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권의 싱글 톨 아메리카노) "5000원의 시련, 없기를…"
2009-06-21 15:59
5000원권은 1972년 7월 1일 세상에 나왔다. 형제인 1000원(75년 8월)은 물론 1만원(73년 6월)보다 빠르다.
같은 해 선보이려던 1만원권의 출생이 일 년 늦어지면서 본의 아니게 맏형이 됐다.
당초 1만원은 앞면에 국보 24호인 석굴암의 본존석가여래좌상을, 뒷면엔 불국사 전경을 담으려 했는데 이게 특정 종교와 관련됐다며 논란을 불렀다.
1년 뒤 석가상과 불국사를 세종대왕과 경복궁 근정전으로 각각 바꾸고서야 1만원은 겨우 세상에 빛을 볼 수 있었다.
맏형 5000원은 형제들보다 시련을 많이 겪었다. 태어난 지 5년 만에 얼굴을 완전히 뜯어고쳐야 했다. 율곡(栗谷) 이이의 초상화가 문제였다. 갸름하고 작은 얼굴에 큰 눈과 우뚝한 코, 전형적인 서구형이었다.
당시 국내엔 은행권 원판을 만들 기술이 없어 영국의 은행권 제조회사에 의로했는데 외국인 조각가는 이이를 서양인이 '정자관(程子冠 선비들이 평상시에 쓰던, 말총으로 만든 관)'을 쓴 것처럼 그려놓은 것이다.
77년 새 5000원은 일랑 이종상 화백이 그린 이이의 표준 초상을 사용했다.
다시 6년이 흘렀다. 지폐의 규격을 바꾸면서 이번엔 원판 제작을 일본에 의뢰했다. 83년 이이의 얼굴은 볼에 좀 더 살집이 붙고 넉넉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왠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왜색(倭色)’이 짙다는 것이었다. 5000원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광복 이후 발행된 우리 지폐는 모두 일본 지폐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문자의 배열이나 직인, 흰 테두리 등이 그것이다. 한은의 전신인 조선은행이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화폐를 발행했던 관행이 이어진 탓이다.
가짜 5000원도 극성을 부렸다. 2001년 235장이었던 위폐는 2002년 931장, 올 들어 상반기까지 1512장이 발견됐다.
오는 23일 5만원권이 시중에 유통된다.
모델로는 신사임당이 선정됐다. 당시 장영실, 유관순 등과 치열한 경합을 벌인 신사임당은 5000원 초상 인물인 율곡(栗谷) 이이와 모자라는 점, 표준영정을 그린 고 김은호의 친일시비, 현모양처형 전통적 여성상이라 시대에 역행한다는 지적 등으로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하지만 한은은 사임당이 여성 차별과 한계를 극복한 진취적 여성상이라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아울러 시, 글씨, 그림 등 예술적인 측면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긴 점, 헌신적 내조, 아들 율곡의 재능을 살린 교육적 성취 등을 인정해 결국 5만원권 초상 인물로 최종 낙점했다.
1만원권을 제치고 최고액권이 된 5만원권. 5만원권 발행은 10만원권 수표의 발행과 취급 비용 부담을 줄이고 소지가 간편해지는 등의 장점이 있다.
하지만 뇌물수수나 상품·서비스 가격의 상승을 초래하는 등의 부작용과 유통 초기 단계에서의 혼란도 우려된다. 5000원 맏형이 보낸 시련의 세월을 겪지 않기를…
박상권 기자 kwon@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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