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화보]중한 영화, 상호보완하며 발전해온 25년

2017-08-31 14:45

베이징박중미래문화미디어유한공사의 대표 손장현(한국)=올해 8월 중국과 한국은 수교 25주년을 맞이한다. 중한 경제교역의 규모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이젠 양국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파트너가 되었다. 그 시간 속에 서로의 감성과 가슴으로 소통할 수 있는 문화 교류도 급속도로 많아졌다. 영화, 연예인, 드라마, 음악, 패션 등은 이제 양국 국민들의 중요한 공통 관심사가 되었다.

서로가 몰랐던 그들만의 영화
대륙에서 만들어진 중국영화가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됐던 시기는 1980년대 후반이었다. 장이머우(張藝謀) 감독과 천카이거(陳凱歌) 감독의 <붉은수수밭(紅高梁)>, <홍등(大紅燈籠高高挂)>, <귀주이야기(秋菊打官司)>, <패왕별희(覇王別姬)> 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패왕별희> 같은 작품은 한국은 물론 전 세계 영화제와 관객의 관심을 받으며 중국 영화를 세계인의 관심속으로 이끈 작품이었다. 그때까지 만해도 한국의 영화 관객들은 홍콩 느와르 영화를 중국영화로 알고 있었다. 반면 수교 당시 중국인들이 알고 있는 한국 영화는 거의 없었다. 영화를 전공하는 학생들만이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와 이두용 감독의 <뽕> 정도를 아는 것이 고작이었다. 오히려 조선(북한)에서 만든 <꽃 파는 처녀>, <망향>, <피바다> 등의 영화를 더 많이 알던 시기였다.

서로를 알게해준 ‘한류’
1990년대 한국은 본격적으로 문화의 상업화가 가속화되는 시기를 맞는다. 서구를 통해 유입된 해외의 상업적 문화들이 한국의 젊은이들을 자극시켰고 모든 대중문화는 소비자들을 찾아 적극적 대중화의 길을 가기 시작한다. 수교 이후 한국유학생들의 숫자가 급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중국으로 몰려드는 한국유학생들은 자연스럽게 한국에서 활성화되는 한국의 상업문화를 중국으로 실어 나르는 개미 역할을 하며 중국의 청소년들과 자연스런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고 중국인들이 한국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하게 하는 첨병 역할을 하게 된다.
처음 ‘한류’의 물꼬를 튼 것은 한국의 대중음악이었다. 한국의 대중음악을 소개하는 ’서울음악실’ 이라는 국제라디오방송국의 프로그램을 시발로 안재욱, HOT, NRG, 베이비복스, 이정현 등 한국 가수들의 콘서트가 중국 청소년을 열광시켰다.
또한 한국의 드라마는 중국중앙방송(CCTV)나 베이징방송(BTV) 등 중국 전역의 방송을 통해 소개되었다. 1993년 CCTV가 한국 MBC로부터 수입된 첫번째 한국 드라마 <질투>로부터 한국드라마는 중국에서 24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그 기간 중국 각 TV방송을 통해 100여 편에 달하는 한국드라마가 중국에서 방영됐고 시청률은 나쁘지 않았다. 그 중 <가을동화>, <대장금>이 가장 대표적이다. 반면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드라마도 있었다. 2002년 중국 드라마 <황제의 딸>은 한국에서 큰 인기를 누렸고 많은 한국인들은 <황제의 딸>로부터 중국 드라마를 알게 됐다.
 

중국 배우 장쯔이(章子怡)와 위룽광(于榮光)이 참여한 중한합작영화 <무사>(2001)는 당시 한국에서 투자액이 가장 많았던 합작영화인 동시에 한국 영화에서 처음으로 중국배우를 주연배우로 캐스팅한 작품이었다.[사진=인민화보사 ]

영화 <마이웨이> 촬영현장에서 중국 배우 판빙빙(范冰冰)에게 영화내용을 설명하고 있는 손장현[사진=손장현 제공]


서로를 알기 위한 시도와 노력
영화, 드라마, 음악, 패션 등 문화의 여러 분야 중 영화에서의 교류는 다소 늦게 시작되었다. 중국과의 교류 협력을 모색하던 한국영화는 처음으로 중국을 영화 촬영의 로케이션으로 활용하려 한다. 중국의 풍광과 스케일을 담기 위해 1999년 영화 <아나키스트>는 ‘협작(協拍)’이라는 협력 방식으로, 같은 해 영화 ’비천무’는 ‘합작(合拍)’과 중국용, 한국용 두가지 버전을 만드는 협력 방식으로, 2000년 김성수 감독의 <무사>는 중국 스태프와 촬영지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각각 다양한 교류 방식을 시도했다. 그 이후 많은 한국영화가 중국의 다양한 볼거리를 활용하는 형태로 제작되어 진다. 하지만 양국의 영화가 대중에게 소개되는 것은 외국영화의 쿼터제나 양국간 영화 소재의 제한 등으로 인해 한계가 있었다.
중한 수교 2년이 채 안되어 교류가 본격화 되기 전, 1994년 강제규 감독이 베이징을 방문했다. 그는 중국 영화감독 장위안(張元)의 부인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닝따이(寧岱)에게 자신의 첫번째 작품 <은행나무침대>의 시나리오 집필을 의뢰했고, 장위안 감독의 <북경녀석들(北京雜種)>의 한국 내 배급도 상의했다. 양국간의 언어적·문화적 차이, 대중의 선호도 차이 탓에 성공적 교류가 되지는 않았지만 의미있는 첫 중한 영화 교류였다.
그 후로도 다각도로 영화 부문의 교류 협력이 시도되었으나 딱히 속시원한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을 즈음 펑샤오강(馮小剛) 감독이 영화 <집결호(集結號)>의 촬영 때 <태극기 휘날리며>의 기술 스태프들을 소개해주기를 강제규 감독에게 부탁을 한다. 이에 <집결호>는 양국 촬영 스태프들 간 인적교류까지 이뤄진 첫 영화가 됐다. 2007년 <집결호>는 중국 대중영화의 박스오피스 기록을 갈아 치우는 역사를 세우게 된다. 이후 <집결호> 촬영에 참여한 한국 스태프들이 <집결호>에 이어 우위썬(吳宇森) 감독의 <적벽>까지 참여함에 따라 새로운 방식의 중한 영화 교류영역이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다.
<집결호>의 성공은 중국에서도 영화를 통한 상업적 영역의 개척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중국 영화인들에게 고취시키며 중국영화를 산업적 측면에서 바라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의 기술 스태프들은 한국 영화시장 규모의 한계로 인해 다양한 장르와 스케일의 작품을 만날 기회가 제한적이었던 아쉬움을 중국이란 큰 규모의 시장에서 극복하기를 희망했다. 이런 중한 양국 영화시장의 각기 다른 수요가 그 이후로 <당산대지진(唐山大地震)>, <용문비갑(龍門飛甲)>, <1942>, <적인걸(狄仁杰)> 등의 작품을 통해 중국의 컨텐츠에 한국의 기술력이 결합하는 형태로 수많은 성공사례들을 만들었다.
최근 몇 년 간 영화 외에 중한 양국은 예능면에서도 다양한 협력을 시도해왔다. <나는 가수다>, <아빠 어디가>, <런닝맨> 등 중국판이 연이어 중국에서 방영됐고 대박을 터뜨렸다. 심지어 한국 유명 PD가 중국 진출에 나서기도 했다. 중한 예능면의 협력도 갈수록 심화됐다. 과거 한국에서 판권을 들여오는 것으로부터 공동제작, 나아가 한국으로부터 우수예능인재를 영입하기도 한다. 중한 예능 면의 협력이 시작된 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 발전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서로에게 도움주는 길이 열리다
불과 몇 년 전 중국 영화시장의 산업규모는 한국의 절반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미국 헐리우드 영화시장을 초월해 전세계 1, 2위를 다투는 규모가 되었다. 2013년 저우싱츠(周星馳) <서유강마편(西遊降魔篇)>의 시장 내 성공은 중국형 블록버스터의 신호탄이 되었고 중국 영화산업 성장의 원동력이 되며 중국 박스오피스 급성장의 발판이 되었다. 기술 스태프의 중국 영화 참여에 머물던 한국의 영화인들도 기술뿐 만이 아닌 기획과 극작, 연출 인력분야에서 중국 영화인들 과의 전방위적 협력을 하기에 이른다. 마침 인터넷을 통해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가 중국에 다양하게 소개되며 한국 영상시장의 상업적 기획력에 대한 중국 영화인의 기대가 점점 높아지는 계기도 마련 되었으며, 단시간내에 급속도로 커진 중국 영상시장은 다양한 콘텐츠와 이야깃거리가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양국 영화시장의 만남은 상호보완적 관계를 통해 지금도 다양한 협력과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다만 언어적 차이를 극복하고 양국 소비자의 눈높이를 맞춰 갈수 있는 합리적 협력 방법의 모색은 좀더 지켜봐야 할 듯 하다.
중한 수교 25년 동안 양국은 세계 그 어떤 국가들도 해내지 못한 비약적 규모의 성장을 이뤄냈다. 문화의 기초는 언어이다. 희망적인 것은 중국과 한국의 청소년들 중 양국의 언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할 수 있는 인력들이 점점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인력들이 중국과 한국의 영화 협력 현장에서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아시아에서 만들어진 영화가 전세계에서 세계인을 상대로 공감을 얻어내고 상업적 성공을 거두는 것, 이것이 바로 중한 영화인들의 꿈일 것이다.

* 본 기사는 중국 국무원 산하 중국외문국 인민화보사가 제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