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바 메모리 매각]SK하이닉스 역할론 대두 “신뢰 회복·인재이탈 막아야”

2017-10-04 20:42
도시바 메모리의 교훈 - (6)·끝

SK하이닉스가 반도체 기술역량 극대화의 일환으로 2000억원 이상을 투자, 이달 이천캠퍼스에 착공하는 연구개발센터 조감도. 2019년 9월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사진=SK하이닉스 제공]


“젊은 사람들이 계속 떠나고 있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전직 도시바 직원(OB)는 이렇게 푸념했다. 60대 중반을 넘어선 그는 고도성장 시기 셀러리맨 생활의 대부분을 도시바에서 보낸 인물. 직장을 떠났어도 회사에 대한 애착은 여전한 그는 현역 사원의 퇴직이 계속되는 것에 가슴 아파했다.

그는 산케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반도체 사업은 근년에 삼성을 따라잡지 못할 것 같다. 젊은 기술자들은 다른 곳에서 자신의 능력을 살리겠다며 떠나고, 베테랑 직원들은 대학교 연구실로 가겠다고 한다. (도시바는) 이미 장래가 없는 것인가”라고 말했다.

연결기준 도시바 전체 임직원 수는 올 3월말 15만3492명에서 불과 3개월 후인 6월말에는 15만2364명으로 1000명 이상 감소했다. 이유는 확실하지 않지만, 쪼그라든 회사에 대한 실망으로 살길을 찾아나선 것으로 추정된다.

◆떠나는 도시바 인재 잡기 혈안
일본은 현재 정보기술(IT) 엔지니어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사물인터넷(IoT), 인공지능(VR), 가상현실(AR), 자율주행차 등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춘 융합산업에 대응하기 위해 각 기업들이 사활을 걸고 인재 확보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일본내 전직 지원 서비스 업체 조사 결과 따르면, 8월말 기준 전직 구인 배율은 전체의 1.9배지만, IT계 엔지니어는 3.88배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인재 쟁탈전에서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도시바는 달콤한 먹잇감이다. 도시바 간부도 “그만두는 기술자들의 비율이 평소보다 높아지고 있다”며 불안감을 드러냈다.

조직 결속력이 강한 일본인들의 정서적 기반을 놓고 봤을 때, 도시바 직원들의 퇴사는 그만큼 회사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회계부정 사태가 발생한 직후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도시바는 결산과 유가 증권 보고서의 발표도 연기를 반복했다. 도시바 메모리 매각 작업에서도 무려 8번이나 결정을 번복하는 등 일본을 대표하는 명문 기업이라는 이미지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냈다. 위기 상황을 해결하는 데 있어 추진력을 보여주지 못한 최고경영진들의 빈약한 리더십도 여과없이 드러났다. 외부의 신뢰 붕괴와 더불어 내부 직원들도 “더 이상 회사에 내 미래를 맡길 수 없다”는 불신이 커질대로 커졌다.

나카조라 마나 BNP파리바증권 수석 크래딧 애널리스트는 “만약 도시바가 상장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해도 투자자나 이해 관계자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도시바가 신뢰를 회복하는데 3~5년은 걸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추락한 신뢰 회복 우선 과제
도시바 메모리도 마찬가지다. 모기업 부실 원인과는 상관없다고 하지만,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인수·합병(M&A) 시장에 매물로 내몰리는 수모를 겪었고, 합작 파트너인 미국 웨스턴디지털(WD)에게 소송까지 당하는 치욕을 맛봤다.

무엇보다도 많은 돈을 제시했다고 기술 수준에서 자신들보다 한창 아래라고 여겼던 훙하이정밀공업 등 중국·대만 기업들에게 내다 팔려고 했던 본사 경영진들의 조치는 도시바 메모리 기술진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줬다.

회사를 인수한 ‘한미일 연합’은 도시바 메모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지배구조 체제에서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찌됐건 모그룹의 그늘 아래에서 절대적인 의결권을 갖고 사업을 해왔던 도시바 메모리는 빠른 의사소통이 생명인 반도체 사업에서 시장을 주도해왔다.

하지만 앞으로는 다르다. 미국의 애플과 델, 시게이트 테크놀로지와 킹스턴 테크놀로지 등 이해관계자들은 경영에는 참여하지 않겠지만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물밑작업을 벌일 것이 분명하다.

도시바가 의결권의 과반을 쥐었지만, 나루케 야스오 부사장 같은 소신있는 경영진들이 과거처럼 도시바 메모리 경영을 주도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반도체를 떼어낸 ‘새로운(New) 도시바’나 도시바 메모리 모두 강력한 구심점을 지닌 최고경영자(CEO)를 선임해 과감한 경영혁신을 꾀해야 한다.

◆SK하이닉스의 경험은 도시바 메모리 경영 교과서
이에, 비록 경영권 참여가 제한됐지만 도시바 메모리가 닥친 상황을 놓고 볼 때 SK하이닉스의 역할에 귀추가 주목된다. 일본측이 도시바 메모리와 경쟁사라는 점을 우려하지만, 도시바 메모리 임직원들이 그나마 ‘한미일 연합’을 지지한 이유는 SK하이닉스가 반도체 사업의 희노애락을 모두 경험한 기업이라는 점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도시바 메모리는 사실 SK하이닉스가 새주인 이름에 올라가 있다는 점에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수전에 참여한 4개 컨소시엄 가운데 반도체 일관생산공정라인(FAB) 구축·운용한 경험이 풍부한 기업은 SK하이닉스가 유일하다”면서 “반도체를 잘 아는 기업이라면 도시바 메모리의 성장에 어떤 식으로든 우군이 되어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한미일 연합을 밀어준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또한 SK하이닉스는 SK그룹이라는 큰 지붕 아래에 있다. SK그룹은 국내 대기업 가운데에서도 M&A를 가장 잘하는 기업으로 손꼽히며, 수펙스(SUPEX)라는 고유의 문화를 활용해 인수기업의 ‘SK화’도 잡음 없이 진행했다. 무엇보다도 반도체 사업 경험이 사실상 전무했던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SK하이닉스를 인수후 회사의 장점을 그대로 살리고,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과감한 투자를 그룹 차원에서 전개하는 등 통큰 지원을 해 회사를 반도체 산업 2위 업체로 확고히 자리매김 했다.

전문경영인 체제로 10여년을 성장해 온 SK하이닉스와 ‘오너경영인’ 최태원 회장의 SK그룹이 결합해 확실한 시너지를 낸 것이다.

SK하이닉스가 당장 도시바 메모리의 경영에 참여하진 않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SK하이닉스의 경험은 도시바 메모리 경영을 책임지게 된 ‘한미일 연합’ 컨소시엄에 좋은 교과서가 될 것이 분명하다. 기업 이미지 추락을 어떻게 만회해야 할지, 떠나는 젊은 인재들을 어떻게 되돌려야 할지, 강력한 CEO 리더십은 어떻게 발휘해야 할지 등의 질문에 SK와 SK하이닉스는 적지 않은 기여를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SK하이닉스의 도시바 메모리 인수 참여 효과는 도시바 메모리측의 구애가 본격화 되는 시점에 드러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