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사망> 고난의 통치 시대 겪어온 김정일, 어떻게 북한 이끌어 왔나
2011-12-20 19:36
(아주경제 송정훈 기자)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국가경제와 식량배급제가 완전히 붕괴한 상황에서 나름 변화를 추구하면서 북한을 이끌었다. 파격적 외교술을 선보이면서 실리주의 등을 미래 비전으로 선보이며 파탄 난 북한체제의 생명을 연장했다.
◆‘고난의 행군’ 파탄 난 북한 승계
지난 1994년 7월8일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본격적인 김정일 시대가 열렸지만 북한의 모든 상황은 엉망진창 그 자체였다.
북한 스스로 ‘고난의 행군’이라고 명명한 이 시기에 국가경제와 식량배급제는 완전히 붕괴해 수백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하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통제기능은 마비되는 등 사실상 어려운 상황이다.
대외적으로는 미국과 핵문제로 대립하고 있었고 전통적 우방인 중국과 러시아와는 한국과 수교 이후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으면서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고립상태나 다름없었다.
이미 1980년 공식 후계자로 낙점돼 권력자로 자리 잡은 김정일 위원장이었지만 이 같은 대내외적 상황은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선뜻 오르는 데 장애물이 됐다.
결국 김 위원장은 김일성에 대한 3년 상을 계기로 ‘유훈통치’ 기간을 설정하고 얼굴 없는 통치를 이어갔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표어로 당시 상황에 대한 책임을 김일성과 나눠 가지려고 했다.
특히 안팎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김 위원장은 상명하달의 수직적 조직체계를 갖추고 ‘물리적 강제력’을 보유한 군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내부의 어려운 상황을 돌파하고 정치적 안정을 이루려는 의도로 그는 군을 우대하고 군에 의존하는 군부통치로 북한 사회 전반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나갔다.
이같이 김일성 3주기를 마친 뒤 1997년 9월 추대 형식으로 당 총비서에 올랐으며 이듬해 10월 제10기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최고 권력기관으로 자리매김한 국방위원회의 수장으로 재추대되면서 명실상부한 최고지도자가 됐다.
◆김정일 새대 ‘파격 외교’...그러나
김정일 시대의 출범과 더불어 군부통치는 ‘선군정치’로 명명됐고 김정일 시대의 강력한 통치구호로 자리했다.
김 위원장은 또 경제적, 외교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나름의 변화를 추구했다.
1998년 제10기 최고인민회의는 ‘사회주의 헌법’의 개정을 통해 경제난 속에서 변화된 사회상을 반영했으며 세대교체를 통해 젊은 기술관료를 내각에 등용했다. 2002년에는 7·1경제관리개선조치를 통해 시장을 확대하고 임금과 물가를 현실화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이 과정에서‘강성대국론’,‘신사고론’,‘실리주의’등 미래를 향한 새로운 비전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체제 고수를 위해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면서 실질적으로 북한 경제를 변화시키진 못했다는 평가다.
그럼에도 김 위원장은 파격 외교 행보로 상식을 뛰어넘는 승부사 기질을 보였다.
1994년 미국과 담판을 통해 북미 기본합의를 이끌어낸 그는 남쪽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 금강산 관광사업 등 파격적인 남북교류를 추진했으며 2000년에는 반세기만의 정상회담을 하고 6·15공동선언에 직접 서명하기도 했다.
동시에 미국과도 적극적인 관계 개선에 나서면서 2000년 10월에는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을 특사로 미국에 파견하고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국무장관과 만났고 클린턴 대통령과 정상회담도 추진했다.
2002년에는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를 평양으로 불러들여 일본인 납치 피해자 문제를 시인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는 ‘고백외교’를 통해 북일수교에 이어지는 일본의 경제적 지원을 겨냥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6년 10월에는 핵실험을 통해 군사적 위력을 과시했지만 국제적으로는 고립을 심화시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