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시대 핵심100인]<18>저우샤오촨 – “버냉키보다 힘들고 스트레스 심하다”

2011-05-24 16:34

(베이징 = 조용성 특파원) 2010년부터 지속된 중국의 인플레이션은 2011년 1분기를 지나면서 심화되는 양상이다. 특히 지난 3월 중국의 물가는 전년대비 5.4% 올랐고 그 중 서민생활에 직결되는 식품가격 상승률은 무려 12%에 달했다. 이미 중국 정부는 물가안정을 국정 최우선과제로 삼고 있다.

물가가 잡히지 않는다면 표면적인 책임은 인민은행에 쏠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민은행은 중국의 중앙은행이긴 하지만 미국이나 유럽의 중앙은행과 달리 통화정책의 주도권을 쥐고 있지 못하는 상황이다. 만약 중국당국이 물가안정에 실패한다면, 저우샤오촨(周小川) 인민은행장으로서는 통화정책을 주도하지도 못했으면서 책임을 져야하는 어찌보면 억울한 처지에 놓여있다. 하지만 반대로 물가가 잡힌다면 그 공을 인정받아 내년 10월에 열릴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국위원으로의 승진이 가능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가 정치국위원 진입에 성공한다면 이듬해 3월에 열릴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현재 왕치산(王岐山) 부총리가 맡고 있는 금융통화 담당 부총리로 자리를 옮길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다른 요직으로의 이동도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다.

◆스트레스 심한 '미스터런민비'

미스터런민비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저우샤오촨은 미국의 연방준비위원회 의장인 버냉키에 곧잘 비유된다. 저우샤오촨은 서구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으며 언론노출 빈도가 높다. 지난해 미중간의 환율전쟁은 국제적인 이슈였고, 그 논쟁의 최전선에서 적극적으로 발언을 해왔기 때문에 저우샤오촨은 위안화의 아이콘으로 여겨지고 있다. 겉으로 그는 중국의 통화정책을 주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그의 위상은 버냉키에 미치지 못한다.

우선 구조적으로 인민은행은 중국의 통화정책을 결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인민은행의 가장 강력한 권한인 지급준비율과 기본금리 조정권은 국무원 상무회의가 쥐고 있다. 국무원 상무회의는 원자바오 총리와 네명의 부총리, 다섯명의 국무위원으로 이뤄진다. 저우샤오촨은 상무회의 멤버가 아니며 상급자인 왕치산부총리를 통해 의견을 전달하는 셈이다.

게다가 통화정책의 기본방향은 중국공산당 재경영도소조에서 결정된다. 재경영도소조는 조장인 원자바오(溫家寶) 총리, 부조장인 리커창(李克强) 상임부총리를 필두로 한 13명으로 이뤄진다. 현재 영도소조에는 후이량위(回良玉) 부총리, 장더장(張德江) 부총리, 왕치산 부총리, 마카이(馬凱) 국무원 비서장, 장핑(張平) 발전개혁위원회 주임, 셰쉬런(謝旭仁) 재정부 부장 등이 포함돼 있다. 저우샤오촨은 재경영도소조 13인 중 1인이다. 저우샤오촨이 금리인상을 주장하더라도 성장주의자인 후이량위, 장더장, 장핑 등이 반대하면 목소리는 묻힐 수 밖에 없는 구조다. 2010년 인플레이션 압력이 고조됐을 때 금리인상조치가 번번히 미뤄졌던 점은 이같은 구도에서 설명될 수 있다.

더욱 기본적인 환율정책의 최종 결정권은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을 필두로한 최고핵심인사 9인으로 이뤄진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있다. 이처럼 복잡한 의사결정과정속에서 저우샤오촨은 그동안 무난하게 통화정책을 조정해 온 셈이다.

실제 저우샤오촨은 지난해 12월 CCTV에 출연해 “업무 스트레스가 버냉키 의장보다 훨씬 심하고 그에 비해 업무도 훨씬 더 어렵다”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주룽지 전 총리의 전폭적인 지원

구조적인 한계와 더불어 저우샤오촨을 강력하게 지지해주던 국가 지도자그룹 의 힘이 약해지고 있다는 사실 역시 그의 발언권에 한계를 지우고 있다. 저우샤오촨은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과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았었다. 두 사람이 2003년 퇴임한 이후에는 상하이방의 거두인 황쥐(黃菊) 부총리가 그를 든든히 지원했었다. 장쩌민과 주룽지는 힘이 미약해지고 있는 상황이고 황쥐는 2007년 암으로 사망했다. 게다가 중국정치계에서는 저우샤오촨이 원자바오 총리와의 관계가 소원하다는 이야기가 자주 흘러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가 장기간 중국 경제의 시장화를 추구하면서 서방언론의 환영을 받고 있다는 점은 상당한 자산이다. 2009년 타임지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꼽히기도 했을 정도로 해외에서 환영을 받고 있는 그는 중국 금융개혁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금융계 핵심부에서 25년여를 근무해온 만큼 그는 내년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국위원으로의 승진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아버지의 부하직원이었던 장쩌민

저우샤오촨은 1948년 1월 장쑤(江蘇) 이싱(宜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저우졘난(周建南, 1917-1995)은 제1기계공업부 부장을 역임했다. 저우졘난은 상하이 교통대학을 졸업했으며, 장쩌민의 대학 10년 선배다. 제1기계공업부 부장 시절 장쩌민이 그의 부하직원이었다. 저우졘난은 선배로서 직장상사로서 장쩌민을 이끌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5년 암으로 투병중인 저우졘난을 장쩌민이 찾자 “자네가 훌륭한 지도자가 되는 것이 나의 희망”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부장을 지낸 아버지덕에 태자당으로 분류되는 저우샤오촨은 베이징 8중을 1966년 졸업했다. 문화대혁명의 폭풍에 휘말려 그는 농촌으로 하방됐으며 1972년 공농병 대학생의 신분으로 베이징 화공학원에서 공부를 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저우샤오촨은 베이징시 자동화기술연구시스템연구실에 배치받았고 이후 칭화(靑華)대 기계연구원 시스템공정응용공작연구생에 합격했다. 1982년 칭화대 박사과정을 밟았으며 당시 그와 함께 박사과정에 입학한 사람으로는 쉬상둥(徐向東) 칭화대학 열에너지 공학 교수가 꼽힌다.

그는 공학을 전공했지만 1979년부터 경제체제개혁정책 및 경제과제를 집중 연구하면서 경제학을 섭렵한 것으로 전해진다.

1985년 박사학위 취득 후 저우샤오촨은 칭화 경영대학원에서 초빙 겸직교수로 석사 및 박사 연구생들을 가르쳤다. 1984년부터 칭화대 경영대학원 원장 및 교수를 역임하고 있던 주룽지 전 총리와의 인연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칭화방의 주역, 시진핑과 인연

저우샤오촨은 주룽지를 중심으로 하는 칭화방의 주역으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왕치산 부총리 역시 주룽지 계열의 인물이다. 또한 저우샤오촨이 칭화대 겸임교수로 활동할 무렵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이 칭화대 경영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고 저우샤오촨이 시진핑의 박사학위 취득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칭화대 교수직과 함께 1986년에는 국무원 체제개혁방안 영도소조의 멤버로 활약하면서 중국경제체제개혁연구소 부소장까지 올라간다.

당시 저우샤오촨은 급진적인 대외무역 체제개혁을 건의하기도 했으며 이중가격제(雙軌制度, 동일 제품에 대해 계획범위 내에서는 국가고시가격을, 계획범위 밖의 부분에 대해서는 시장가격을 적용)를 폐지하자는 주장을 펼치기도 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1991년 상하이시 서기에서 국무원 부총리로 베이징에 입성한 주룽지는 연구원 부소장이던 저우샤오촨을 중국은행 상무이사로 발탁한다. 1995년에는 외환관리국 국장을 맡으면서 적극적으로 런민비의 자율태환을 추진했다. 이듬해에는 중앙은행인 인민은행 부행장으로 임명되는 등 쾌속승진을 이어갔다.

1998년에는 건설은행장에 취임했으며 2000년에는 중국증권관리감독위원회 주석으로 영전하게 된다. 이후 2002년 12월에는 인민은행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중국은 WTO가입에 따른 금융시장 개방, 중국은행 공상은행 등 국유상업은행의 증시상장, 2005년 7월 위안화 고정환율제 탈피 등이 그의 손을 거쳐 시행된다.

◆위안화 국제화 진두지휘

저우샤오촨이 단행한 일련의 금융개혁 정책의 기조는 시장화다. 금융시장과 금융산업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줄이고 시장에 맡기자는 정책이었다.

2008년에는 부총리로의 승진이 예상됐다. 하지만 그의 급진적인 개방정책은 지방지도자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고, 그는 인민은행장 유임에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저우샤오촨이 지방근무 경력이 없었다는 점도 마이너스 요인이었다. 그의 동료였던 왕치산이 대신 부총리로 승진해 그의 상관에 올라선다. 당시 그의 유임안에는 156표의 반대표가 나왔다. 세번째로 많은 반대표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달러화 위주의 경제체제에 우려가 일었고, 미국의 양적완화 정책은 달러화 최대 보유국인 중국에게는 뼈아픈 환차손으로 다가왔다. 이에 2009년 저우샤오촨은 인민은행 웹사이트에 올린 기고를 통해 “현재 국제 통화 시스템 본연의 취약성과 시스템 상의 결함이 우려스럽다”며 “개별국가와 무관하며 장기적으로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기축통화가 필요하다”고 언급해 세계 금융시장에 기축통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중국은 이어 위안화 무역결제를 확대실시하고 아르헨티나, 벨로루시, 인도네시아 등 수많은 국가들과 통화스왑 계약을 맺는 등 위안화 국제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물론 이 작업에도 저우샤오촨 행장은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