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빛과 소금 그리고 119
2014-12-16 11:52
경기도 재난안전본부 교육훈련팀 소방위 양광호
신약성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했다.
몇 년 전에 TV에서 방영되어 화제가 되었던 다큐멘터리 “차마고도”에서도 소금을 싣고 수천 킬로미터를 가서 물물교환을 통하여 삶을 이어가는 마방들의 고달픈 생활이 소개된 적이 있다.
그러면 인류는 언제부터 소금의 필요성을 알았으며 어떤 방법을 통하여 필요한 소금을 얻었을까?
원시시대의 인류는 동물의 피를 통해서, 혹은 곡물이 가지고 있는 소량의 소금을 섭취함으로서 소금 부족 문제를 해결했다. 좀 더 발전된 방법으로는 염전을 통한 채취와 암염을 통한 채취로 나눠지는데, 과거 문명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에는 인간은 해안가에 주로 살았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바닷물을 이용한 소금채취의 역사가 더 깊을 것으로 보인다.
2천 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그 토록 당부하면서 원수를 사랑하고 나의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무한 사랑의 정신을 남겼는데 현대인들은 그런 가르침에 대하여 그다지 의식하며 사는 것 같지는 않다.
고층건물과 아파트로 대변되는 도시의 생활 속에서 우리들은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혹은 백화점이나 장터에서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는 많은 이웃들과 살아가면서 과연 그들을 얼마나 의식하며 살아가는가?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이웃사촌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 사촌이란 본래 친족 간의 호칭이지만 이웃에 같이 사는 사람을 친족 이상으로 생각하면서 살아왔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어지간한 아파트 한 동이면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이 더불어 살아가는데 그 중에 나의 진정한 이웃이 얼마나 있는가? 얇은 벽 하나 사이를 두고 이웃에 사는 사람의 이름은 고사하고 얼굴조차 모르는 현대인에게 있어서 이웃의 개념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러나 어찌 보면 삭막하고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가는 것 같으면서도 그래도 인간의 피는 항상 따뜻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이유는 각종 사고현장을 누비는 119 소방대원의 시각에서 보면 더욱 더 그런 생각이 들게 된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경전으로 받들지는 않더라도 우리 소방대원들은 몸속에 흐르는 따뜻한 피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제 누가 뭐라고 해도 119는 우리 사회의 빛이며 소금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도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 신발 끈을 동여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