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교의 세상보기] 후야오방은 되고 자오쯔양은 안되는 이유
2015-11-26 16:30
후야오방은 문화대혁명 당시 마오쩌둥(毛澤東)의 극좌노선에 따르지 않아 박해를 받았다. 그가 정치 일선에 복귀한 건 1976년 마오 사망 뒤였다. 1982년 중국공산당 중앙 총서기에 오른 뒤에는 개혁개방 작업을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1986년 12월 베이징, 상하이 등 주요 도시에서 학생 시위가 벌어졌으나 이에 소극적으로 대응했다는 이유로 낙마하게 된다.
후에 대한 복권이 이뤄진 배경은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우선 덩샤오핑(鄧小平)은 1987년 1월 정치국확대회의를 통해 후를 총서기직에서 쫓아내면서도 그에게 가혹하게 대하지 않았다. 후의 정치국 상무위원 자리를 그대로 둔 건 이를 잘 말해준다. 더욱이 그해 11월 열린 당 13기1중전회(제13기 중앙위원회 1차 전체회의)에서 후는 정치국위원에 선출됐다. 1989년 4월 15일 그가 사망하자 국장을 치르도록 허용했다. 총서기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상당한 당내 위상이 유지된 것이다.
후와 시진핑(習近平) 주석 아버지 시중쉰(習仲勳) 간 인연도 거론된다. 문혁이 종말을 고하면서 재기한 후가 1977년 당 조직부장을 맡은 뒤 개혁 성향의 시중쉰을 복권시킨 것이나, 시중쉰이 후의 실각에 유일하게 반대했다는 게 그것이다. 시 주석도 후의 장남 후더핑과 끈끈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이 두 가지에 더해 근본적으로는 중국이 지금 내세우고 있는 시대 정신이 후를 복권에 이르게 했다고 봐야 한다. 시 주석은 후야오방 탄생 100주년 기념 좌담회에서 “후야오방 동지는 중국 개혁 개방에 위대한 공헌을 했다”고 밝혔다. 시진핑 지도부가 이미 추진하고 있는 각종 개혁 정책을 흔들림 없이 밀고 갈 것이란 확실한 선언인 셈이다.
그렇다면 여전히 ‘국가의 죄수’(자오쯔양의 비밀회고록 제목)로 남아있는 자오쯔양(趙紫陽)은? 그는 후야오방에 이어 1987년 중공 총서기에 올라 개혁과 민주화를 추구했다. 1989년 후가 사망하자 학생들의 톈안먼 시위로 번졌으나 그는 당 원로들의 조기 진압 주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실각된 뒤 16년 동안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야 했다. 2005년 1월 17일 사망했으나 10년이 지나도록 유골조차 안장되지 못하고 있다. 후야오방의 실각 뒤 모습과는 엄청난 차이다.
이는 당이 현재 통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인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즉 당이 관료화로 인해 ‘대표성의 위기’를 겪고 있을 뿐 아니라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약화로 주체성을 상실하면서 ‘정당성의 위기’에도 노출돼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중국 소장학자들이 중국사회주의의 앞날을 토론한 ‘대도지행(大道之行): 중국공산당과 중국사회주의’(중국인민대 출판사, 2015)라는 단행본에 잘 기술돼 있다. 옌이룽 칭화대 공공관리학원 조교수 등 70~80년대 출생 학자 5명이 쓴 이 책은 중국이 당면한 문제와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목을 끌었다.
안이불망위 존이불망망(安而不忘危 存而不忘亡). 중국공산당이 통치 위기 앞에서 가슴에 새겨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말이다. ‘평안할 때 위기를 잊어서는 안되고 존속할 수 있을 때 망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주역에 나온다.
신중국은 1949년 출범 뒤 지금까지 30년 주기로 큰 고비를 경험했다. 첫 30년이 '혁명의 시대'였다면 그 뒤 30여년은 '개혁의 시대'였다. 앞으로 30년은 중국사회주의의 제도화가 정착되는 시기가 돼야 한다는 게 대도지행 저자들의 생각이자 당이 추구하는 방향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개혁 개방 30년이 지나면서 시장경제가 당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고 있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중국은 현재 '비공유제'가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이미 70%에 근접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공동부유' 추구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지상과제가 됐다는 것이다. 소장학자들은 이를 ‘자본 머리 위에 올라탄 사회주의’라고 부르고 있다.
개혁 개방을 계속해야 하지만 당의 정체성은 지켜나가야 한다는 고민, 이게 자오쯔양을 복권시키지 못하는 중국공산당의 현주소다.
(아주경제 글로벌뉴스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