 도모하면서 러시아의 ‘절대 존엄’으로 통치해왔다.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도 내년 대통령 선거와 장기 집권을 의식한 인기몰이라는 비판이 그래서 제기된다. 이번 전쟁 배후에는 사전 선거 공작과 함께 푸틴의 사상적 스승이자 푸틴 팽창주의 외교정책 입안자인 알렉산드르 두긴(Aleksandr Dugin)이란 배후 존재가 감춰져 있다. 1962년생으로 모스크바대 교수인 그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극단적 민족주의 성향의 파시스트 정치사상가다. 애초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반체제 인사였던 두긴은 1990년대 소련이 해체될 무렵 서방의 영향력에 대항해 러시아가 세계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창했다. 두긴은 아일랜드 더블린에서부터 러시아의 극동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르는 유라시아 제국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 1997년 저작 도서 <지정학의 기초 : 러시아의 지정학적(地政學的) 미래>를 통해 이름을 얻기 시작했다. 미국에 사회, 인종적인 갈등과 불안을 퍼뜨릴 것을 주장한 이 책은 당시 러시아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하지만 당시 혼란스러운 시장경제의 봇물에 휩쓸려 애국심을 강조하는 젊은 국수주의자의 작은 목소리에 그쳤다. 이후로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두긴의 극우 민족주의적 사상은 2000년 들어 푸틴의 ‘팽창주의 야욕’과 결합, 강력한 불꽃을 일으켰고 서서히 러시아 정치권의 주류 국책(國策) 이데올로기로 떠올랐다. 두긴은 또 “푸틴에게는 적이 없다. 설사 있을지라도 그들은 정신적으로 병들어 검진을 받아야 한다. 푸틴은 절대적이고, 대체 불가능하다.”며 푸틴 정권에 대한 지지 표명에도 앞장섰다. 2007년 저작인 <푸틴 대 푸틴>에서는 푸틴이 실증적이고, 조심스러운 ‘달과 같은’ 속성과 유라시아 제국의 부활, 서방과의 대결에 몰두하는 ‘태양과 같은’ 속성, 두 가지 특질을 지니고 있다고 분석했다. 두긴은 러시아 제국의 부활을 강조하고 우크라이나 침공의 명분이 된 이른바 ‘유라시아리즘’(Eurasianism)의 창시자다. 푸틴 대통령 역시 소련의 붕괴를 ‘역사적 비극’,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냉전 시대 세계질서를 양분했던 소련의 과거 시절에 대한 향수를 종종 드러냈다. 러시아가 국제질서에서 패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두긴은 오래전부터 ‘우크라이나 침공’을 주창해왔다. 두긴은 <지정학의 기초>에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합쳐질 운명이다. 절대로 독립국으로 내버려 두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에 동화되길 거부하는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혐오도 숨기지 않았다. 2014년 5월 우크라이나 오데사에서 친러시아 시위대 수십 명이 사망했을 때 “우크라이나는 지구상에서 사라지든지 처음부터 다시 (나라를) 시작해야 한다”며 각계각층, 지역에서 전면적인 반란을 일으키라고 선동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인 2022년 3월에는 현지 매체에 “‘태양과 같은’ 푸틴이 승리했고 이는 이미 예정돼 있다”라면서 “러시아는 루비콘강을 건넜고, 개인적으로 이것이 매우 기쁘다”라며 서방은 러시아를 무너뜨리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두긴은 자신의 SNS 텔레그램 채널에 “러시아 사회 전체가 전시 조직 체계를 갖추지 않으면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며 “러시아는 하나의 문명으로서 서방에 대항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끝까지 갈 것을 의미한다”는 비장한 글을 올리기도 했다(NYT). 두긴은 러시아 방송에 출연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이 있으며, 러시아는 결코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도 했다. <손자병법>은 ‘전쟁은 국가의 중대사(큰일)이다. 국민의 생사, 국가의 존망이 결정되는 길이니 깊이 살피지 않을 수 없다.’(國之大事 死生之地 存亡之道 不可不察也:국지대사 사생지지 존망지도 불가불찰야)고 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푸틴 예상과 달리, 갈수록 꼬이는 형국으로 치닫고 있다. 궁지에 몰린 푸틴이 핵무기 버튼을 만지작거린다는 보도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넘어 세계적 재앙으로 이어질 어두운 전조(前兆)를 보는 것 같다. 북·중·러 대 한·미·일의 신냉전 구도가 고착화되는 가운데 최근 우크라이나 문제로 얽힌 ‘김정은-푸틴 정상회담’으로 한반도가 ‘태풍의 눈’이 되어 패권전쟁 소용돌이 속으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빨려 들어가고 있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리스크는 우리의 처지와 비슷, 우크라이나 전쟁이 결코 ‘강 건너 불구경’일 수 없는 소이(所以)이다.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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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렬 논설고문] 디지털미디어에 의한 하이브리드 전쟁(Hybrid Warfare) “당신이 화성을 정복, 식민지화하려는 동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식민지로 점령하려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우주로 보낸 로켓들이 성공적으로 지구로 귀환할 때, 러시아 로켓들은 우크라이나 민간인을 공격합니다. 스타링크 서비스를 지원해 러시아에 맞설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러시아군이 크루즈 미사일 등으로 우크라이나의 인터넷 서비스 폐쇄와 소셜미디어 차단을 노려 통신 등 기반시설을 정밀 타격해 통신네트워크부터 마비시키자 침공 이틀뒤인 지난해 2월26일, 우크라이나 디지털혁신부 장관 미하일로 페도로프가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페도로프는 우주 개발 기업 ‘스페이스X’의 위성 인터넷망인 ‘스타링크’(Starlink) CEO 일론 머스크에게 우크라이나에 스타링크 서비스 개시를 요청한 것이다. 머스크가 10시간 만에 요청을 승인, 서비스가 개시됨으로써 통신네트워크는 원상복구되었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우주여행 등 ‘인류의 화성 이주’라는 비현실적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도전하고 있는 머스크는 ‘골리앗 러시아에 맞선 다윗’이라는 우크라이나의 지원 요청에 즉각 화답한 것이다. 테슬러 전기자동차로 세계 최고 부자가 된 머스크는 트위터(twitter:트윗은 영어로 새가 지저귀는 소리 뜻하는 의성어)팔러워 1억4천여명을 거느린 세계적 인플루언서로 440억달러(약 63조원)에 “새가 자유를 얻었다(the bird is freed)”며 지난해 10월 트위터를 인수했다. 푸틴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를 걸고 한판 붙자”고 결투신청을 하는가하면 중국에서 셀럽으로 환대 받는 등 세계적 영향력을 가진 그는 ‘스타링크’로 우크라이나의 구세주가 되었다. 스타링크 서비스는 무게 227kg 소형 군집위성 4만여 개를 2027년까지 차례로 지구 500㎞ 상공 저궤도에 띄워 전 세계를 ‘초고속 인터넷’으로 촘촘히 연결해 빠른 인터넷 서비스망을 구축하는 프로젝트. 현재 약 4,000여개의 위성을 쏘아 2020년부터 서비스를 시작, 스타링크 덕분에 우크라이나군은 안정적인 통신 외에도 드론 등 전술 무기 전투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인터넷 디지털 시대에 벌어진 이번 전쟁에서 두 나라 모두 드론과 위성통신, AI 등을 통한 전술 전략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치열한 기술 경쟁을 벌이고 있다. 첨단 과학기술 전환기를 맞아 전쟁개념과 전투방식 자체가 과거에 없었던 전혀 새로운 방식과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즉, ‘군사력 중심의 전쟁’에서 ‘미디어 중심의 하이브리드 전쟁(Hybrid Warfare)’으로, ‘보이는 전쟁’에서 ‘보이지 않는 전쟁’으로, ‘근거리 전투’에서 ‘원거리 전투’로 전쟁 패러다임이 바뀐 것이다. 2022년 기준, 미국 다음의 2위 군사 강국인 러시아의 하이브리드 전쟁위협과 회색지대 전략(Gray Zone Strategy:전략을 구사하는 국가가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지 않고 점진적인 방식으로 안보 목표를 성취하려는 대부분의 전략적 행위)에 맞선 22위 수준의 우크라이나가 500여 일째 AI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분전(奮戰), 전황이 교착국면에 빠지면서 국제정치 구도도 지정학적 대전환기를 맞고 있다. ‘하이브리드(hybrid)’는 사전적으로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두 가지 이상의 요소를 뒤섞는 것’이란 의미로 ‘하이브리드전쟁’은 기존의 재래식 무기 등 군사적 수단과 더불어 다양한 비군사적 수단이 결합한 형태의 전쟁을 뜻한다. AI, 드론, 인공위성, 3D 등 다양한 첨단 과학기술을 활용한 미래형 무기 등 다양한 무기가 혼재된 형태로, 군사력과 기술력, 정치력, 경제력을 총망라한 개념의 전쟁이다. 러시아는 냉전 시대 이후 미국의 독보적인 경제력과 군사력을 따라잡을 수 없어 테러행위, 범죄행위, 그리고 범죄적인 사이버 공격까지 포함하는 다양한 형태의 작전들이 동시에 복합적으로 전개되는 첨단 과학기술이 총동원된 하이테크 전쟁개념을 하이브리드전쟁으로 발전시켰다. 이후 하이브리드전 최강국 러시아는 2008년 조지아 침공과 2014년 크림반도 합병 때도 군사작전과 심리전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전술을 구사, 목적을 이뤘다. 디지털 시대의 하이브리드전쟁으로 주목받고 있는 이번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꾼 주인공은 페도로프 우크라이나 부총리 겸 디지털 혁신부장관. 올해 32세인 그는 우크라이나 남부 드네프르강 근처의 작은 마을 바시리브카 출신. 정계 입문 전 온라인 광고 캠페인 전문 디지털마케팅 회사를 창업한 그는 디지털 전문가로 2018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당시 젤렌스키 선거캠프에서 디지털 분야 감독을 맡았다. 당시 41세인 코미디언 출신 배우 젤렌스키는 ‘인민의 종(Servant of the people)’이라는 시트콤에서 주연을 맡아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개혁정치를 펼치는 청렴한 대통령’의 모습을 연기하다가 2000만여명이 시청하는 선풍적 인기를 끌어 단숨에 대권후보가 되었다. 드라마 이름을 따 ‘인민의 종 당’을 창당하여 정치에 입문, 대통령선거에 출마, 신선하고 깨끗한 ‘변화하는 젊음의 상징’으로 포지셔닝된 젤린스키는 2019년 4월 결선투표에서 73.2%의 득표율로 현직 대통령 프로셴코를 50%이상 따돌리며 역대 우크라이나 대통령 가운데 가장 높은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부패한 정권을 비판한 고교 교사의 영상이 소셜미디어에서 급속하게 퍼지면서 우연히 대통령에 당선된다는 젤린스키가 주연 겸 제작한 ‘인민의 종’ 드라마가 현실이 된 것이다. 젤린스키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28세로 최연소 우크라이나 디지털혁신부 장관에 취임한 그는 사회 서비스의 디지털화를 추진하면서 정부 앱을 만들어 세금관리 등을 디지털화했다. 2021년에는 미국 실리콘 밸리를 방문해 팀 쿡(Tim Cook) 애플 CEO 등을 만나 친분을 쌓기도 했다. 하이브리드전쟁 시대 네트워크 전장 첨단무기 된 디지털 미디어 페도로프가 국제적 인물로 부상하게 된 것은 지난해 2월 24일 러시아 침공 직후인 2월26일 트위터에 “우리는 IT 군대를 만들고 있다. 디지털 인재가 필요하다”라는 글을 올리면서부터. 개전 초 인터넷 서비스와 휴대전화 통신망 파괴로 사이버 시스템과 커뮤니케이션이 마비되자 페도로프가 주도하는 디지털혁신부는 30만 명에 가까운 해커 등 IT 전문 자원봉사자들을 ‘우크라이나 IT 군대(IT ARMY of Ukraine)’라는 텔레그램 채널의 해커 그룹에 참여시켜 정예 사이버전 전담부대를 창설했다. 이들은 러시아 중요기관 웹사이트와 온라인 서비스를 파괴하는 등 보복에 나섰다. 2003년 온라인 커뮤니티 포챈(4chan)에서 ‘익명(匿名:Anonymous)’이란 이름으로 시작, 3,000명 정도로 추정되는 국제 해커 조직인 어나니머스와도 연계, 22년 2월 25일 러시아 국방부 데이터베이스를 해킹했고, 러시아 정부의 웹사이트와 관영 언론에 대한 디도스 공격도 감행했다. 페도로프의 디지털혁신부는 ‘E-에너미(E-Enemy)’로 알려진 텔레그렘 채팅봇을 개발, 국민 누구나 주변 러시아군의 동태를 보고할 수 있도록 했다. 에너미에 접속하면, 채팅봇이 사용자에게 러시아 군대 유형과 규모, 목격 장소, 접촉 시간 등 자세한 정보를 요구한다. 현재 30만 명 이상이 서비스에 가입, E-에너미로 우크라이나 전국에서 사진, 비디오로 촬영된 러시아군의 움직임과 위치의 다양한 정보가 수집된다. 이렇게 취득한 정보를 각종 군사작전에 활용하고 있으며, 수도 키이우를 놓고 격전을 벌일 당시 많은 정보가 수집돼 러시아군을 패퇴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디지털혁신부가 운영하는 전자정부 플랫폼은 개전 초 정부의 전자지갑을 만들어 6,000만 달러 상당의 암호화폐도 기부받았다. 러시아는 이번 전쟁에 20여만 명에 달하는 IT 전문가, 지식인들이 러시아를 탈출했지만, 우크라이나는 ‘30만여명의 IT 군대’를 창설하는 등, MZ세대인 페도로프가 국방의 한 축을 담당해 우크라이나가 버티고 있다는 평가다. “우크라이나의 최연소 장관인 미하일로 페도로프는 기술과 암호화폐, 그리고 소셜미디어를 현대판 전쟁 무기로 탈바꿈시켰다.”(, 2022.3.12.)라는 보도가 빈말이 아닌 셈이다. 페도로프는 또 전 세계 빅테크 기업 50여 곳의 CEO들을 상대로 이메일과 트위터 등으로 세계 경제에서 러시아를 분리하고 글로벌 인터넷에서 러시아를 차단하기 위한 반(反)러 제재 동참 캠페인을 전개했다.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빅 포’로 일컬어지는 구글과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의 머리글자를 딴 GAFA 등 미국 정보기술(IT) 공룡 업체와 넷플릭스, 인텔, 페이팔 등 빅테크 기업들에게 러시아에서 사업 중단을 촉구한 것이다. 그의 요청을 수용한 전 세계 빅테크 들도 우크라이나 편에 섰다. 애플은 러시아에서 제품 판매를 중단했고, 메타(옛 페이스북)와 트위터, 넷플릭스·유튜브가 러시아 국영 매체를 통한 정치적 선전 차단에 나서는가 하면 스페이스X·에어비앤비는 통신망이나 피란민 숙소 제공 등 우크라이나를 적극 지원하고 나섰다. 구글은 우크라이나인의 안전을 위해 구글 지도 일부 기능을 비활성화시켰다. 미국 빅테크 기업과 천문학적 비용의 무기지원 등으로 버티고 있는 젤린스키 대통령에게 “끝까지 간다”는 바이든 대통령의 다짐대로 이 전쟁을 통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갈등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얽히고설킨 강대국들의 힘겨루기도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 네오콘이 추진한 30년 프로젝트의 정점이다.”는 경제학자 제프리 삭스 컬럼비아대학 교수 지적대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미국 대리전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브레진스키가 책 <거대한 체스판>에서 주장했듯이 이들 네오콘에게 우크라이나는 미국의 핵심이익이 걸린 사활적 지역이다.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은 미국의 글로벌 패권유지의 핵심 요소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진보 네오콘의 대리전이라는 진보학자들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전쟁사에서 변곡점 가져온 딥 페이크가 사용된 최초 전쟁 페도로프는 해커(Hacker)와 행동주의자(Activist)의 합성어로 인터넷을 통한 컴퓨터 해킹을 투쟁 수단으로 사용하는 새로운 형태의 행동주의자, 즉, 불의(不義)에 저항하는 정치 사회적 신념을 알리기 위해 해킹하는 사회 활동가인 ‘핵티비스트’를 통해 지난해 2월26일에는 러시아 국영방송을 해킹, 우크라이나 국기가 휘날리고 국가가 울려 퍼지게 했다. 3월 2일에는 러시아 군사위성을 해킹해 러시아 전쟁지도부와 전선사령부와의 실시간 소통을 봉쇄했다. “2022년에는 현대 IT 기술이 탱크와 다연장 로켓, 미사일에 최고의 대응책이 될 것”이라던 페도로프의 전략은 적중,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여준 ‘디지털 봉쇄(digital blockade)’ 전략은 ”현대전쟁은 핵전쟁(Nuclear War)일 것”이라는 그동안의 생각도 바꿨다. 즉 현대전쟁은 디지털미디어에 의한 하이브리드전쟁’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전쟁 초 젤린스키 대통령이 화면에 등장, “무기를 내려놓아라!”고 말하는, 마치 러시아에 항복 선언을 하는 듯한 가짜영상이 나돌았다. AI 즉 인공지능의 영상합성조작용 ‘딥 페이크(deep fake)’ 기술이 동원된 것이다. 적군 병사를 인식하는 안면인식 소프트웨어에서부터 군수지원 효과를 높이기 위한 머신러닝(machine learning)도 적극 활용되고 있다. 인간의 눈으로 안면인식을 할 때 발생하는 오류 가능성은 6%지만,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사가 개발한 안면인식 소프트웨어 오류 발생률은 1%에 불과하다. 특히 저궤도 위성 스타링크는 데이터를 원격에서 공유, 스타링크 터미널을 이용하여 적군의 위치를 손바닥 보듯 손쉽게 확인하고 공격해 지상 정보 기반 작전의 미래를 통째로 변화시킨 네트워크전의 진수(眞髓)를 보여줬다. 지난해 3월 27일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우크라이나에 파병된 러시아군이 전쟁터에서 놀라울 정도의 빈도로 스마트폰이나 PTT 단말기(Push To Talk Radio) 무전기를 사용해 교신하고 있다”며, 감청이나 도청에 쉽게 노출되는 통신을 사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개전 이후 러시아군 장성 7명이 우크라이나군에 사살된 것도 스마트폰 위치 정보 노출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경적필패(輕敵必敗)라는 병법의 기본을 무시하고, 속전속결로 수도 키이우를 점령해 우크라이나의 항복을 받아낼 것으로 예상했던 러시아군이 통신보안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아 자충수(自充手)를 둔 셈이다. 병력이나 인구 등 현저한 열세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침공에 결사 항전하는 동귀어진(同歸於盡)으로 죽기를 결심하면 살 것이라는 필사즉생(必死則生)의 각오로 싸우는 디지털로 무장한 우크라이나의 저항 의지는 러시아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하이브리드전의 원조(元祖)인 러시아가 마치 컴퓨터에서 워게임 하듯 진행하는 우크라이나의 고도화된 하이브리드전에 고전하고 있는 현실은 상징적이다. 이번 전쟁은 70대의 ‘아날로그 세대’ 푸틴(1952년생)과 ‘디지털 세대’인 40대 젤린스키(1978년 생), 30대 페도로프(1991년생) 대결로 국가지도자 리더십과 국민의 디지털미디어 역량이 곧 국력이자 국방력인 시대를 경험하는 인류 전쟁사의 변곡점(inflection points)으로 기록될 것이다. 국방안보전략, 금융시스템, 에너지, 테러행위, 식량산업, 과학기술 등 국정의 모든 분야가 상호 연결 융합된 하이브리드 전쟁시대에 6800여 명의 해커를 보유, 내밀한 국방 기밀까지 탈취하는 하이브리드전쟁 실행 능력이 막강한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도 적절하고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해야 겠다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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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렬 논설고문] “우리는 러시아인이 아니라 표트르인(Petrovian)이라고 해야 한다. 러시아는 표트르의 땅(Petrovia)이다.” 19세기 러시아 재무대신 칸크린 백작의 ‘표트르 대제’에 대한 인물평이다. 러시아는 17세기까지만 해도 농촌공동체 중심의 가난하고 미개했던 슬라브족의 나라였다. 이런 국가를 개명군주 표트르 대제(1672~1725, Peter the Great)는 동유럽의 강대국으로 부상시켰다. 표트르는 1682년, 10세 나이로 로마노프왕조의 공동왕좌에 올랐지만 야심만만한 25세 이복누이 소피아의 섭정하에서 불우하게 지냈다. 병립(竝立)정권으로 남매가 통치권을 놓고 갈등을 벌인 치열한 권력투쟁중 소피아의 쿠데타를 역습, 승리한 표트르는 타고난 명민함과 열정으로 모스크바대공국을 세계열강 ‘제정 러시아’로 환골탈태시킨 것이다. 17세기 후반 차르와 보야르(봉건 귀족)의 권력투쟁, 교회와 국가 간 갈등,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 등으로 어려움을 겪던 변방국가 러시아의 기존 질서를 파괴, 혁신을 일으켜 유럽의 열강으로 개혁했다. 낡고 오래된 러시아가 한 사람 ‘표트르의 등장’으로 반세기도 되지 않아 완전히 새로운 국가로 떠오른 것이다. 러시아 역사를 축약한다면, 표트르 대제 이전의 러시아와 표트르 대제 이후의 새로운 러시아로 구분할 정도다. 오늘날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보면서 표트르와 닮은 꼴인 푸틴 행보에 기시감을 느낀다. 가흥천하 가망천하(可興天下 可亡天下), “나라를 흥하게도 하고, 망하게도 한다”는 말대로 구 소련 해체이후 만신창이가 된 3류 국가를 ‘강대국 러시아’로 부활시킨 푸틴을 보면 국가의 흥망이 한 인물의 경륜과 역량에 달려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표트르 대제’ 꿈꾸는 푸틴의 열망이 일으킨 전쟁 전제군주 표트르는 2m가 넘는 장신(長身)이었다. 그는 왕위를 이복누이 소피아에게 맡긴 후, 선진기술을 익히기 위해 250명의 서유럽 방문사절단을 조직했다. 표트르는 스스로 하사 신분으로 위장해 프로이센에서 대포 제조술을 익혔고, 네덜란드에서는 조선기술을 배웠다. 영국에서 수학 기하학 응용과학까지 배운 그는 6개국을 거쳐 18개월 만에 귀국, 1696년 누이를 축출하고, 명실공히 전권을 장악했다. 대개혁에 나선 그는 야만의 동토 러시아를 경영용어를 빌리자면 리모델링(개조) 아닌 리스트럭처링(개혁), 리엔지니어링(혁신)해 새로운 근대국가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당시 해군력이 없던 러시아는 겨울에 얼지 않는 항구, 부동항(不凍港)을 얻으려면 남쪽으로 터키가 버티고 있는 흑해, 서쪽으로는 당시 군사 강국이었던 스웨덴이 통제하는 발트해로 진출해야 했다. 1696년 인구 1400만 러시아의 표트르는 러시아 최초로 해군을 창설했고 30만 대군을 양성했다. 그리고 당시 흑해 방면을 틀어쥐고 있던 오스만제국, 발트해의 맹주였던 스웨덴과 전쟁을 통해 세력을 확장했다. 그 당시 표트르가 창설한 러시아 해군은 이후 200여년 위세를 떨쳤고, 20세기 초반 ‘해상의 왕자’로 군림했던 영국해군마저 두려워할 정도였다. 군비확장을 끝낸 표트르는 1695년 아조프(Azov) 원정으로 오스만제국과 전쟁을 벌였다. 1696년 7월 해군 지원에 힘입어 오스만제국 장악지역이던 흑해 연안의 아조프 요새 공략에 성공했다. 그는 첫 성과를 거뒀지만, 더 강력한 해군 양성을 위해 전국에서 인재 50여 명을 선발해 서유럽에서 항해 기술을 배우도록 특별 유학을 보냈고, 1697년에는 200명이 넘는 규모의 대사절단을 서유럽으로 파견, 인재를 양성했다. ‘나라를 부하게 하며 군대를 강화’시키는 부국강병(富國强兵)만이 살길이라는 법가(法家)사상을 바탕으로 국방력을 강화, 1700년 8월 발트해로 진출해 이후 20년 동안 지속한 스웨덴과의 북방 전쟁을 전개했다. 1711년 투르크와의 싸움에서는 패하였지만, 표트르는 스웨덴 함대를 격파한 뒤 곧바로 육군을 동원하여 핀란드를 침공하였고, 여세를 몰아 스웨덴 본국을 침략해 승리했다. 1721년 북방 전쟁에 승리, 8월 30일 니시타트 평화조약 체결로 발트해 연안을 획득하고, 이듬해 페르시아에 원정하여 카스피해 서안을 합병하였다. 스웨덴을 정복, 고대 노브고로드의 영토를 회복했고 발트해 연안에서는 강대국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동유럽의 전통적인 강대국이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사실상 속국(屬國)으로 만들었다. 인그리야, 카렐리야 일부, 에스트랸디야, 리플랸디야 지역 등 러시아 북부와 발트 해 연안지역을 병합함으로써 발트해로의 ‘전략적 출구’를 확보해 북방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교회의 종까지 녹여 대포를 만들 정도로 국방력을 강화, 전쟁에서 승리해 러시아를 유럽의 강국으로 끌어올렸다. 날카로운 통찰력과 깊은 책략을 지닌 표트르는 새로운 국가의 틀 속에 유럽 문화를 주입, 행정·산업·상업·기술·문화·교육도 개혁했다. 그는 학교건립·해외 유학·문자개량·신문창간·새 수도건설 등 서유럽식 근대화를 추진한 국가개혁를 통해 러시아를 유럽 열강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이처럼 정치, 군사,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낡은 법률과 미비한 제도 등 국가체제를 완전히 바꾼 근대화 개혁을 추진해 제정 러시아는 명실상부한 유럽의 강대국으로 등장한것이다. 특히 그는 불모지였던 늪지대를 메워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거대 도시를 건설, 모스크바에서 천도(遷都)했다. 수도 이전이라는 국책사업을 추진하면서 무리하게 진행된 토목공사와 철권통치에 저항한 민중반란 진압과정에서 10여만 명을 살상했다. 급진적 개혁을 반대하는 투쟁을 피의 숙청으로 진압한 그는 전제주의적 절대주의 체제를 구축, 당시 서유럽에서 퍼지고 있던 시민 계급 성장도 방해했다. 그러나 독재자 표트르가 강력한 통치력으로 추진한 국가개혁 덕분에 러시아는 중세적인 후진국에서 벗어나 근대적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철권통치의 수수께끼와 같은 괴력을 발휘하며 40년 가까이 국가개혁을 통해, 문명화된 강대국의 성장 기반을 마련한 표트르는 마침내 ‘러시아 제국’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1721년 10월 원로원에 의해 로마 초대 황제인 카이사르(시저)에서 따온 명칭인 황제(차르:Tsar)로 추대됐다. 역사가들로부터는 ‘대제(大帝:the Great)’를 뜻하는 표트르 대제(Pyotr Veliky)’ 칭호를 받았다. 레닌 동상이 헐린 현재도 모스크바에 30m 높이의 위용(偉容)을 자랑하는 표트르 대제 동상은 ‘역사는 흔히 그런 무자비한 악당을 통해 한 걸음씩 전진한다’라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집무실에 표트르 초상화를 걸어놓고 기회 있을 때마다 영토 확장 등 그의 치적을 꺼내며 그와 ‘영혼 대화’를 한다는 ‘러시아 대통령 푸틴’은 21세기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를 롤모델로 삼고 있다. 영토확장을 통해 ‘강대국 러시아의 원형’를 창조한 표트르가 되기를 열망하는 푸틴의 열망이 “우크라이나 땅은 빼앗는 게 아니라 되찾는 것”이라는 침공 당위성의 배경이 되고 있다. 표트르, “한 마디(寸)를 탐내면 한 마디를, 한 자(尺)를 탐내면 한 자를…” ‘위대한 황제’라는 표트르는 사악하고 기괴한 성품의 군주였다. 자신의 개혁정책에 반대하는 수많은 인명을 비정하게 살해했다. 심지어 자기 외아들인 황태자 알렉세이 표트로비치가 반란에 가담했다며 고문하고 사형까지 선고, 반개혁세력 제거에 활용할 정도였다. 제정 러시아의 토대를 구축한 위대한 지도자이면서 이반 뇌제(雷帝)나 스탈린보다 더 가혹한 희대의 폭군이었다. 53세에 요로결석 합병증으로 숨진 그는 “하느님께서 제 죄를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는 유언을 남겼다. 러시아 역사에서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표트르는 발군(拔群)의 치적으로 가장 뛰어난 통치자이자 성공한 개혁 군주로 평가되고 있다. “발트해와 흑해 연안의 땅은 러시아가 반드시 날마다 조금씩 잠식(蠶食)해야 한다. 한마디(寸)를 탐내면 한 마디를 갖게 되고 한 자(尺)를 탐내면 한 자를 갖게 된다. 그치는 곳이 없으면 끝나는 때도 없다.” (『역주 옥중 잡기』, 우남 이승만 전집 6권, 연세대학교 출판문화원, p.108. 2022.10.7.)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현안(懸案)이 된 요즈음 이승만 전 대통령이 백여 년 전에 주목한 ‘피터대제의 유언’은 러시아의 대외정책의 특징인 ‘무한한 영토욕’을 증명하는 상징적 자료다. 유언은 구한말 패권국 러시아의 영토 야욕을 경계해 일본이 퍼뜨린 공로주의(恐露主義)의 한 단면으로, 이승만을 비롯한 공로주의자(恐露主義者)들로 하여금 러시아를 경계하게 했다. 이승만은 한문으로 번역된 이 문건을 1910년에 한글로 출판한 『독립정신』의 ‘아라사(俄羅斯) 정치 내력’이라는 장(章)에서 아래와 같이 약술했다. “…1672년에 대피득(표트르 대제)이라 하는 인군이 평생에 각국을 병탄할 욕심이 있어 사방으로 토지를 널리 확장하고 마침내 장생(長生)할 계책이 없어 욕심을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줄 먼저 생각한지라. 미리 열네 조목 유언(遺言)을 지어 깊이 간수하고 그 후 자손으로 하여금 대대로 유전하며 비밀히 감추고 형편을 따라 본떠 행하라 하였나니, 그 중 대지가 강한 나라와 먼저 합하여 작은 나라를 나누어 없이하고, 그 후에는 틈을 타서 그 나라를 마저 쳐 없이하며 자유하는 나라에는 혼인을 통하거나 달리 결련(結連)하여 먼저 내정을 간섭하여 권리를 주장하라. 모든 이런 궤휼(詭誘)·간교(奸巧)한 계책의 뜻이 가장 음험한지라, 그 후로 누대(累代) 인군되는 이들이 다 준행하여 효험이 많더니 근래에 이르러 그 글이 발각되어 세상에 드러남에 그 ‘무한한 욕심’을 알고 각국이 크게 두려워하여 사람마다 전파하여 하나도 모르는 자 없도록 만들며 구라파주(유럽)에 모든 나라가 아라사(러시아)의 세력을 막기로 제일 긴급한 문제로 삼지 않는 자가 없는지라…” 20대 후반의 청년 이승만이 반역죄로 5년 7개월 감옥 생활 중 한문으로 필사한 ‘러시아 피터대제의 고명’(俄彼得大帝 顧命) 요지는 슬라브족의 뿌리 깊은 영토적 야심을 보여준다.(우남 이승만 전집 6권 : 역주 옥중잡기) 이 문건은 ‘표트르 1세’가 임종 전에 남긴 부탁의 말, 즉 유언장(遺言狀)이다. 이승만은 “재위 중에 서거하자 뒤를 이은 각 황제가 고명(顧命, 유언)을 상전(相傳)하여 버리지 않았다…. 1896년 겨울에 이르러 미국 대례상(大禮相, 미상) 보관인(報館人, 신문기자)이 진본 14조를 찾아냈다.”라고 기록했다. 이 문건은 1948년, 진본이 존재하지 않는 위서(僞書)로 판명 났다.(Dimitry V. Lehovich, "The Testament of Peter the Great", American Slavic and East European Review, 7(2): 111-124, Apr, 1948). 류석춘교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건은 러시아가 팽창정책을 펼칠 때마다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19세기 중반 크림전쟁으로 불리는 1차 동방전쟁(1853-56), 터키와의 전쟁인 2차 동방전쟁 (1877-78), 그리고 1차 세계대전 (1914 - 1918) 등이 그 예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러시아의 현대판 ‘짜르’라 불리는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오늘날은 과연 표트르 대제의 고명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일까.”라고 주장했다. (이승만의 ‘옥중잡기’ 중 ‘러시아 피터 대제의 유언’과 우크라 전쟁, 류석춘 전 연세대 교수, 자유일보, 2022.3.13) 러시아는 국토면적이 1,712만 ㎢에 동서 간 거리가 9600km에 달해 세계에서 가장 영토가 넓다. 총 11개의 시간대가 존재할 정도로 광대한 러시아는 우리나라 면적의 170여 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탐욕스러운 영토 확장 야심은 피터대제 이후 푸틴에 이르기까지 범슬라브주의, 유라시아이즘 등 명칭을 바꿔가며 그치지 않고 있다. 미 CIA에서 제공하는 The World Fact book(‘23) 통계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 다시 말해 지표면적의 7분의 1인 러시아는 미국의 1.8배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임에도 푸틴이 집무실에 표트르 대제 초상화를 걸어놓고 그의 고명인 영토 확장을 다짐하는 한, 우크라이나의 운명은 풍전등화(風前燈火)로 강대국 국제정치의 희생물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심장이고,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머리이며, 키예프는 어머니이다”는 슬라브 속담대로 우크라이나가 자신들의 땅이라는 러시아의 지정학적 선택은 영원히 반복될 숙명을 안고있다.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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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렬 논설고문] “나는 그때 알게 되었어, 소냐. 권력은 용기를 내 몸을 굽혀 그것을 줍는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말이야. 오직 하나, 하나만이 필요한 거야. 용기를 내는 일만이 필요한 거야!” (도스토옙스키, 1821~1881년, <罪와 罰>, 제4부 제4장) 소설 <죄와 벌>에서 백해무익(百害無益)한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살해, 그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것이 낫다는 사회주의적 이상을 내세운 ‘인간 경계를 뛰어넘는 살인범’ 라스콜리니코프. 그가 굶주리는 가족을 위해 매춘부(賣春婦)가 된 소냐에게 ‘권력의 본질’을 말한 대목이다.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를 위해 자신을 던져 구원자 역할을 맡았던 ‘순수한 영혼’의 소냐에게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난 나폴레옹이 되고 싶었지. 그래서 죽였어”라고 외친다. ‘보통사람’이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지만 ‘비범한 권력자’가 대의명분을 위해 전쟁을 하고, 수천 명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는 라스콜리니코프는 ‘나폴레옹 같은 초인’은 인류를 위하여 사회의 도덕률을 넘어설 권리가 있다고 결론짓고, 자신을 나폴레옹에게 빗대 초인의식(超人意識)으로 심리적 무장을 한다. 따라서 그는 사회악이며 이(蝨)에 불과한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죽여도 양심의 가책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실천에 옮긴 ‘예수의 영혼을 지닌 시저’ 같은 인물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에 소설의 무대가 된 상트페테르부르크 뒷골목에서 자신의 신념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청년 라스콜리니코프의 고뇌를 느끼며 ‘보통인간’의 경계를 뛰어넘은 초인사상(超人思想)을 익힌 푸틴이다. 훗날 대통령이 돼 수차례 전쟁을 치르고, 지금도 전쟁중인 푸틴이 추천한 9권의 책 가운데 2권이 가장 좋아하는 동향(同鄕) 작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카라마조프 형제>라고 밝힌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마키아벨리는『군주론』에서 “주어진 운명(fortuna)을 용기 있는 결단(virtu)으로 극복하는 자가 군주”라고 했다. 로마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키케로의 “운명은 강한 자를 돕는다”는 말대로 푸틴은 ‘강한 자가 승리하는 게 아니라, 승리한 자가 강한 자’임을 입증했다. . ‘권력의 본질’을 본능적으로 꿰뚫어 본 FSB(소련의 국내 치안과 방첩을 담당하던 KGB 제2총국의 후신 중 하나로, 러시아 국내 첩보와 방첩활동을 담당하는 정보기관으로 통칭 聯邦保安局)국장 푸틴이 ‘옐친 정부’ 권부(權府)인 FSB·구 KGB 등, 군부, 경찰 출신과 권력 실세 등 비밀기관에 종횡으로 엮인 ‘실로비키 네트워크’를 통해 ‘몸을 굽혀’ 용기를 내 ‘권력을 줍는 동안’, 총체적 난국에 빠진 러시아의 경제 정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1985년 고르바초프 서기장 집권 6년만인 1991년 초강대국 소련이 건국 74년 만에 15개 공화국으로 분리, 해체된 뒤 ‘러시아공화국’ 새 집권자가 된 옐친 초대 대통령의 무능한 국가경영은 엉망진창이었다. 미래 번영이나 희망을 줄 국가 비전 제시에 실패한 옐친에 실망한 러시아인들은 유능하고, 국익을 신장시킬 국가재건의 영웅을 대망(待望)하고 있었다. 이때 옐친은 권력서열이 한참 낮고, 중앙정계에 낯선 무명(無名:noname)의 첩보원 출신 푸틴 FSB국장을 파격적으로 총리에 발탁한다. 체첸전쟁 승리 ‘영웅 이미지’ 부각, 대통령 당선 총리가 된 푸틴은 당시 국가적 현안이었던 체첸전쟁에 직면,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돌파구를 마련했다. 1996년 체결된 정전협정으로 잠시 소강상태였던 1차 체첸 전쟁(1994~96년)은 막대한 전쟁비용 누적 등 국가리스크를 키우고 있었다. FSB 국장 때부터 체첸 독립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전쟁을 구상하고 있던 푸틴 총리는 체첸전쟁을 통해 옐친이 말한 ‘군인다운 태도’를 선보이는 기회를 포착했다. 그는 옐친 대통령에게 체첸에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절대 권한’을 요구한다. 푸틴 총리는 1차 전쟁과 달리 1999년 9월, 러시아군과 내무부 소속 병력에 전격적인 2차 체첸 침공을 명령해 체첸 전체 장악을 시도했다. 그는 여론이 어떻게 반응할지, 총리로서 정치적 생명은 안중에도 없는 듯, 체첸전쟁에 모든 것을 걸었다. 푸틴은 2주간 체첸 반군이 장악한 다게스탄 마을을 공습, 무자비하게 유린하는 공포감을 조성하며 체첸 초토화 작전을 전개했다. 직접 전투기를 몰고 전투 현장을 깜짝 방문해 공을 세운 러시아군에 훈장을 달아주는 장면 등을 연출, 늙고 병약한 옐친 대통령에 대비되는 젊고 강력한 40대 총리 이미지를 강렬하게 부각시켰다. 2차 전쟁의 경우, 1차 전쟁과 달리 모스크바 테러를 겪은 뒤라 푸틴의 과단성 있는 강력한 리더십에 조응(照應)해 지지율이 매우 높아졌다. 8월에 총리로 지명될 때 푸틴의 ‘대통령 후보’ 지지율은 2%에 불과했으나, 10월에는 27%, 11월에 40%를 넘어서면서 ‘국가적 영웅’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다. 이런 여세를 몰아 푸틴 총리는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자신의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인사들을 총리실장, 부총리, FSB 제1부국장, ‘단합당’ 원내 당수 등에 전격적으로 기용하는 한편, 구 KGB 동료들을 안보위원회 서기, FSB 국장 등에 발탁하여 친정체제를 구축했다. 거미줄처럼 깔린 실로비키 정보망을 통해 ‘황금 어항에 갇힌 금붕어’를 보듯 부패한 권력 집단이 된 옐친 패밀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받고 있던 푸틴은 착착 대권 장악을 위한 물밑작업을 추진했다. 40대 전후반의 파워 엘리트 100여 명으로 구성된 두뇌집단(think tank)인 ‘전략연구센터’를 발족시켜 대선 전략뿐만 아니라 ‘강한 러시아’를 목표로 한 ‘국가개조 프로젝트’를 은밀하게 추진했다. 집권 후 구체적인 통치로드맵도 작성해 러시아가 직면한 대내외적 복합 위기 대처방안을 준비한 것이다. 몸을 낮추고 때를 기다리는 이유는 나서야 할 때 제대로 나서기 위함이다. 미인에게는 질투가 따르고 영웅에게는 어려움이 따르는 법이어서 몸을 낮춰 인내심을 갖고 재능을 감추고 때를 기다리던 푸틴은 기회를 포착, 맹호출림(猛虎出林)격으로 대선을 앞두고 초반에 기세를 제압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정국 주도권 장악을 위한 기선제압책으로「러시아 연방 신국가 안보개념」(2000. 1. 10)과 우리나라의 국회 격인 국가두마의 개원 연설(1.18) 및「신 대외정책 개념」(3.24) 등 국가청사진을 발표, 국민적 지지를 기반으로 정국을 주도하면서 대권 장악을 모색하였다. 특별한 배경이나 뛰어난 경력이 없던 그는 ‘선수를 쳐서 적을 제압한다’라는 선즉제인(先則制人)의 병법에 따라 있는 힘을 다해 국가적 과제 해결에 선제적으로 대응, 성심껏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퇴임 후 길은 여러 갈래지만 퇴로(退路)를 못 찾아 방황하는 옐친 대통령을 향해서는 권력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척 자신의 재능과 본심을 숨기는 철저한 도회술(韜晦術)로 무장한 지략(智略)을 발휘, 옐친의 환심을 사며 대응했다. 옐친은 퇴임이 다가오며 마지막 숨통을 조여오는 국내외적인 위기상황에서 푸틴을 포함한 보리스 넴초프 부총리, 세르게이 스테파신 내무부 장관(이후 넉 달간 총리), 니콜라이 악세넨코 교통부 장관 등 10여 명의 보호막이 돼줄 후계자를 놓고 저울질하며 고심을 거듭했다. 결과적으로 푸틴은 퇴임 후가 불안한 옐친의 유일한 방패막이가 자신임을 ‘업무’를 통해 옐친 대통령과 옐친 패밀리에게 용의주도(用意周到)하게 정치적 포석을 통해 암시했던 셈이다. 당시 옐친의 사위로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최고 실세였던 유마셰프 비서실장은 훗날 푸틴의 업무처리 능력에 반해 푸틴을 행정실 제1부실장으로 발탁했다고 밝혔다. 그는 “푸틴과 몇 달 동안 함께 일하면서 그의 업무 능력을 확인했다”며 “사안을 분석하고, 아이디어를 내고, 추진하는 데 특히 뛰어났다”고 평가했다. 유마셰프는 “옐친은 1991년 소련의 붕괴를 이끌었던 세대는 자신과 함께 떠나야 하고, 20년 정도 젊은 45~50세 세대가 나라를 맡아야 한다”며 “나라를 믿고 맡길 수 있으며 자신의 개혁정책을 계속 추진할 사람을 원했다”고 증언했다. 재직 중 숱한 과오로 퇴임 후 ‘신변보장’을 고민하며 자신을 지켜줄 ‘신뢰할 만한’ 강직한 인물을 찾아 암중모색하던 옐친은 푸틴을 놓고 마지막 저울질을 했다. 유마셰프는 ‘푸틴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옐친에게 “푸틴이 일하는 방식을 지켜보니, 앞으로 더 큰 일, 더 어려운 일을 할 준비가 된 친구”로 ‘최고의 후보’라고 강력하게 추천, 킹메이커가 된다. 푸틴 총리를 후계자로 낙점한 옐친은 또 한 번의 정치적 도박으로, 2000년 새해가 밝기 3주 전 푸틴에게 러시아 연방의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제의했다. 푸틴은 ‘부담하기엔 다소 무거운 짐’이라며 ‘아직 준비가 덜 됐다’고 겸양하며 고사(固辭)했지만, 옐친은 “이것은 운명이요”라며, 임기 6개월을 남겨두고 1999년 말 대통령직 사임 의사를 밝혔다. ‘난극당치(亂極當治)’, 옐친 퇴진과 신성(新星) 푸틴 등장 소련의 갑작스러운 붕괴 이후 신생 러시아가 탄생했지만, 옐친 집권 말기 ‘100달러만 있으면 안될일이 없다’던 정치 경제 등 총체적 국가적 혼란은 그야말로 ‘난극당치(亂極當治)’였다. 중국의 주희(朱熹)가 <논어(論語)>해설에서 “혼란(混亂)이 극에 달해, 그 끝에 이르러 난세(亂世)가 되면 ‘새로운 질서’가 태동된다”고 지적한 대로 러시아는 새 질서를 주도할 새 인물을 대망하고 있었다. 오후만 되면 독한 보드카에 취한 알코올 중독과 고질적인 심장질환에 시달리는 옐친 대통령의 병상 통치는 국가경영의 비정상화를 가속화 해 사실상 국가경영이 마비되는 국정 난맥상이 극에 달한 국가적 위기상황이었다. 헌법에 따른 정상적 선거 일정상 대선이 2000년 6월이었지만 옐친 대통령이 임기를 6개월 앞당긴 조기 사임으로 총리인 푸틴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되면 ‘옐친 퇴임’ 90일 이내인 2000년 3월 26일에 대통령을 선출해야 했다. 현직 대통령 권한대행 ‘프리미엄’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선거를 치르게 배려한 것이다. 이런 정치적 고려 끝에 옐친 대통령은 인기 급락과 경제 파탄이라는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국가 위기 상황에서 1900년대가 끝나는 1999년 12월 31일, ‘금세기 마지막 날인 오늘’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푸틴 총리에게 ‘대통령직무 대리’를 맡긴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이날 낮 12시 공공 TV(ORT) 생방송에서 옐친은 창백하고 근엄한 표정을 한 채 건강에 대한 고려와 함께 후진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6개월 동안 더 권좌에 남아 있지 않고 당장 하야(下野)한다면서 전격적으로 ‘대통령직’ 사퇴 메시지, 즉 ‘새 천년을 새로운 인물과 맞이해야 한다’는 퇴임의 변(弁)을 밝혔다. 그는 재임 중 실책(失策)에 용서를 구하고 러시아가 새로운 정치 지도자들과 함께 ‘새로운 21세기’에 들어가는 ‘역사적 상황’을 통절하게 인식, “난 아직 현실로 다가오지 않은 당신들의 꿈을 위하여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또한 난 당신들의 희망을 옳다고 주장하지 못한 데 대한 용서를 구합니다.”라며 “나는 떠납니다. 할 수 있는 것을 나름대로 다 했습니다”고 담담하게 토로했다. 심신이 지쳐 집무가 힘들던 옐친대통령의 선양(禪讓)으로 ‘자신의 맡은 바 직책’에 최선을 다해 묵묵히 일해온 푸틴은 그야말로 어느 날 갑자기 기다리지도 않던 선물로 ‘러시아의 최고 권력자’가 된 것처럼 보인다. ‘결정적 시기’를 기다리며 인내하고 인내하던 시진핑(習近平)이 그랬던 것처럼 대권(大權)은 홀연히 찾아드는 선물 같은 것이라는 러시아판 맥연회수(驀然回首)였다. 소련이 해체된 난세의 천시(天時), 페테르부르크 중심의 네트워크라는 지리(地利)와 KGB 인맥이 뒷받침된 인화(人和) 3박자가 합을 이룬 천운(天運)이 그에게 돌아온 것이다. 푸틴의 등극은 이미 정해져 있어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천운으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천운(天運)의 運은 ‘돌 운’으로 결국 ‘운은 돌고 돈다’라는 의미로 운은 알아서 오고 또 알아서 간다고 하던가. 천시(天時)가 맞아떨어져 천명(天命)을 받은 푸틴은 드라마틱한 연출로 20세기가 끝나는 1999년 12월 31일 자정이 지나 21세기가 열린 2000년 1월 1일 정초(正初)부터 ‘러시아 연방 대통령 대행’으로 러시아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1999년 12월 31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 권한대행’의 첫 번째 포고령은 ‘러시아 연1974년 미국 부통령이었던 제럴드 포드가 대권을 승계하면서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관련 위법행위에 특사(特赦) 조처를 내림으로써 닉슨의 모든 형사 조치를 마무리한 것처럼 옐친의 퇴임 후 안전을 보장한 조치였다. 방 전 대통령과 그 가족에 대한 안전보장’으로, 옐친 전 대통령 패밀리에게 ‘평생 면책특권 보장과 여생의 안전’에 관한 것이었다. ‘러시아 연방 대통령 대행’ 푸틴은 2000년 3월 26일 합법적인 민주적 선거절차에 따라 쟁쟁한 거물들을 꺾고 53%의 지지율로 옐친 외 누구에게도 크게 신세 지지 않고 천운(天運)으로 48세에 ‘러시아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우리가 알아챌 겨를도 없이 우리 눈앞에 화려한 신데렐라(물론 남성이지만)의 등장이라는 여간해서 일어나지 않은 역사가 연출되고 있다. 이야기의 매력은 다음과 같은 데 있다. 권력을 잡기 위해 몸부림치는 자들이 아닌, 어제 갑자기 나타나 대통령 역할을 원하지 않는 자에게 권력이 돌아간 것이다. 이것은 전 국민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한국, 푸틴의 리더십을 배우다』, 미하일 출라키, 2005) 푸틴 대통령은 내년인 2024년까지 임기를 마치면 24년 집권, 옛 소련 시절 이오시프 스탈린 서기장(29년)을 제외하면 현대 러시아의 지도자 가운데 최장기 집권자가 된다. 84세가 되는 2036년까지 6년 임기의 대통령직을 두 차례 더 역임할 수 있어 사실상 종신 집권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천하에 무서울 게 없는 큰 권력을 가진 권력자라도 미련 없이 ‘급한 물살에서 용감히 물러나는’ 급류용퇴(急流勇退)처럼 물러날 때가 되면 용단을 내려 스스로 퇴진하는 항룡유회(亢龍有悔)하지 않는 지혜가 큰 지도자 덕목이다. 옐친은 진퇴(進退)의 묘수를 발휘, 푸틴 총리를 후계자로 선택하고 6개월 임기를 앞당겨 전격 사임하는 결단을 내려 국가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서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러시아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칭송받으며 76세로 천수(天壽)를 누렸다. 수나라 왕통(王通)도 <지학(止學)>에서 인간의 승패와 영욕에서 평범과 비범의 엇갈림이 ‘멈출 지(止)’란 한 글자에 달려 있다고 설파했다. 범사(凡事)에 때가 있듯이 ‘나아감’과 ‘물러설’ 때를 정확하게 잡아 행동하는 ‘지학(止學)의 묘용(妙用)’을 외면한 푸틴 대통령은 내년 선거 승리를 노려 우크라이나를 침공, 수만명 살상 등으로 국제전범으로까지 회자(膾炙)되고 있다. 종신 장기집권을 노린 교묘한 대중조작과 언론통제로 몇 차례 개헌을 통해 합법을 가장해 권력을 유지, 용퇴의 기회를 놓친 푸틴은 이제 기호지세(騎虎之勢)의 처지가 되었다. 호랑이를 타고 가다 도중에 내리면 잡아먹히듯 중도에 그만둘 수 없는 절박한 형세에 처한 푸틴의 미래는 히틀러 등 과거 독재자의 말로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구소련의 영광을 재현할 만큼 ‘러시아 제국’ 재건의 토대를 닦았다는 평판을 얻은 푸틴이지만 공성신퇴(功成身退), 즉 어떤 자리에서 업적을 이뤘을 때 영광을 누리려고만 하고 물러날 때를 놓친다면 큰 화를 입는 경우가 많은 준엄한 역사의 교훈을 외면하고 있다. “우리는 ‘인간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을 역사로부터 배웠다”는 헤겔의 역설적인 지적을 무시하는 푸틴의 비극적 종말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는 감상이다.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