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독일 민족주의가 유로존 붕괴를 바란다?
2011-12-04 18:15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유로존을 지킬 것”이라고 수차례 밝히고 있지만, 프랑스, 미국 등 세계가 바라는 유럽중앙은행(ECB)의 적극적인 개입에는 반대하고 있다. 왜일까?
표면적으로 독일은 유로존 조약상 ECB는 인플레이션 대처 기관이지 지금같은 위기상황에 직접 나서 유로화를 찍어 시장에 뿌려 댈 권한은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경제학 논리상 고전적인 중앙은행의 고유 역할과 다름없다.
이 같은 상황에서 지난주 헬무트 콜 전 독일 수상은 “독일이 나서 유로존 위기를 극복해야 하며 뒷짐을 지고 있으면 안된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콜 수상은 독일 통일을 이루어내고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유로존 협상을 하면서 독일의 마르크화 포기를 반대하던 독일 국민을 설득시켰던 인물이다.
유로 국가들도 독일의 보다 적극적인 개입을 원하고 있다. 과거 두 차례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가 패망하면서 절대 권력을 잃고 거의 유명무실해진 독일 모습에 내심 환호하던 유럽 국민들의 모습이 이젠 아니다. 독일 나찌에 의해 큰 피해를 입은 당사자인 폴란드의 외무장관 라도슬라우 시코스키는 “독일의 힘보다도 독일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더 무섭다”고까지 말할 정도다.
해외 언론이나 전문가들은 이같은 독일의 소극적인 모습이 독일의 뼛속 깊은 애국주의와 전통적인 원칙주의에서 나오고 있다고 보고 있다.
독일은 역사적으로 원칙을 중시하는 나라이다. 유로존이 출범하기 전에도 경제 원칙을 중시했고 이를 시장에 잘 적용하는 모범적인 국가로 평가받았다. 따라서 ECB의 역할에 대한 독일의 입장은 이 원칙주의를 표면상 잘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면 국민들 정서를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요인이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독일 국민들 자체가 ECB 역할 확대나 독일의 전면 개입을 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독일이 쌓은 경제력, 즉 국부가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위기를 입은 나라로 흩어져 없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위기를 자초한 나라가 더 먼저 앞서서 적자를 감축하고 지출을 줄이고 더 강력한 구조조정을 시행하라는 독일 국민들 정서는 장기적으로는 맞는 얘기다. 하지만, 현재 유로존이 맞은 위기의 시급함을 볼 때 전혀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가 독일이 겉으로는 유로존 사수를 외치고 있지만, 뒤로는 유로존 붕괴와 마르크화 부활을 원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이 같은 불신이 현실화되면 유로존을 더 빨리 붕괴시킬 수 있는 선행적 요인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 독일인들에게 뼛속 깊이 묻혀 있는 애국심과 게르만 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유로존 성립으로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게 이들의 분석이다.
유로존 성립으로 프랑스에게 주도권을 내주었다는 불만도 자리잡고 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은 경제 대국이 되었지만 항상 프랑스에게 유럽에서의 주도권을 내줄 수 밖에 없는 정치적 환경에 놓였었다. '나찌 전범'이라는 낙인이 찍힌 독일로서는 어쩔 수 없었고, 경제 대국으로 잘 살면 된다는 소극적 자부심이 강했지만, 유로존이 생기면서 이 같은 추세는 지속됐다.
독일의 보수 민족주의자들은 만일 유로존이 깨지면 프랑스는 자동적으로 그 힘이 약해지고 독일이 다시 유럽 초강대국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만일 이런 분석이 사실이고, 결국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되서 유로존이 붕괴한다면 독일은 다시 유럽의 최강대국으로 태어날 수 있겠지만, 유럽을 분열시키고 파괴시킨 당사자라는 나찌 독일이후 최대의 비난을 또 한번 면치 못할 전망이다.
/워싱턴(미국)= 송지영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