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집약적인 예술가의 삶은 1000년전과 비슷합니다"

2011-05-04 11:03
<박현주 기자의 아트人> '말과 글' '그림으로 그림을 그린' 작가 유선태

낯익은 듯한 거대한 꽃 그림을 그린 유선태가 18세기 무명화가들의 그림을 여러개 짜깁기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주경제 박현주 기자) 마그리트, 달리, 피카소의 그림이 겹겹이 담겨있다. 누구나 보면 알만한 세계적인 거장들의 명화가 가득 들어있는 그림이 있는가 하면, 낯익지만 작가를 언뜻 유추할 수 없는 명화도 있다. 서양화의 명화외에도 강희안 신사임당 정선등 동양 고전명화의 이미지를 차용한 작품도 눈길을 끈다. 일단, 보기는 쉽다.

'그림으로 그림을 그린' 작가 서양화가 유선태 (54)씨가 3일부터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말과 글- 자전거 타는 사람'을 타이틀로 여는 이번 전시에는 50여점의 회화와 10여점의 조각을 선보인다.

고전명화를 차용한 그의 작품은 거대담론이 사라진 현실에서 작가란 대가의 것을 비틀거나 새롭게 짜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현실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오래된 명화를 그려서일까. 아크릴로 그렸는데도 유화같은 작품은 발색하지 않는다. 더욱이 오래된 찻잔에 나타난 잔잔한 크랙처럼 화면은 자잘하고 미세한 무늬로 뒤덮여있다.

"말과 글이라는 단어를 쓴 겁니다. 글자를 그리듯이 동양적인 준법으로 흘려써서 인지 글자로 보는 분들이 많지 않더라고요."

가까이 다가서보니 작품에는 '말과 글'이 빼곡하다.

"대학시절 샤르트의 '말과 글'을 읽었는데 흥미로웠습니다. 말은 순식간에 없어지기도 하지만 한번 뱉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고, 반대로 글은 썼다 지우고 다시 쓸수 있지요. 예술은 말과 글이 더해져 형상화되지 않습니까. 예술은 말과 글이 더해져 힘이 커지는데, 어차피 그럴거라면 타자의 글이 아니라 내가 말과 글을 더하자는 생각에 그림위에 글씨를 써넣었습니다. "

미술평론가 윤진섭씨는 "일일이 손으로 쓴 글쓰기는 눈속임의 차원을 넘어 현대미술의 운명에 대한 나름대로의 저항적 의미를 띄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선태, 말과 글-예술의 숲, 162.2x130.3cm, Acrylic on canvas, 2010.

그동안의 '말과 글'시리즈가 동양적인 정서를 가지고 서양화의 기법을 사용하는 정체성을 찾기 위한 과정이었다면, 신작은 일상적인 풍경, 체화된 그림속에서 사물의 의미와 개념을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구현한 작품들이다.

그는 '말과 글'이라는 단어를 써내려가면서 떠돌이로서, 외국생활에서 경험한 문화의 차이, 미술의 경우 표현하는 방법과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관점의 차이등의 문제의 해결점을 찾았다.

이번 작품은 회화와 설치, 동양과 서양, 일상과 예술의 서로 다른 질서들 사이에서, 상상의 세계를 여행하는 작가 자신이 균형점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사과 책 액자 사다리 거울등 일상에서 흔히 접할수 있는 소재를 재해석하여 회화와 입체의 차원을 왕복하고 초현실적 무대적 상황속에서 자유로움을 시도한다.

"화면에 등장하는 다양한 오브제들은 예술의 상징을 대변해 주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내가 쭉 살아오면서 봐왔던 것들을 병렬시키기도 하고 그림으로 그린 것으로 예술이란 무엇인지 생각해왔던 것들을 퍼즐식으로 모아 하나의 그림 형태로 엮었을 뿐입니다."

동양과 서양의 갖은 물상들이 모여있는 작품. 이야기거리가 많은 소재때문일까. 화면속 부유하는 시간과 공간에 예술적 상상력을 더하며 계속되는 순환을 보여준다.

평면의 그림인데도 작품은 움직임을 보인다. 그림속을 누비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 때문이다. 옛 작가들이 만든 ‘예술의 숲’으로 여행을 떠나는 작가 자신의 자아를 표현한 것. 책위에, 길위에, 하늘에 그림과 그림속에 올라서거나 들어가 있는 '자전거 타는 사람'은 유람하듯 자유로워 보인다.

작가에게 자전거는 향수이자, 유목(nomad)이고 작업의 원천이다.

"자전거에는 자유롭게 시공간을 넘나들고자 하는 저의 의지를 담았어요. 중학교때 중고 자전거가 생겼는데, 어디든지 갈수 있다는 생각에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자전거를 타고 낚시를 가고 강과 산,언덕을 오르고…. 지금 작품에 나오는 풍경은 그때 스쳐지났던, 현실적으로 기쁨을 느꼈던 산천들입니다. 내 작품을 초현실적이라고 하는데 그림속 장면은 모두 내가 보았던 것들의 기록입니다."

작가는 전주 출신으로 홍익대를 졸업하고 파리 국립 8대학 조형예술학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파리에서 오랜 유학생활을 보내면서도 동양화에 심취해 있던 작가는 장르와 시공간을 넘어 작가 특유의 감성을 녹여낸 초현실적 이미지로 국내외서 호평받아왔다. 그동안 서울과 파리 스페인 벨기에등에서 19회 개인전을 열었다. 

유선태, 말과 글-아뜰리에 풍경, 130.3x162.2cm, Acrylic on canvas, 2011.

 " 자전거는 바퀴를 굴리지 않으면 나가지 않잖아요. 힘들게 페달을 밟아야 앞으로 나가는 자전거처럼 작업도 노동집약적인 활동을 통해 나오지요. 예술작가들은 1000년전이나 500년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 같아요. 생각은 앞서가지만 구시대적인 삶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

 골동품을 좋아하고 하루종일 작업실에서 그림만 그린다는 작가는 "칸딘스키와 모딜리아니, 마티스의 작품을 보고 감탄했던 색감을 잊지못하고 있다"고 했다. 

 "저는 예술가이기보다 그림을 좋아해서 그리는 사람입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제가 작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래사장 속 모래알 한 알 같은 느낌이랄까요.  다시봐도 감동을 주는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전시는 29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