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시리즈 24]이건희의 '뒷다리'론
2010-03-04 13:12
"뛸 사람은 뛰어라. 걸을 사람은 걸어라. 능력이 없는 사람은 쉬어도 좋다. 뒷다리만 잡아 당기지 말아라. 그 대신 한 방향으로 가자."
1993년 신경영 당시 제기된 이건희 삼성 전 회장의 '뒷다리 론'은 삼성의 주요 경영 철학 가운데 하나다. 이는 '천재 한명이 10만명을 먹여 살린다'는 이 전 회장의 '천재론'과도 일맥상통한다. 10만명을 먹여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천재를 훼방하지 말라는게 뒷다리 론의 핵심이다.
이 전 회장이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은 △거짓말 하는 사람 △변명을 늘어놓는 사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 △남의 뒷다리를 잡는 사람으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가장 싫어하는 사람을 굳이 하나만 택하라면 뒷다리를 잡는 사람일 것이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어느 사회에든 존재한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맡은 바 업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인력이 있다면 반드시 이를 방해하는 사람도 있다. 때문에 이 전 회장은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발표 당시에도 "뒷다리를 잡는 사람을 잡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만명에 달하는 삼성 임직원들이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도록 이같은 인력들을 솎아 내겠다는 것.
뒷다리 론은 단지 사람에 국한되지 않았다. 학벌과 인맥, 지연 등도 이에 해당됐다. 때문에 삼성에서는 향우회, 동문회 모임 등이 엄격하게 금지된다. 공채 출신의 프리미엄도 삼성에서는 기대하기 어렵다. 외부에서 수혈한 능력있는 인재들이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기 위해서는 이같은 순혈주의도 뒷다리를 잡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국내 대다수 조직에 만연한 라인 문화도 자리잡지 못했다. 타 기업에서는 오너나 주요 경영진의 측근이라는 평가가 고속승진을 보장하지만 삼성에서는 오히려 독으로 작용할 수 있다. 라인 개발에 매달리는 조직원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삼성 임원들은 핵심 경영진의 측근이라는 평가를 오히려 부담스러워 한다.
결국 이는 조직 내에서 선의의 경쟁을 유도하고, 조직원 모두가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울러 업무와 관련되지 않은 소모적인 부문에 헛힘을 쓰지 않도록 하는 바람막이 돼왔다.
삼성 내부 뿐 아니라 외부에서도 뒷다리 론은 통용된다. 1995년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라고 역설한 베이징 발언은 기업의 투자 의지를 꺾는 정치권과 행정부처의 무능력을 성토한 것이다.
2003년 신경영 선포 10주년 당시에도 이 전 회장은 '국민소득 1만달러 극복'을 주장하며 "국민과 정부, 근로자와 경영자가 한 발씩 양보하고 뼈를 깎는 노력 을 기울여야만 2만달러 시대로 갈 수 있다"며 모두 합심해 한 방향으로 나아가자고 제언했다.
이같은 발언은 국민의 호응을 받았다. 아울러 경제성장 침체로 어려움을 겪어온 국민들이 다시 각오를 다지는 계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같은 이 전 회장의 철학은 발전적인 쓴소리 마저 뒷다리 잡기로 치부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신라시대 설총은 신문왕에게 "임금에게 필요한 것은 먹기에는 쓰지만 기운을 돕는 양약과 독을 제거하는 돌침과 같은 신하"라며 "그러한 충신들을 곁에 둔다면 언제나 따끔한 고언을 아끼지 않아 나라가 오래갈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경제에서 삼성의 비중이 커지고, 세계 무대에서 삼성의 위상이 높아갈 수록 비판적인 목소리도 더욱 커지고 있다. 이 가운데는 삼성의 발전을 위한 '양약'과 '돌침'의 역할도 있다.
삼성이 세계 일류 기업을 넘어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느냐는 이들의 쓴소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다.
아주경제= 특별취재팀 ehn@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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