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삼국지 기행-1허베이편> 1-1(上) 줘저우 “삼형제, 한날 한시에 함께 죽기를 다짐하다”

2012-02-28 18:15

 

삼국지의 시발점 줘저우



(아주경제 배인선 김현철 기자) 
[서문] 줘저우(涿州)로 향하던 도중 취재진의 차량이 낡고 패인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지난다. 희뿌연 먼지에 뒤덮여 간판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길가의 상점들. 후한말 구국의 영웅들이 병사들을 이끌고 이곳을 지날때도 자욱히 먼지가 일었을 터였다. 시골 읍내를 통과한 차량은 드넓게 펼쳐진 포도밭 언저리에서 잠시 멈춰섰다. 한때 이 벌판에서는 삼국지 영웅들이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며 용쟁호투의 피비린내나는 싸움을 벌였을 것이다. 

<걸어서 삼국지 기행> 허베이성편 기행일정.

‘중국의 젖줄’황하(黃河)의 북쪽에 위치한 허베이(河北)성 일대는 예로부터 물이 귀한 곳으로 후한 말 '삼국지 시대'에는 변방과 같은 곳이었다. 강수량이 적고 땅이 척박하여 농사도 시원치 않았다. 황하에서 멀리 떨어진 탓에 숲도 드물고 마을과 읍내는 일년내내 뿌연 먼지에 뒤덮혔다. 하지만 약 2000년 전쯤 이곳은 삼국지 영웅호걸들이 뜻을 세우고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전초전을 펼치던 곳이다.

유비, 관우, 장비가 복사꽃 흩날리는 정원에서 한날 한시에 죽기를 맹세한 줘저우(涿州), 유비의 조상인 한나라 황족의 거대한 숨결이 느껴지는 바오딩(保定), 조자룡에 대한 자부심으로 활력에 넘치는 조자룡의 고향 스자좡(石家庄), 조조가 큰 야심을 품고 천하통일을 위해 첫 발을 디뎠던 한단(邯鄲), 냉혹한 모습과는 또 다른 인간미 넘치는 조조의 문학적 발자취가 남아있는 친황다오(秦皇島).

본지 ‘걸어서 삼국지 기행’취재팀은 삼국지 중심무대의 동북쪽 변방인 허베이성에서 대탐사 기획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허베이성 곳곳에 산재한 삼국지 유적들을 찾아 2000년전 삼국지 영웅호걸들이 이곳에 남긴 생생한 역사의 발자취를 더듬어봤다. 구석 구석 걸어서 찾아간 허베이 삼국지 무대에서 본지 취재진은 역사의 편린으로 남아 권력의 덧없음과 세월무상을 말해주는 삼국지의 숱한 문학적유적들을 만날 수 있었다.

유비, 관우, 장비 이 세 사람은 비록 성씨는 다르나 서로 의형제를 맺어 위로는 나라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편히 할 것입니다.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태어나지는 못했으나 다만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함께 죽기를 하늘에 바라나이다(不求同年同月同日生,但求同年同月同日死)."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바로 유비, 관우, 장비 세 형제가 복사꽃 정원에서 하늘에 충성을 맹세한 부분이 아닌가 싶다. 

삼의궁 내 화원에 전시돼 있는 '도원결의' 그림.


역사서에 세 사람이 도원결의를 했다는 내용은 찾아 볼 수 없지만 “유비는 관우, 장비와 함께 한 침상에서 잘 만큼 친형제처럼 지냈다”라는 내용을 통해 이들이 부모는 같지 않지만 같은 피를 나눈 형제보다 진한 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에 미루어 원나라 말기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칭송받는 나관중은 실제로 일어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도원결의 부분을 소설에 첨가한다. 비록 소설 속 픽션이라고는 하지만 이들 세 형제가 맺은 의리는 깊은 인상을 남긴다.
 
취재진은 바로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이 만나 의형제를 맺으면서 시작되는 삼국지의 출발점, 줘저우(涿州)로 향했다.
 
베이징에서 차로 약 1시간 정도 달려 도착한 줘저우에 들어서자 ‘천하제일주(天下第一州)’라 쓰여진 패루(牌樓 중국식 전통대문)가 눈에 띤다.
 


줘저우 입구에 있는 패루(牌樓 중국식 전통대문). 청나라 건륭황제가 직접 ‘천하제일주(天下第一州)’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청나라 건륭황제는 과거 이곳을 찾아 줘저우가 수도에서 나가는 ‘첫 관문’이자 과거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를 맺고 이곳에서부터 천하를 바로 세우는 길에 들어섰다 하여 ‘천하제일주’로 명명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베이징 도시가 확장됨에 따라 줘저우가 위성도시로 발전해 어느 현대 도시 부럽지 않은 발전 속도를 자랑하고 있다. 도로에는 자동차가 가득하고, 길가에는 고층 건물이 즐비한 모습이다. 옛 역사 속 현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 유비 후손의 동네 - 루상묘촌
 
번화한 시내를 뒤로하고 남쪽으로 약 8km를 차를 타고 내려오니 신시가지와는 전혀 다른 시골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인구 1000여명이 사는 작은 시골마을인 유비의 고향 루상묘촌(樓桑廟村)이다.
 
이곳은 처음에 유비의 사당인 소열제묘(昭烈帝廟)만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상 유비를 한없이 숭배하는 유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조상의 사당을 지키기 위해 마을을 만들면서 루상묘촌이 되었다는 것. 루상묘촌은 유비의 생가에 커다란 뽕나무가 서 있었다는 데에서 유래된 마을 이름이다.
 
보통 마을에 사람들이 살면서 사당이 생기게 되는데 이곳은 정반대이니 그들의 조상에 대한 자부심을 알만하다.
 
물론 지금은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의 초가집도, 집 앞에 서 있었다는 커다란 뽕나무도 어느 새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삼국지를 향한 주민들의 관심만큼은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유비 관우 장비 세 형제의 늠름한 동상이 세워진 삼의(三義)광장, 결의로(結義路), 삼의로(三義路), 도원반점(桃園飯店), 도원대가(桃園大街), 삼의(三義)초등학교 등등 삼국지를 테마로 이름 붙여진 거리와 건물이 도처에 즐비한다.
 
삼의(三義)광장 한 가운데에 세워진 유비 관우 장비 세 형제 동상

삼의(三義)광장에서 한가로이 연주를 즐기고 있는 지역 어르신들.

△ 도원결의를 기념하며 - 삼의궁
 
어느덧 흙과 자갈투성인 시골길을 굽이굽이 지나 우리는 삼의궁(三義宮)에 도착했다.
유비 관우 장비의 사당이 있는 삼의궁(三義宮) 입구. 삼형제를 상징하듯 세개의 문이 나있다.
매년 음력 3월 23일에는 유비 관우 장비의 사당이 있는 삼의궁에서 성대한 묘회(廟會 절에서 열리는 전통 시장)가 열려 이 고장 사람들이 한데 모여 축제를 즐기기도 한다. 3월23일은 유비가 태어난 날이라는 설도 있고,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를 맺은 날이라는 설도 있다.
 
취재진을 안내한  우산하이(吳山海) 중국 삼국문화연구중심 부주임은 “삼의궁은 본래 수 나라때 유비 관우 장비의 충의를 기려 건설된 것으로 원과 명 청을 거쳐 1400여년의 역사를 품고 있다”며 “그러나 문화대혁명 때 소실 돼 지난 1996년 명나라 때 건축양식을 본떠 재건했다”고 설명했다.
 
민간에서는 원래 유비의 집터에 삼의궁을 세우려 했으나 건축자재를 실은 수레를 끌던 말이 이곳에서 움직이지 않아 유비의 뜻으로 헤아리고 지금의 자리에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지금의 삼의궁은 이와 같은 연유로 새로 지은 것이지만 주춧돌과 기단, 문지방만은 처음 것 그대로다.
 
삼의궁에 들어서기 위해 산문(山門) 앞에 섰다. 명나라 때 세워진 산문은 문화대혁명 당시 훼손되지 않고 현재까지 고스란히 보존된 600여년의 역사를 가진 유구한 문물이다.
 
산문 윗편에는 당시 황제가 칙서를 내려 삼의궁을 재건했다는 뜻의‘칙건 삼의궁(敇建三義宮)’이라 쓰인 편액이 걸려있다. 가까이서 살펴보니 편액 아래 부분에 희미한 무늬가 새겨져 있다.
 
우 부주임은 “앞쪽에는 세 개의 구름 문양 위에 해가 그려져 있고, 뒤쪽에는 달이 그려져 있다”며 “이는 곧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의 충의 정신이 해와 달처럼 영원히 후대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준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황제가 칙서를 내려 삼의궁을 재건했다는 뜻의‘칙건 삼의궁(?建三義宮)’편액. 앞쪽 세 개 구름 문양 위에 해가, 뒤쪽에는 달이 그려져 있다.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의 충의 정신이 해와 달처럼 영원히 후대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준다는 뜻.
산문을 지나니 왼편에 LG그룹, 일본 역사탐방단, 일본 아태 문화촉진회 등 아시아 각국단체가 이곳을 찾았다는 기념패가 걸려 있다.
 
우 부주임은 “한국 일본뿐만 아니라 저 멀리 서양에서도 충의 정신을 체험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며 루상묘촌 주민이라는데 큰 자부심을 보였다. 삼국지 속 주인공 유비 관우 장비의 충의 정신이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까지 얼마나 널리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실감할수 있었다.
 
취재진에게 삼의궁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우산하이(吳山海) 중국 삼국문화연구중심 부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