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시 인장 박물관 민영근 관장 당진시에 고려 인장 유물 기증
2014-12-30 10:32
아주경제 손봉환 기자 = 인장 박물관 민영근 전 당진 문화원장이 당진시 합덕읍 합덕시장로 있는 황토민속역사관인 인장박물관을 지난 9월 개관했다.
민영근 관장은 인장의 역사는 중국 신석기시대의 도인(陶印) 으로 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종이가 발명되기 전까지는 진흙으로 만든 봉니인(封泥印)이었으나, 종이가 발명된 이후 압인(押印)으로 대체되자 인면(印面)에 큰 변화를 가져 왔다.
인장은 주인의 권위와 품격을 상징하는 것으로 재료의 고급화가 이루어 졌을 뿐만 아니라, 인면의 인문배치와 각 법(刻法)이 중요시되어 인장과 전각(篆刻)과는 매우 밀접한 상관관계를 이루며 발전했다. 그 결과 명· 청대에 이르러 시(時)· 서(書)·화(畵)와 같은 예술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우리나라의 역사 속의 인장의 역사를 살펴보면, 삼국시대에 인장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고, 안압지에서도 굵게 음각된 세로 6.2Cm의 목인(木印)이 발견되었고 고려시대에는 익종때 인부랑(印符郞)을 두어 관인을 관장하도록 했으나 조선이 건국되면서 폐기되어 현존하는 것은 모두 사인(私印)이다.그 대부분 청동 인이고 청자로 된 도인이 약간 전해지고 있다.
인문은 방사선식으로 배열된 것이 많고, 때로는 문자가 아닌 것도 있어 판독하기 어려운 것도 많다. 조선시대의 관인은 상서원(尙瑞院)에서 관장했는데, 전하는 것은 모두 방형 혹은 장방형의 동인(銅印)이나 철인(鐵印)이며 조선시대에는 사인이 일반화되어 사구인· 수장인· 감정인까지 다양하게 제작되었고 18세기 중엽이후 청나라에서 금석학과 고증학의 영향을 받은 뒤 더욱 크게 발전했다.
인장의 시작과 발전은 우리 선조들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높이는 임금의 명을 증명하는 것이었고, 사사로이는 백성들 간 거래의 증명이기도 했다. 실생활과 밀접하게 사용되었던 인장은 전각이라 작업을 거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작업이었다.결국 인장은 긴 시간을 거치며 예술로 인정받고 발전하게 된다.
실용품이기도 하고 예술품이기도 한 독특한 정체성, 인장은 실용과 예술의 사이에 서 있는 경계유물(境界遺物)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순간에도 알게 모르게 여러 흔적들이 남을 것이며 먼 훗날이 되겠지만, 지금 우리가 남긴 흔적들 역시 우리의 후손들에게 큰 의미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민 관장은 “우리의 흔적들은 후손들에게 우리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이야기가 되어 주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유물수집이란 작업은 우리 선조들의 삶을 재구성 하고 그 분들과 대화를 시도해 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라”며이번에 전시하게 된 인장이란 유물 역시 우리 선조들의 실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흔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유물을 모아 온지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인장의 수집은 특별히 신경 써왔던 부분이며 인장은 우리 선조들 실생활에 꼭 필요한 부분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예술로 인정받은 것들이다. 그저 보고 감상하기만 하는 예술품만이 아니라 선조들의 삶에 깊게 관여되었던 유물, 그 사이에 위치한 인장은 그만의 독특한 매력이 있다고 했다.
또한 전시유물을 보고 선조들의 삶을 좀 더 가깝게 느껴 보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며 현재 인장박물관장에는 추사 김정희, 소치 허련, 해강 김구진, 이당 김은호, 표암 강세황, 우념제 이봉환, 부적 관청, 보부상 인장 등 30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고 했다.
민영근 관장은 30여 년 동안 지역에서 수집하여 소장했던 유물 200여 종 4,727점을 당진시와 유물 기증 협약식을 통해 고서, 궁중의상, 전통복장, 도자기 ,토기, 동기, 선사시대 유물, 서화, 와당, 인장, 벼루, 근대문서, 각종 민속생활품 등으로 시대별로는 구석기시대부터 일제 강점기까지의 유물을 기증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