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운동의 대부' 김근태 상임고문은 누구?

2011-12-30 11:23
'민주화 운동의 대부' 김근태 상임고문은 누구?

(아주경제 이준혁 기자)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사인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30일 오전 5시 31분 향년 6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수년 째 파킨슨병을 앓던 김 상임고문은 지난달 29일부터 뇌정맥혈전증으로 서울대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으나 2차 합병증이 겹치면서 패혈증으로 한달 만에 숨을 거뒀다.

'뇌정맥혈전증'은 뇌의 정맥이 막혀 뇌에서 나온 혈액이 심장으로 잘 운반되지 않는 증상으로, 심하면 뇌출혈 등을 유발한다. 김 고문은 80년대 재야운동 당시 당한 숱한 고문 후유증과 지난 2007년부터 앓던 파킨슨병 등으로 심신이 많이 약해진 상태에서 이 병을 앓아왔다. 결국 김 고문은 최근 딸 병민 씨의 결혼식에도 참석을 못할 정도로 증세가 심각해졌다.

김 상임고문은 군사정부 시절 민주화 운동으로 수배와 투옥을 반복했으며, 민주정부 수립 이후에는 재야출신 정치인 그룹 좌장으로서 잠재적 대권주자로 분류되기도 했으나 꿈을 이루진 못했다.


서울대 재학 중이던 1971년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수배받은 것을 시작으로 재야민주화운동에 투신한 그는 1972년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에 연루된 데 이어, 1975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다시 수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등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수배와 투옥을 반복했다. 이 때문에 11년간 얼굴을 감추고 숨어 지내며 재야 민주화 운동에 몰두했다.

군사정권 시절인 1983년에는 전두환 정권 최초의 저항단체인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하고 첫 의장을 역임했다. 이 단체에는 이해찬 전 국무총리를 비롯 강창일-문학진 의원, 정봉주 전 의원 등도 소속돼 있었다. 민청련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 저항에 적극 나서면서 '재야운동세력 양성소' 역할을 자임하고 민주화운동을 확산시켰다.

1985년에는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기술자'로 불린 이근안 경감 등에게 10차례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받는 등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결국 이후 콧물 흘림, 손떨림, 단기기억 상실 등 극심한 고문 후유증상을 보였다. 그가 2006년 이래 투병해온 파킨슨병은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것이란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민주정부 수립 이후인 1995년 민주당 부총재로 제도 정치권에 진입 후 이듬해 15대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서울 도봉갑 지역구에서 내리 3선에 오르며 재야출신 정치인 그룹의 좌장으로서 잠재적 대권 주자로 분류됐다.

하지만 현실정치에 발딛은 그는 번번히 결정적인 기회를 잡지 못하고 '저평가 우량주'로 평가됐다.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국민경선 당시에는 불법 정치자금에 대해 "아름다운 꼴찌를 기억해달라"며 양심고백을 하고 경선을 중도에서 포기하는 좌절을 경험했다.

2002년 대통령 경선에서도 노무현 후보에게 자리를 내준 그는 이후로는 정동영 의원에게 밀려 대권주자의 자리에 서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원칙과 가치를 일관되게 추구하며 중심을 잡던 몇 안 되는 정치인이었다.

김 고문은 참여정부 시절 보건복지부 장관, 열린우리당 의장 등을 역임했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오랜 동지면서도 정책 등에서 이견이 있을 때 '할 말은 하는' 입장을 견지했고, 장관 등을 거치며 개혁성과 탁월한 논리력을 겸비한 정치인으로 인정받았다.

18대 총선 때 한나라당 신지호 의원에게 패해 낙선한 이후로는 진보세력을 포함하는 '민주세력 대연합'을 시대적 과제로 삼아 통합의 산파 역할을 했으며, 내년 4월 총선에서 재기를 모색해왔지만 결국 총선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그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유족은 로버트케네디 인권상을 공동 수상한 부인 인재근씨와 1남1녀(병준, 병민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