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지창욱에게서 레몬꽃 향기가 난다
2015-02-23 10:14
최근 드라마 '힐러'에서 짐승 같은 촉과 무술 실력으로 어떤 의뢰든 완수하는 업계 최고의 심부름꾼 힐러 서정후 역을 맡아 시청자와 만난 지창욱은 3년 전 만났을 때보다 한층 성숙해있었다. 2012년 겨울이 되기 직전, '다섯 손가락'을 막 끝냈을 때였는데, 외모도 내면도 아직 다 갖춰지지 않은 앳된 모습이었다. 그때는 상큼한 레몬향을 풍겼다면 지금은 진한 풍미까지 더해져 자꾸만 맛고 싶어지는 향이 난다.
'난 네게 반했어'(2008)로 시작한 그는 이후 '솔약국집 아들들'(2009)에서 막내아들 송미풍 역을 맡아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귀공자 같은 외모에 훈내 나는 기럭지를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지창욱을 지켜보기 시작한 건 첫 타이틀롤을 맡은 '웃어라 동해야'(2010)였다. 고작 데뷔 3년차인 '꼬맹이'가 호흡이 긴 일일드라마를 잘 이끌 수 있을까 했던 우려는 기우였다. 그는 보란듯이 국민드라마 반열에 올려놓았고, 그때부터 탄탄대로를 걸었다. '무사 백동수'(2011)와 '다섯 손가락'(2012), '기황후'(2014)를 거쳐 오늘의 '힐러'까지. 그는 짧지만 긴 지난 7년 동안 안방극장을 웃기고 울리면서 이름 석자를 각인시켰다.
도전을 소홀히 하지도 않았다. 2013년 뮤지컬 '그날들'을 처음 만난 이후 지금까지 한 차례도 빠지지 않고 무대에 올랐다. 연기는 '그날들'을 만나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지창욱. 그래서일까. 그의 필모그라피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날들' 이전에 출연한 '다섯 손가락'과 이후에 출연한 '기황후'에서의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심을 담으려는 노력, 상대방을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한 눈빛, 그리고 손짓 하나에, 몸짓 하나에 신중을 기하는 태도까지. 이제, 지창욱은 소위 말하는 '진짜' 배우가 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떠오르는 신예에서 대세로, 대세에서 또 기대되는 배우가 되기까지, 장르를 불문한 다양한 작품을 거쳐오면서 다듬어진 그의 내공을 들여다보자.
- 캐릭터에 빠져 사는 스타일은 아닌가봐요. 사실 캐릭터에 빠져 산다는 말 자체를 이해를 못하겠어요. 예를 들어 살인마 캐릭터를 하면 본인 스스로도 악해지고, 우울한 캐릭터를 연기하면 진짜 우울해진다는데... 그건 사실 너무 나약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캐릭터에 빠져 있는다는 게 정말 가능한지 솔직히 궁금하기도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까지 그런 경험은 없어요.
- 드라마 종영 후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요. 10일 오전에 모든 촬영이 다 끝났어요. 다음날 배우들과 쫑파티를 했고요. 목요일 밤 늦게는 미뤄놨던 화보 촬영을 했어요. 또 촬영할 때는 정말 정신없이 바빠서 돌아볼 겨를이 없거든요. 다 끝난 후에 쉬면서 머릿속을 정리하죠. 예를 들어 '힐러'의 서정후는 어떤 인물이며, '힐러'가 말하고자 하는 게 뭔지. 작품을 해석하고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해요. 보통은 작품 시작 전에 하는데 저는 이상하게 마지막에 하게 되더라고요.
- 다르게 말하면 캐릭터나 작품을 다 이해하지 못한 채 연기했다는 말인데... 하하. 그렇게도 들리네요. 물론 캐릭터는 다 이해했죠. 캐릭터를 더 이해해야지가 아니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거에요. 그때 그 장면에서 아쉬웠던 건 뭔지, 그 인물을 다시 한 번 정의내려보기도 하고요. 뭐하는지도 모른 채 하는 걸 정말 싫어해요. 그래서 정말 이해가 안 가면 끝까지 물어보고 생각하는 스타일이에요.
- 그래서 내린 결론이 뭔가요? 스태프와의 관계요. 하하. '힐러'를 하면서 많이 아쉬웠던 게 '시간의 부족함'이었어요. 마지막으로 갈수록 거의 생방송이었거든요.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컸죠 그 중에 하나는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스태프와 더 친해질 수 있었을텐데...’ 하는 거에요. 사실 작품에 대한 아쉬움은 배우 뿐만 아니라 감독, 작가, 모든 스태프가 다 있을거에요. 다만 배우와 연출, 배우와 작가, 배우와 스태프와의 관계가 좋아야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작업할 수 있다는 걸 배웠어요. 단순한 배우와 스태프의 관계가 아니라 나랑 같이 일하는 형, 누나라고 생각하려고 해요. 그들과의 거리를 좁히는 게 시청률을 높이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죠. 하하.
- 스태프와 있었던 일 중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요? 13회였어요. 방송 3사 중 시청률 1위 했던 날이죠. 다음날 첫 촬영장의 분위기를 잊을 수가 없어요. 정말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스태프의 눈빛이나 행동을 보면서 더 책임감을 느끼기도 했고요. 이들은 겉으로 보여지는 직업도 아닌데... 뭘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할까를 생각하면 절대 소홀히 할 수 없어요. 그들은 오로지 자부심 때문에 일하는 거거든요.
- 짧은 시간동안 유난히 타이틀롤을 많이 맡았어요. 부담감도 어마어마할 것 같아요. 부담이 없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에요. 사실 작품 전에는 불안함과 부담감, 걱정거리가 정말 많아요. 이번 작품도 제가 힐러니까 ‘잘 안되면 어ᄄᅠᆨ하지’, ‘반응이 안 좋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있었어요. 근데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믿으려고요. 경쟁작 ‘펀치’에 조재현, 김래원 선배님이 있다면 우리한테는 송지나 작가 선생님이 있고, 유지태 형이 있으니까요. 무엇이든 혼자 이끄는 건 불가능해요. ‘내가 이끌어야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망합니다. 하하.
- 어쨌든 계속 타이틀롤을 맡는다는 건 연출과 작가의 믿음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누군가에게 믿음을 받고 있다는 건 정말 큰 힘이 될거에요. 저는 사실 ‘감독님과 작가님이 나를 믿고있구나’ 하는 생각은 안 들어요. 솔직히 지금도 잘 모르겠고요. 단지 제가 그분들을 믿고, 그 분들이 저를 믿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운거죠.
- 그만큼 연기에 대한 고민도 많이 하겠죠? ‘웃어라 동해야’ 할 때였어요. 연기적으로 가장 많은 고민을 했었죠. ‘나는 안 되나보다’, ‘나는 재능이 없나보다’라고 생각하면서 좌절하고 울기도 많이 했어요. 그때 김유석 형님께서 ‘재능있는 배우는 없다, 노력하면 다 된다’고 해주셨는데 그 말이 정말 큰 힘이 됐죠. 재능은 제가 만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하하.
- 배우로 살아온 지난 몇 년을 돌이켜보면 어때요? 정말 아무 것도 모르던 애기가 이렇게 컸구나 싶어요. 하하.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모르고 시작했던 일인데, 수많은 선배들을 지켜보고, 이야기하면서 나름대로 연기 철학도 생겼거든요. 연기에 대한 고집만큼은 꺽고 싶지 않아요. 다만 유연하게 변하고 싶을 뿐이에요. 지금도 그 과정에 있다고 생각하고요.
-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게 있다면요? 사소한 것부터 아주 많죠. 음.. 단지 삶에는 계기라는게 없는 것 같아요. 한순간에 바뀐 적도 있고요. 돌맹이가 수십년, 수백년 동안 강물에 휩쓸리면서 둥그렇게 바뀌잖아요. 저도 되게 천천히 변화하고 있는 것 같아요. 어떤 계기나 누군가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바뀐 건 정말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